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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질투한다

엄마의 늙음을 이해한다 

아이의 몸은 검은 롱 패딩을 입어도 싱그럽다. 겨울이라 여러 옷으로 부푼 몸을 움츠리고서 레깅스 신은 종아리로 종종종종 걸어가는데 내 눈에는 그 마저도 완벽한 균형으로 보인다. 


아이를 낳고 나는 변했다. 아니, 나는 늙었다. 축 쳐진 아랫배는 말할 것도 없고 얼굴에는 얼룩덜룩 기미가 피어났다. 발 뒤꿈치는 늘 까칠하고 환하게 웃을 때마다 눈가가 바스락 거리는 것만 같다. 


내가 늙는 만큼 아이는 피어난다. 아무리 밥을 많이 먹어도 다음 날 아침이면 배가 날씬하고, 그 아래로 쭉 뻗은 다리는 반듯하고 탄탄하다. 웃을 때마다 얼굴에는 예쁜 주름이 나타났다가 말끔히 사라진다. 영구치와 유치가 뒤섞여 울퉁불퉁한 치열도 꾸미지 않은 들꽃처럼 예쁘다. 


아이가 부럽다. 아이가 가진 젊음이, 가능성이, 가만히 두어도 밖으로 새어나오는 에너지가 부럽다. 너는 마음 껏 실수를 할 수 있고 소리내어 울 수 있고, 엄마 아빠를 미워할 수 있다. 어리석어도 좋고 노력하는 모습은 눈이 부실 것이다. 


그 시절을 나도 지나왔다. 그래서 지금 내 아이가 품고 있는 것들에 더 질투가 난다. 그 때 알지 못했던 것들, 그냥 흘려 보냈던 시간, 소중하지 않게 여겼던 사람들이 떠올라서. 질투를 품은 마음에서 잔소리가 시작된다. 내가 놓쳤던 것들을 너는 꼭 가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엄마는 젊었다. 스무살에 결혼해 삼년 뒤에 나를 낳았으니, 졸업식에 오는 엄마들 중에서 가장 젊은 엄마였다. 어쩌면 그래서 엄마는 나를 내버려둘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당신이 젊으니 나의 젊음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을 것이다. 동시에 엄마도 어리니 나의 어리석음이 딱히 문제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엄마도 이제 늙었다. 세 달에 한 번씩은 늙음에 대해 나에게 한탄을 한다. 여기를 째서 땡겨볼까, 1일 1팩을 했었더라면 달라졌을까, 콜라겐 좀 골라주겠니. 결국 어느 해 생일에는 눈 아래 지방을 걷어내고야 말았다. 나는 이런 얘기가 오갈 때마다 어차피 늙는 거, 곱게 늙는 것을 목표로 하자고 말하지만, 사실 나도 거울 앞에서 여기 이 기미만 좀 없애볼까 하며 시간을 보낸다. 


엄마는 내 옷을 부러워한다. 엄마가 사는 지방에는 그런 게 없다고 말하지만, 어쩌면 엄마도 이미 흘려보낸 시간이 지금 나에게 머물러 있음을 부러워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종종 내가 입고 간 옷을 벗어놓고 오면서 그런 엄마를 달래지만 엄마 눈엔 언제나 내가 더 젊어보이고 내가 입은 옷이 더 좋아보이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엄마에게 질투 받고 아이를 질투한다. 얼른 어른이 되고 싶다는 아이의 조바심을 이해하고, 늙어서 힘들다는 엄마의 푸념도 이해한다. 그 사이에서 여전히 아이처럼 실수하고 노인처럼 한숨을 쉬며 하루하루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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