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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빵의 맛

feat. 장모님 집에 있던 카스테라


인간의 삶에 밀가루가 없었다면 얼마나 무미건조 했을까. 

아무래도 인생은 밀가루의 맛, 그 중에서 제일은 빵의 맛이라고 봉구는 생각하고 있다. 지금 봉구는 구수한 원두커피에 카스테라를 먹고 있다.      



지난 번 현경과 학규와 함께 미치도록 맛이 있는 라면을 먹은 후부터, 봉구네 가족은 결계가 풀려 버렸다. 하긴, 한 달이 넘도록 볶음밥에 된장국만 먹어 왔으니 그럴 만도 하다. 게다가 이제는 봉구가 밥을 도맡아 하고 있어서 원할 때면 언제든지 밥을 먹을 수 있으므로 식단의 ‘마지노선’이 무너질 일은 없다.      


그날 라면을 먹고 오전 내내 늘어져 있던 지연은 이런 생각 끝에 봉구와 서린이를 이끌고 근처 마트로 갔다. 그리고는 그간 먹고 싶었던 것들을 마음껏 골라 담았다. 라면(매콤한 신라면과 구수한 안성탕면, 그리고 서린이를 위한 진라면 순한 맛까지)과 레토르트 국물 떡볶이, 그리고 갈치 한 팩.      


“봉구 씨. 내일 아침은 토스트 어때?”      


이 말과 함께 지연은 식빵도 한 봉지 담았다. 그러자 봉구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고민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잠시 후 봉구는 카트를 끌고서 지연을 앞질러 갔다. 이제 마트는 지연이 아닌, 봉구의 앞마당이다. 봉구가 도착한 곳은 과일 코너. 그곳에서 봉구는 사과와 바나나를 담았고, 다시 유제품 코너로 가서 요거트도 하나 담았다.      


한 달 내내 볶음밥만 하던 남자가 어디서 이런 브런치 메뉴를 봤을까? 그건 바로 마트 안에 있는 카페 메뉴판이었다. 지나갈 때마다 눈길을 사로잡았던 그 사진 속에는 노릇하게 구워진 식빵 두 조각에 가지런히 썰어 놓은 바나나와 소시지, 포슬한 에그 스크램블 그리고 작은 그릇에 담긴 요거트가 있었다.      

집에 돌아온 지연은 창고 어디선가 토스터기를 꺼냈고 그날 오후 봉구는 토스터기를 꼼꼼히 닦은 뒤, 설레는 마음으로 잠에 들었다. (저녁은 당연히 볶음밥이었다. 아직 갈치를 구울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사진: Unsplash의Carissa Gan


다음 날 아침 봉구는 토스터기에 식빵을 굽고 그 사이 후라이팬에 소시지와 에그 스크램블을 익혔다. 바나나도 자르고 요거트도 담았다. 완벽한 한 접시가 완성되었다.      


“우와! 아빠, 우리 카페에 온 것 같아!!”      


졸린 눈을 비비며 나오던 서린이가 눈을 크게 뜨며 외쳤다. 봉구가 입을 활짝 벌리며 웃었다. 이제 간지러운 마음을 참지 않는다. 아무래도 서린이는 참을 수 없을 만큼 예쁘고 사랑스럽다.      


“봉구 씨 센스가 장난이 아니네! 정말 브런치 그 자첸데?”      


지연도 식탁에 앉으며 감탄의 말을 건넸다. 그날 아침식사는 말 그대로 대성공이었다.      




기분 좋게 서린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봉구는 늘 해왔듯이 청소기를 돌리고 빨래를 했다. 쨍한 가을 햇살 아래 탁탁 털어 빨래를 널고는 믹스커피를 타 한 모금 마시려는 그 순간,      


띠띠띠띠-      


갑자기 현관 도어락 소리가 들렸다. 혹시 지연이 조퇴를 했나? 싶어 얼른 나가본 봉구는 장모님과 눈이 딱 마주쳤다.      


“박 서방 집에 있었나?”     


꾸벅. 봉구는 조용히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연차 낸 거야? 자네 어디 아픈가?”

“아닙니다.”     


연차를 낸 것도, 어디가 아픈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아닙니다.’라고 답을 하긴 했지만 여러모로 이 대답은 봉구의 현 상황을 설명하기에 부족했다.      


“지난번에 프랑스 여행 가서 사온 향수. 근처 볼 일 있어서 온 김에 놓고 가려고.”    

 

장모님은 작은 상자를 꺼내어 식탁 위에 올려 두었다. 그리고는 머리카락 하나 없이 깨끗한 바닥과 물기 한 방울 없는 주방을 돌아보았다.      


