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속 '학규'는 배우 이장우 님을 떠올리며 썼습니다.
소설 속 '현경'은 배우 엄현경 님을 떠올리며 썼습니다.
인생은 아무래도 라면의 맛이라고 지금 봉구는 생각하고 있었다.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 맛. 위장이 허락한다면 영원히 흡입하고 싶은 맛.
어제 저녁 7시 지연과 현경은 나란히 집에 들어왔다. 지연이 퇴근길에 유치원에 들러 현경을 데려온 것이었다. 들어올 때부터 두 사람은 매우 소란스러웠다.
“진짜요? 봉구 씨가 그렇게나 둔해요?”
“그렇다니까요. 이마에 물총을 쏴도 묵묵, 등에 이만한 눈덩이를 던져도 부답, 오죽하면 오빠가 말을 못하는 줄 알았던 애들도 있었어요.”
오빠라는 말은 오늘 아침부터 봉구가 가장 싫어하는 단어가 되었다. 봉구는 가느다랗게 째려보는 눈과 동그랗게 반가운 눈을 번갈아 만들며 현경과 지연을 차례로 보았다.
“오빠! 언니가 먼저 청혼 했다며?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말을 하고 살아야지. 그렇지요, 우리 서린이 어린이?”
“네! 선생님, 진짜 우리 아빠랑 친구예요?”
아니야. 친구 아니야. 현경이는 그저 인생에서 가장 소란스러운 인간일 뿐이라고 봉구는 설명하고 싶었지만 세 여자의 수다는 전혀 끼어들 틈이 없었다.
“응. 친구예요. 서린이처럼 어릴 때부터 같이 살았어요.”
“그럼 선생님이 내 고모예요?”
서린이의 천진한 말에 지연과 봉구 부부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아빠에게 가족이 없다는 건 한 두 번 말을 한 적이 있었지만 자세한 얘기는 더 크면 해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고모라니? 그것도 주현경이?
“그렇죠. 우리 서린이 지난주에 배운 가족 나무를 잘 기억하고 있구나! 다음에 가족 나무 그릴 때는 한 쪽 가지에 선생님 사진도 붙이고, 고모라고 적어주세요!”
“네!”
엄마 아빠가 망설이는 사이 현경은 고모라는 타이틀을 차지해버렸다. 현경이 내 여동생이라니, 봉구는 없는 호적이라도 만들어서 파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서린이를 봐서 한 번은 참기로 했다. 그래도 마냥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서 현경의 볶음밥에 있던 햄을 몇 개 건져서 지연의 볶음밥에 올려놓았다.
“진짜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오빠가 요리를 하다니. 이거 먹을 수는 있는 거야? 언니, 우리 보육원 급식이 진짜 맛이 없었거든요? 그 책임의 90%는 다 봉구 오빠한테 있었다고 전 생각해요.”
“왜요? 그때도 봉구 씨가 요리했어요?”
(봉구가 잠시 지연을 째려보...다 말았다.)
“아니요. 봉구 오빠는 뭐든 잘 먹잖아요. 나물이 싱거워도 잘 먹고, 국이 너무 짜도 잘 먹고 고기가 질겨도 잘 먹고 심지어 조개에 모래가 씹혀도 잘 먹잖아요. 그러니까 조리사 선생님도 더 노력을 할 이유를 찾지 못했던 거죠. 맛없다고 반찬 남기는 애들만 혼났어요.”
그 후로도 현경은 봉구의 보육원 썰을 한참동안이나 늘어놓았다. 어쩜 저렇게 쉬지도 않고 말을 하는지. 밥을 크게 떠 넣어서 입을 막고 싶은 걸 참느라 혼났다. 어느 새 9시가 넘어 봉구가 서린이를 재우고 나온 사이, 지연과 현경은 서린이의 새우 과자를 펼쳐 놓고 집어 먹으며 수다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딩동-
아니, 아이가 자는 집에 누가 초인종을 울린단 말인가! 이런 짓을 할 사람은 아이를 키워본 적 없는 총각, 학규 뿐이었다.
“나 설거지도 안 하고 왔어. 현경이가 왔다고?”
“어머, 학규 옵빠!!!!!!”
봉구가 다급하게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댔다. 좀 조용히 좀 해! 서린이 잔다고! 그러자 현경과 학규는 음소거한 드라마 속 남녀처럼 소리 없이 부둥켜안고서 폴짝이며 반가워했다. 쟤네 둘이 저렇게 친했었나?
“지연 씨한테 연락 받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그 코찔찔이 현경이가 유치원 선생님, 그것도 서린이 선생님이라니! 와, 인간승리다, 주현경!”
“내가 원래 좀 반전 매력이 있지. 오빠는 결국 요리사 됐다며?”
현경이의 반가운 인사를 뒤로 하고 학규는 자연스럽게 주방으로 들어갔다.
