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아직 딸이다
유치원에서 전화가 왔다. 아이가 토를 했다고. 컨디션은 나쁘지 않은지 일정에 있던 블루 라이트 행사를 보고 싶다고 해서, 30분 쯤 뒤에 데리러 갔다. 그리고 사흘 간 아이는 배가 아팠다.
식사 때마다 죽을 끓였다. 흰 죽은 도무지 넘어가질 않는다고 해서 소고기 미역죽도 끓이고 감자죽도 끓였다. 아이의 한 그릇만 끓이긴 어려워서 나도 같이 죽을 먹었다. 먹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 옆에서 나만 다른 걸 먹을 수 없어서 나도 허기가 졌다. 그렇게 사흘을 하니 아이는 식욕이 돌아왔고 배아픔도 가라앉았다. 다음 날 점심으로 죽 도시락을 싸가기로 하고 유치원애 보냈다.
그 날 오후, 귀신 같이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주변 누군가에게 배운 방법으로 물김치를 담갔는데 너무 맛있다고. 2월 말 함께 가기로 한 속초 여행 때 새로 담아 갈테니 좀 가져가라고. 한참을 이모들과 아버지 이야기, 엄마가 요새 새로 배우기 시작한 드럼 이야기를 하다가 기회를 봐서 말했다.
"딱풀이가 아팠어."
"어디가?"
"장염. 월요일에 유치원에서 토했어. 어제까지 데리고 있다가 오늘 유치원 보냈어."
예전 장염 때 엄마는 "뭘 먹였길래 그래."라고 말했고 나는 그 말에 머리가 띵 하도록 화가 났다. 아이가 아프면 엄마 탓인건가. 모든 사람들이 그게 왜 엄마 탓이야, 라고 말해도 엄마 본인은 내가 뭘 잘못했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나의 엄마는 대 놓고 네 잘못이야! 라고 말하고 말았다. 나는 "집밥 먹였어!"라고 발끈했고 엄마는 그 말 속에서 원망을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번에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아이구. 근데 애들은 원래 아프면서 크는거야."
정답이지만 정답이 아니다.
'고생했겠네' 이 말이 듣고 싶었다. 아이는 그저 아프면 되지만 나는 온갖 것을 생각하고 실행해야 한다. 잠을 편히 자지 못했고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입이 헐기 시작했고 몸살 기운도 좀 있다. 이런 노고를 인정받고 싶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엄마에게. 나의 엄마만큼은 손녀보다 나를 먼저 생각해주었으면 싶다. 나는 엄마의 딸이니까.
아이가 태어난 뒤로 집안 사람들은 내 안부를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 덕분에 나는 시부모님에게 명절 인사를 해야 할 때나 생신 축하 메세지를 전해야 할 때 아이 뒤에 숨을 수 있다. 편해졌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이의 눈부신 성장 그 속에서 엄마만이라도 나를 봐주었으면 좋겠다.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내가 말한 '아이의 아픔' 뒤에 있었을 '나의 노고'를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이 마음 때문에 아이가 아프면 나는 엄마에게 서운해지곤 한다.
아이의 다음 아픔 때는 저 말을 들을 수 있을까. 아마 힘들 것이다. 이 마음은 응석일 뿐이라 나도 굳이 엄마에게 말하지 않았으니. 그저 전화를 끊고 고단한 몸을 누이고서 오랜만에 내 마음을 들여다본다. 누군가의 딸로 귀함을 받고 싶은 내 마음, 여전히 거기 있구나,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