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 중 내 시간 사수하기!
외동인 아이가 방학을 했습니다. 이 말은 곧 내 시간이 없어진다는 뜻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 시간이 없는 게 싫어서 퇴사를 개학 이후로 미룰까 생각도 해보았습니다만, 그건 또 회사 동료들에게 할 짓이 아닌 것 같아서 회사에게 가장 좋은 때를 정해 퇴사를 했어요. 그게 방학 이틀 전.
여행을 다녀오고 나니 방학이 실감이 납니다. 아침 밥을 먹은 아이는 방 안을 난장판으로 만들며 종이도 오렸다가 비즈도 꿰었다가 스퀴시도 만들었다가 하고 있습니다. 그 사이 저는 설거지를 하고 집안 청소도 한 번 하고 이제야 한 숨 돌리려고 하는데...
"엄마, 우리 뭐하고 놀까?"
외동을 둔 엄마의 숙명이지요. 하지만 저도 살아야겠기에, 이대로 아이의 요구만 들어주다가는 오늘 저녁 제가 마귀할멈으로 변해버릴 가능성이 농후하기에 일단 도망을 쳤습니다.
"엄마는 책 읽을거야. 공부해야 돼."
"엄마 회사 그만 뒀잖아. 무슨 공부를 해?"
"공부는 평생 하는거야. 안 그러면 멍청해져!"
당연히 아이는 서운해 합니다.
"방학인데 나랑 안 놀아줘?"
"방학인데 왜 너랑 놀아야 돼? 우리 여행도 잘 다녀왔잖아. 이제 각자의 시간을 가질 때야."
그래도 한 가지 타협한 것은 같은 공간에 있겠다는 것. 어차피 제 책상이 아이의 방 한켠에 아이 책상과 나란히 있기 때문에 같이 있을 수 밖에 없는데요, 그걸로 일단 생색은 냈습니다.
"대신 엄마, 종종 말 시켜도 되지?"
"응. 얼마든지."
아이를 낳기 전에는 시간의 종류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집중도에 따라 나누자면, 3가지 정도 되었을까요?
1. 초집중 상태 - 공부를 하거나 어려운 책을 읽을 때
2. 적당한 집중 상태 - 일을 하거나 좋아하는 드라마, 책을 볼 때
3. 낮은 집중 상태 - 밥을 먹거나 사람들과 가벼운 대화를 할 때
뭐 거칠게 나누자면 이 정도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난 후부터는 시간의 종류가 아~주 많아졌어요.
1. 초집중이 가능한 상태 (집중가능도 100) - 혼자 있는 상태에서 공부를 하거나 어려운 책을 읽는다.
2. 초집중해야 하지만, 불가능한 상태 (집중 가능도 80. 그러나 언제라도 쉽게 깨질 수 있음) -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거나 일을 해야 하는데, 아이가 함께 있다. 이럴 땐 초 예민 상태라서 자칫하면 아이에게 화를 내거나 싸울 수 있다.
3. 적당한 집중 상태 (집중 가능도 80)- 혼자 있는 상태에서 요리를 하거나 가벼운 책을 읽을 때
4. 아이가 있으면서 적당한 집중 상태 (집중 가능도 60)- 아이가 있지만 아이가 혼자 잘 노는 상태. 한 쪽 귀와 감각은 아이에게 가 있는 상태에서 요리를 하거나 집안일을 한다. 운이 좋으면 레시피를 찾아봐야 하는 새로운 요리도 가능하다.
5. 아이에게 집중해야 하는 상태 (집중 가능도 30) - 아이가 관심을 요구하거나 같이 놀아달라고 할 때의 상태. 내 일은 전혀 할 수 없으며, 딴 생각도 할 수 없다.
6. 방전 상태 (집중 가능도 0) -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느라 완전히 지쳐버린 상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이때는 그냥 SNS을 보거나 맥주를 마신다.
여기서 더 큰 문제는 이 1~6번의 시간이 언제 어떻게 닥쳐올지 '예상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즉,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태에서 이 시간들이 뒤죽박죽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나는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한 채 이 시간들을 맞이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다보니 집에는 여기저기 책이 쌓여있어요. 그때그때의 집중도에 맞는 책을 집어 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디를 펼쳐도 금세 빠져들 수 있는 만화책도 있고, 오래도록 들여다봐야 하는 두꺼운 책도 있고, 집중이 전혀 안되지만 집중을 할 수 있는 시간이 확보됐을 때 펼치는 필사책도 있습니다.
오늘은 운 좋게도 아이가 '엄마의 시간'을 이해해주어서 아이 옆에서 책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시간은 대략 4번, 적당한 집중 상태 (집중 가능도 60)이기 때문에 어려운 책은 읽기가 힘들어요. 그래서 제가 선택한 것은 이 책의 내용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로버트 맥기 -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
집중도가 낮을 수 밖에 없을 때는 눈이 아닌, 손으로 읽어야 합니다. 그래서 내용을 정리하면서 책을 읽었어요. 아이가 한 번씩 말을 시키긴 했지만, 그래도 만족스러운 시간이었습니다.
점심은 못난이 삼각김밥
아이가 참치마요 삼각김밥이 먹고 싶다길래 뚝딱뚝딱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김 사이즈 맞추기가 생각보다 어렵더라고요? 김이 이쪽 저쪽 남아서 이리저리 휘감았는데 결과물은 저렇게 고깔 모양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도 아이는 잘 먹어주었어요. 고마워라. ㅠㅠ
이렇게 고요한 전쟁을 마치고 아이는 학원에 갔고요, 저는 마저 책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후 저녁 시간은 어떻게 보냈는지 모르겠어요.
다들 치열한 방학 보내고 계시죠? 아이가 없는 분들이라 하더라도 이 여름은 참 지치기 쉬운 계절입니다. 그래도 우리, 시원한 냉수 마셔가며, 아아를 붙잡아 가며 정신 차려보자고요! 겨울이 오면 또 '최대의 한파'가 몰려오면서 이 여름이 그리워질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