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딸아, 마음이 복잡하면 길을 걸으렴

그것이 뜨거운 여름빔이라면 더 좋다 

푹푹 찐다. 

환기를 하려고 창문을 여는 순간 더운 바람과 함께 습기, 그리고 후회가 밀려온다. 창문을 왜 열었을까. 잠시라도 걸으려 하면 어디선가 피어난 습기가 한 겹 한 겹 내 길을 막아서는 것 같다. 그래서 며칠 째 낮에는 나가지도 못하고 집에만 들어 앉아 있다. 


그랬더니 소화가 되질 않는다. 


뭘 먹어도 속이 더부룩하고 입맛도 없어졌다. 에어콘 바람에 아이가 코를 그릉 거리고 집에만 있으니 짜증이 늘어간다. 결국 우리는 오늘 저녁으로 코스트코에서 사온 소고기로 치즈 버거를 만들어 먹고, 바로 밖으로 나갔다. 


함께 걷는 시간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시간은 정말이지 끔찍하리만큼 숨이 막혔다. 그 공간은 어째서인지 여름에는 가장 덥고 겨울에는 가장 춥다. 그렇게 꽉 막힌 더위를 경험하고 난 덕분에 바깥 바람은 오히려 시원하게 느껴진다. 게다가,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지그재그로 서 있는 단지를 빠져나와 작은 공원에 이르니 그 바람은 한껏 더 신이 난 듯 경쾌하게 불고 있었다. 공원에는 야구를 하는 아이와 아빠, 강아지 산책 시키는 몇몇 가족들이 있었고, 우리도 그 어딘가에서 그 무리에 합류해 공원 주변 산책로를 걸었다. 걷다가 철봉이 나오면 매달리기도 하고 유난히 예쁘게 핀 분홍빛 꽃나무 사진을 찍어 그 이름이 '배롱나무'라는 것도 알아냈다. 그러다 문득, 공원 바깥 거리로 나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크게 돌자 


공원을 빠져나와 도로 옆 인도를 걷는다. 잠깐 아이스크림 할인점에 들려 살 얼은 생수 두 병을 사서 좀 더 걸을 채비를 한다. 어느 새 하늘은 어두워졌지만 그 너머로 아직 푸른 빛이 스며나오고 있다. 


어째서인지 도로가 한가하다. 내일 출근을 해야 하니까 다들 오늘 저녁은 시원한 집에서 쉬기로 했나보다. 한편으로는 이 더운 도시를 떠나 더 상쾌한 바람이 부는 어딘가로 떠났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덕에 텅빈 거리를 우리 세 식구는 함께 걸었다. 


엄마 아빠랑 걸으니까 좋다 


실없는 농담들이 우리 세 사람 사이를 채운다. 방학 내내 혼자 심심했던 아이는, 이런 시간이 좋은가보다. 엄마 아빠가 자기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고 손을 꼭 잡아주는 시간. 함께 물을 나눠마시고 같은 곳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걷는 시간. 아이는 연신 '같이 걸으니까 좋다. 우리 내일 저녁에도 나오자' 말하며 웃었다. 


하늘이 점차 검푸르게 바뀌고 있다. 여전히 도로에는 차가 없고 배달 중인 듯한 오토바이 한 대가 잠시 고요를 가르고 달려간다. 조용해서 그런지 괜히 하늘도 더 넓어보인다. 아이도 내 옆에 서서 이 사진을 함께 찍었다. 지금 아이의 휴대폰에도 이것과 비슷한 사진이 담겨 있다. 


누군가 그랬다. 인간은 걸어야 생각을 할 수 있다고. 아주 천천히, 그러나 계속해서 바뀌는 주변 풍경들은 우리의 생각을 자극한다. 오랜 고민이 잠깐의 산책 덕에 풀리는 경험도 있고, 무거운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는 것도 산책의 힘 덕분일 때가 많았다. 


이 시간을 아이와 함께 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 나는 오늘 저녁, 훗날 아이가 복잡한 생각으로 괴로워하는 날이 오면 산책을 하자고 말해주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엄마라서 달린다, 러닝 스토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