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정한 퇴사가 주는 감사
이래뵈도 나는 프로 퇴사러다. 벌써 몇 번째 퇴사인가. 대충 꼽아봐도 다섯 번이다.
그 모든 퇴사가 좋았던 건 아니다. 어떤 부장님은 자신의 인사 고과를 위해 무턱대고 나를 붙잡기도 했고 어떤 대표님은 내 앞길에 악담을 퍼부었다. 그럴수록 나의 퇴사의지는 더욱 강해졌다.
어떤 퇴사를 위해서는 거짓말을 해야했다. 이 회사를 더 이상 다니기 싫은 이유에 대해 차마 솔직히 말할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 당신에게 더 이상 보고 배울 게 없어서
- 당신이 갑질하는 꼴을 더는 참을 수 없어서
- 당신이 나에게 시키는 일이 너무나도 쪽팔린 짓이라
난 기본적으로 '나쁜 말은 내뱉지 않는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어서 이런 말을 상대의 얼굴을 보며 할 생각은 없었다. 그럴 땐 제일 만만한 핑계를 댄다
- 제가 이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 제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이 생겼습니다.
- 제가 집안에 일이 생겼습니다.
퇴사를 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한 선택이긴 하지만, 이렇게 하고 나오면 내 마음도 좋지 않다. 그래도 한때 내가 열과 성의를 다했던 시간인데, 그 시간들을 거짓말이라는 박스에 대충 쑤셔 넣어 놓고 떠나온 기분이 든다. 그래도 떠나려면 어쩔 수 없었지만.
이번에는 솔직할 수 있었다. 진짜로 하고 싶은 일이 생기기도 했거니와 감사하게도 하던 일이 잘 마무리 되었다. 회사는 그 일을 끝까지 감당해 준 나에게 고마워했고, 나 역시 그 회사 그 업무의 한 페이지를 맡을 수 있어서 감사했다. 다만 이제는 시장이, 그리고 시대가 그 일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언젠가는 그 일을 손에서 놔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차일 피일 미루던 중, 내 치약이 말라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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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상사를 찾아가 말했다.
저는 할 수 있는 것을 다 했고, 이 일의 끝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저의 역할은 여기까지 인 것 같습니다.
그제야 대표님은 이 일에서 손을 떼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나는 백수가 된 것이다.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제일 먼저 나와 함께 일했던 동료에게 소식을 전했다. 이전부터 어느 정도 이 일에 대한 고민을 함께 나누었던 사이인지라 설명이 어렵진 않았다. 다만 둘이 함께 일했는데 나만 떠나게 되어서 미안한 마음이었다. 몇 번이나 혼자 두고가서 미안하다고, 앞으로도 잘 하실거라 믿는다고 말했다.
이전에 같은 팀이었던 부장님과, 그 팀에서 지금까지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 그리고 입사 초기에 많이 도움 받았던 실장님에게도 차례로 인사를 드렸다. 고맙게도 아쉬워해주셨고 수고했다는 말들이 오갔다.
이렇게 퇴사를 할 수 있다는 건 감사한 일이다. 언젠가의 내 퇴사는 한밤 중 탈출극에 가까웠고 또 언젠가의 퇴사는 침묵 속에서 이루어졌다. 마흔이라는 내 나이가 어느 정도 연륜을 만들어 준 것이기도 하겠지만 나는 이번 회사 구성원들과 함께 해왔던 시간의 결과라는 생각이 든다. 함께 고생했고 함께 고민했고 함께 힘들어했고 함께 기뻐했고 함께 화를 내기도 했던.
무엇보다 나의 결정을 이해해주고 응원해준 대표님과 이사님께도 감사하다.
다시 이런 회사, 이런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까. 그게 지금으로서는 가장 걱정이 된다. 나는 내 인생에 있어서 꽤나 중요한 운을 내 발로 차버린 건 아닐까.
하지만 이제는 혼자다. 나는 스스로 선택해야 하고 그 선택이 옳았음을 스스로 증명해 내야 한다. 운명이 이끌어주는 길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운명을 선택하고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분명 그 길 위에도 여러 사람이 있을 것이다. 또 만나고 함께 일하고 함께 화를 내고 고마워하다가 헤어지는 일이 반복될 것이다. 그때마다 늘 좋을 수는 없겠지만, 언제나 나는 감사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