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의 즐거움이 제일 중요하니까
방학이다.
방학 전 아이는 학교에서 나름의 생활 계획표를 만들어 왔지만, 나에게 보여주지도 않고 이렇게 말했다.
"엄마, 이건 그냥 쓴 거야. 알지?"
그 말은 곧, 그 계획과는 상관없는 방학을 보낼 테니, 그리 알라는 뜻일 것이다. 나도 딱히 기대하지는 않는다. 나는 무려 고 2 때까지 방학이면 하루 종일 텔레비전 앞에 앉아서 드라마만 봤다. 그래도 멀쩡한 대학 갔고 멀쩡하게 살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딱 하나 아이를 붙잡고 하기로 한 것이 있는데, 그건 바로 '수학 복습'이었다.
예습이 아니라 복습을 시키는 이유
나는 아이가 학교 교실에서 즐겁게 배우길 바란다. '배움'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독서도 배움이고 경험도 배움이며, 수업도 배움이다. 그중 '수업'은 아이의 하루에서 상당히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초등학생만 하더라도 하루에 4~5교시 수업을 주 5일 받아야 한다. 즉, <내 아이의 배움> 가운데 '수업'이 차지하는 시간적 비중이 가장 크다는 것.
나는 그 시간들이 즐겁기를 바란다. 게다가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꽤 잘 가르치고(대체로 엄청난 노하우를 가지고 계신다) 교과서나 수업 자료도 나쁘지 않다. 이 시간을 제대로 활용하는 것은 아이에게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예습을 시키지 않는다. 아이가 교실에서, 선생님의 눈을 보며, 새로운 것들을 배우는 즐거움을 깨닫길 바라기 때문이다.
만약 아이가 학원에서 모든 것을 배우고, 학교에서 다 아는 얘기만 듣느라고 재미없는 날들을 보낸다면, 그건 아이에게도 부모에게도 참 슬픈 일일 것 같다. 그리고 학원과 학교의 목표는 다르다. 학원은 그저 성적만을 위해 가르치지만, 학교는 전인적인 성장을 위해 가르친다. 그래서 음악도 배우고, 체육도 하고, 도덕도 배우는 거다.
그중에서 '수학'만 시키는 이유
나는 사실 아이가 초등학교 때에는 학업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다행히 남편도 같은 생각이라서 우리는 거의 공부를 시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기 중에 한 권, 방학 중에 한 권 수학 문제집을 같이 푸는데, 그 이유는 '수학'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과목(국어, 과학, 사회 등등)은 학습 목표가 학년마다 반복되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다. 국어는 웬만큼 글을 읽어낼 줄 알면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학업에 크게 문제가 없다. 그리고 그 '읽어냄'의 힘은 문제집보다는 독서력으로 키워주는 게 맞고, 그 독서력은 '부모와의 대화'에서 시작되는 게 맞다고 난 생각한다.
사회나 과학도 마찬가지다. 아이가 배워오는 걸 보니 사회 과목에서는 우리 동네, 우리 고장에 대해 배우는 것 같은데, 학년이 올라갈수록 이것이 더욱 확장되어 우리나라가 될 것이고, 언젠가는 세계의 여러 대륙에 대해 배울 것이다. 이렇게 다루는 범위는 확장되겠으나, 중요한 내용은 거기에서 거기일 가능성이 높다. 그곳의 문화, 언어, 다른 곳과 다른 점, 역사, 지리... 겠지?
그런데 수학은 다르다. 수학은 학년마다 내용이 반복되는 게 아니라, 쌓여가는 것이다. 1학년 때 배운 내용을 모르면 2학년 수학을 잘할 수 없고, 2학년 때 배운 구구단이 없으면, 3학년 때 나오는 곱셈과 나눗셈은 아무래도 어려울 수 있다. 그래서 수학만 내가 옆에서 봐주면서 문제집을 한 권, 푼다.
아이는 그 한 권도 싫어한다.
문제집 풀자고 말만 해도 얼굴에 싫은 티가 역력하다. 그럴 때마다 사실 나도 갈등이 된다. 공부 좀 못하면 어떤가. 대신 다른 거 잘하는 게 또 있겠지. 그러니까 그냥 이것도 하지 말고 놀게 놔둘까... 싶다가도 오늘은 마음을 다 잡았다.
나도 고민된다.
성실이라는 것, 노력이라는 것, 하기 싫은 것을 해낸다는 것, 그것이 무엇인지 살짝이나마 가르쳐주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겁이 난다. 나의 이런 선택들이 아이를 '배움'이라는 것에서 더 멀어지게 하는 건 아닌지. 또는, 나의 이런 나태한 태도 때문에 아이가 훗날 엄청나게 고생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엄마, 그때 나 공부 좀 시키지 그랬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아는 것은, 이런 시간들이 필요하다는 것뿐. 훗날의 후회도, 반성도, 그때의 몫이겠지. 나는 내가 아는 가장 좋은 것을 아이에게 준다. 그것이 나중에는 '그리 좋은 것이 아니었음'으로 밝혀진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이것이 지금 나에게는 최선이다.
나는 고 2 때까지 방학이면 TV만 봤는데, 아이에게는 문제집을 한 권 풀게 한다. 나보다는 쪼끔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나보다는 조금만 더 '관심' 속에서 자라고 있다는 것을 아이가 느껴주기를 바랄 뿐이다.
아이의 그림들. 훗날 수학과는 상관 없는 '이모티콘 작가'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