“구봉구, 배운 거 착실하게 써 먹고 있네? 채소 크기가 아주 좋아.”
아직 치우지 못한 설거지 거리를 보던 학규가 가방에서 와인을 한 병 꺼냈다. 와인을 보더니 지연과 현경이 함께 음소거 환호성을 지른다. 이어 학규가 가방에서 치즈와 크래커, 토마토를 꺼내더니 뚝딱뚝딱 멋진 안주 접시를 만들어냈다.
“진짜 반갑다. 다들 이렇게 어른 돼서 만나니까 너무 감사하네. 앞으로도 자주 만나자!”
“짠!”
“짠!”
와인 잔이 두 개 뿐이라서 봉구와 지연은 물컵 에 와인을 담아 들고 건배를 했다. 늘 볶음밥과 된장국만 있던 식탁에 붉은 와인과 선명한 카나페가 놓여 있으니 분위기가 전혀 달라보였다. 현경이 식탁등만 두고 다른 불은 다 끄더니 휴대폰으로 분위기 좋은 음악을 틀었다. 그랬더니 조금은 학규네 레스토랑 느낌도 나는 것 같았다.
“봉구 오빠가 살림을 한다고요?”
“네. 안 그래도 서린이가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서 미안했는데 때마침 딱! 봉구 씨가 짤렸거든요.”
“언니도 참, 사고방식이 긍정적이시네요. 하긴 그러니까 봉구 오빠랑 결혼했겠지.”
봉구는 현경을 째려보았다. 현경은 그 눈빛을 피하지 않고 받아내며 장난스레 웃었다.
“어느 날 서린이가 웬 곰 같은 남자랑 등원을 하는데, 그 실루엣이 아무리 봐도 낯설지가 않은 거예요. 단순히 키가 크고 덩치가 좋은 게 아니라, 오빠는 어딘가 모르게... 곰이잖아요. 손도 솥뚜껑 같고. 혹시나 싶어서 이름을 찾아봤더니 이름도 구봉구고. 그래서 혹시나 싶었죠. 혹시 봉구 오빠가 아닐까.”
“그래도 그렇지 엄마들 잔뜩 있는 곳에서 오빠가 뭐냐, 오빠가. 하여튼 너는 하나도 안 변했어.”
낮에 있었던 일을 전해들은 학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반가운 걸 어떻게 해. 그나저나 그 일 때문에 오빠 완전 불륜남 됐다며? 대박, 어딜 봐서 저 얼굴로 불륜이야? 엄마들 상상력도 참.”
그 상상력을 불 지핀 게 바로 너라고, 주현경!! 봉구는 와인 병을 들어 와인을 콸콸콸 따라 마셨다.
“그런데 저, 진짜로 가슴이 철렁 했잖아요. 결국 탄로가 났구나, 봉구 씨의 매력이. 하고는.”
얼굴이 살짝 붉어진 지연이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봉구 씨의 저 곰 같은 외모가, 저는 갑옷처럼 느껴졌거든요. 여리고 부드러운 속을 감추는 갑옷. 친절하고 상냥하고 배려심 깊은 그 속을 나 혼자만 알고 있는 게 좋았는데, 아뿔싸! 내가 방심한 틈에 들통이 나버렸구나, 싶었다니까요?”
심쿵. 갑작스런 지연의 고백을 들은 봉구야 말로 심장이 내려 앉는 것만 같았다. 4년의 연애와 7년의 결혼 생활 동안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말이었다. 지금 얼굴이 조금 빨개진 것 같은데. 조명이 어두워서 들키진 않겠지? 그 감동을 깨뜨린 것은 봉구의 옆구리를 찌른 현경의 손가락이었다.
“평생 받들고 살아라. 저런 언니가 세상에 어디 있냐?”
이번에야 말로 한 마디 해줘야겠다 싶어 현경을 노려보는 순간, 봉구는 흠칫 놀랐다. 현경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부러워. 나도 언니 같은 남자 만나고 싶어요. 나 진짜 괜찮은 사람인데, 번듯한 직장도 있고. 심지어 취미가 독서라니까요? 그런데 연애는 좋아도 결혼은 싫대. 나는 일부러 썸 탈 때부터 얘기하거든요. 나 보육원 출신 고아라고. 그 당시에는 괜찮다고, 좋다고 달려들던 남자들이 결혼 얘기만 나오면 헤어지자는 거예요. 간혹 남자가 괜찮다고 하면 그 쪽 부모님들이 반대하시고. 얼마 전에는 돈 봉투도 받았다니까요? 언니, 그거 진짜 주더라고요. 내 아들이랑 헤어져라, 하는 돈 봉투. 그거 받아서 아가사 크리스티 전집 특별판 샀어요.”
“하하하하하하”
현경의 등을 쓸어주며 위로하던 지연이, 아가사 크리스티 전집이라는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현경은 자기의 하소연 때문에 분위기가 가라앉는 것이 싫어서 일부러 그 이야기를 꺼냈을 것이다. 그제야 봉구는 현경이 보기와는 다르게 배려심이 있는 아이였다는 게 기억 났다. 급식 조리사 선생님이 요리에 성의가 없어지자 현경은 먼저 나서서 당차게 따졌다. 그럼에도 별 변화가 없자 아예 조수를 하겠다며 조리실에 들어가 거들었다. 그 덕분에 급식 맛은 조금이나마 나아졌고 어린 동생들도 편식 없이 밥을 먹을 수 있었다. 뻔하디 뻔한 어린이날 행사 대신 번듯한 도서관이 생긴 것도(물론 거기에도 아가사 크리스티 전집이 있었다.) 아침 기상벨 대신 클래식 라디오를 틀게 된 것도 모두 현경의 반항심으로 얻어낸 결과물이었다. 그런 현경이 보육원 출신이라는 이유로 여러 번 거절을 당해야 했다니, 봉구는 오랜만에 속상함이라는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아예 결혼 생각 없어. 너도 너무 결혼에 목매지 마.”
이어지는 학규의 말에 봉구는 한층 더 놀랐다. 학규만큼 결혼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남자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성실한 태도와 능력, 친절한 성품, 대체 뭐가 더 필요하지? 학규는 잔에 와인을 다시 채우며 말했다.
“그래도 우리, 진짜 괜찮은 어른이 된 것 같다, 그치? 난 지금 너무 감동했어. 우리에게.”
“저도 끼워주시면 안 돼요? 저 방금 소외당한 것 같은데.”
지연이 배시시 웃으며 잔을 들어 올렸다.
“아유 이 놈 건사해주셨으면 지연 씨는 평생 할 일 다 하신 거죠. 늘 존경하고 있습니다.”
학규가 지연의 잔에 와인을 따라주었다.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마시다 보니 어느 새 12시가 넘어가 있었다. 금요일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으어어어어
다음 날 아침 봉구는 습관처럼 6시에 눈을 떴지만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알코올을 섭취했더니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힘겹게 몸을 일으켜 나가보니 거실 소파에는 학규가 자고 있다. 현경은 아마 저쪽 서재 방에서 뻗어 있을 것이다.
봉구는 냉장고를 열어 채소와 찬밥을 꺼냈다. 어른 네 명과 아이 한 명이 먹을 볶음밥은 대체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 잠시 고민하던 차에 학규가 좀비처럼 휘적휘적 다가왔다.
“이 새끼 또 볶음밥이네. 아우 지겨워 진짜. 넌 어떻게 하나를 알려주면 딱 하나만 알고 사냐.”
무슨 소리인가. 그 날 양배추를 영접한 후로 성일의 볶음밥은 분명 진화했다. 햄 종류도 다양해졌고 가끔 버섯도 다져 넣는다. 얼마 전부터는 심지어 간장도 두른단 말이다! 그때 학규가 가방에서 라면 4봉지를 꺼냈다.
“늬 집에는 이런 거 없지?”
언제 적 멘트인가. 손에 감자라도 들고 말을 하든가. 하지만 성일의 집에 라면이 없는 건 사실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라면만큼은 허락할 수 없어.”
그것이 지연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갖가지 냉동식품과 레토르트를 충분히 먹고 있던 시절, 지연은 라면만은 먹지 않겠다며 사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학규가 끓인 라면 냄새에 가장 먼저 튀어나온 것도 다름 아닌 지연이었다.
“나 울 것 같아, 봉구 씨. 새벽에 딱 라면이 먹고 싶었거든.”
저까짓 라면이 내 볶음밥보다 맛있다는 건가? 그렇다. 맛있었다. 얼마나 입에 쫙쫙 붙던지 봉구도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 뻔 했다. 라면은 천재였다. 맛의 천재. 심지어 서린이도 찬 물에 헹궈가며 맛있게 먹었다.
“그래도 이 집에 찬밥은 있네.”
어른 넷과 아이 하나는 라면 국물에 찬밥까지 말아서 야무지게 먹었다. 마지막 국물까지 야무지게 먹은 봉구가 고개를 들어보니 지연과 현경, 그리고 학규와 서린이까지 모두가 고개를 숙인 채 열심히 라면을 먹고 있었다. 봉구는 생각했다. 이것이 바로 라면의 맛이라고. 혼자 먹어서는 절대로 느낄 수 없는, 함께 먹을 때만이 느낄 수 있는 라면의 맛. 커다란 냄비에 끓여서 젓가락으로 덜어먹는 라면은, 컵라면이 줄 수 없는 훈훈함을 맛보게 한다. 봉구는 자신에게 이런 가족이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서린이에게 고모와 삼촌이 있다는 사실이 새삼 너무 행복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라면 만으로도 이렇게 행복하다는 것을 깨닫는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