“쯧쯧쯧. 내 이럴 줄 알았어. 지연이 그 계집애, 바쁘다는 핑계로 밥 한 톨 안 해 먹고 살지? 그래도 깨끗한 거 보니 도우미 아줌마 부르는 모양이구만. 돈을 그렇게 써서야 어디 서린이를 제대로 키우겠어? 자네, 아직도 대리지? 대체 승진은 언제 하나?”     


그 말 중에 맞는 말은 단 하나도 없었지만 봉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찬장에서 가장 예쁜 컵(평소에는 지연이 쓰는 컵)을 꺼내 믹스 커피를 한 잔 더 탈 뿐이었다.       

 

띠링      


그때 봉구의 휴대폰에 메시지가 왔다. 그리고 학규의 그 메시지를 장모가 먼저 봐 버렸다.    

  

[야, 구 백수, 뭐하냐? 너 심심하면 여기 와서 알바나 해라.]      


“이 구백수가 설마... 자네를 말하는 건가?”     


봉구는 오른손에는 커피 잔을, 왼손에는 잔 받침을 든 채 가만히 서 있었다. 회사에서 짤렸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다기보다는 이 말을 지연이 아닌 자신이 해도 되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침묵은 분명 말보다 훨씬 정확한 긍정의 표현이었다.      


“자네, 지금 제정신인가!!!!!!!”     


하여 그날 저녁 이 집에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함께 방문을 하게 된 것이다.      


“할아버지! 할머니!!!!”     


반가움에 달려가는 서린이를 건성으로 안아주고는 장인어른과 장모님 소파에 앉아 팔짱을 끼었다.      


“두 분이 거기 그렇게 앉으면 우리는 뭐 바닥에 무릎 꿇고 앉으라는 거예요? 얼른 이리 오세요.”      


그 말에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흐음, 한 번 헛기침을 하더니 식탁으로 와 앉으셨다. 아까 장모님이 다시 오겠노라며 나가셨을 때부터 다시 오신 지금까지, 봉구는 오늘 저녁 역시 볶음밥을 해도 괜찮을까 내내 고민을 했었다. 고민 끝에 지연에게 문자를 보냈더니 지연은 오늘 저녁은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고, 대신 봉구는 얼른 마트에 가 사과를 사서 예쁘게 깎아 놓았다.       


“자네가 회사를 관뒀다던데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장인어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빠, 말 그대로 봉구 씨가 회사를 관뒀다는 얘기죠. 어떻게 더 쉽게 얘기해요?”     


아삭아삭. 회사 관둔 게 뭐 대수냐는 듯, 지연이 사과를 먹으며 대답을 했다. 아삭아삭. 봉구는 지연이 뭔가 먹는 소리가 좋았다. 언제나, 늘.        


“그래서, 앞으로 대책은 뭔가? 어디 갈 데는 있는 거야?”

“봉구 씨가 무슨 길냥이에요? 갈 곳이 없게? 여기 집 있잖아요.”

“그 말이 아니잖아!!”     


장인어른이 버럭 소리를 높였다. 거실에서 인형 놀이를 하던 서린이는 깜짝 놀라 어깨를 움츠렀지만, 지연은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았다.      


“봉구 씨 살림하고 있어요. 제가 특별히 부탁했어요.”

“뭐? 구 서방이 살림을 한다고?”     


장모님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더니 한 번 집안을 돌아보았다. 이게 정녕 구 서방 솜씨란 말인가?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둘이 벌어도 될까 말까한 고물가 시대에, 여자도 아니고 남자가 집에 들어앉아서 살림이나 하는 게 가당키나 해?”

“두 분은 신경 끄세요. 손 벌리는 일 없을 테니까. 직장 관둔 게 뭐 대수라고 두 분이 손을 잡고 달려 와요? 나 어릴 땐 비가 억수 같이 쏟아져도 한 번을 데리러 안 오시더니.”

“그때는 엄마 아빠가 바빴잖아.”

“그래서 난 우리 서린이 그렇게 안 키우고 싶다고요. 집에 오면 아빠가 있고, 아빠가 해주는 따뜻한 밥 먹으면서 외롭지 않게 키우고 싶어요. 우리 둘이 알아서 해요. 그만 가세요.”     


지연의 기세에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일단 물러났다. 하지만 그냥 넘어갈 장모님이 아니었다. 다음 날, 역시나 믹스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있을 때 봉구는 장모님의 전화를 받았다.      


“구 서방, 이따 오후에 여기 좀 들르게.”     


봉구는 대강 점심을 챙겨 먹고 장모님 댁으로 향했다. 결혼하고 처음으로 찾아가는 거라 적잖이 긴장이 됐다. 아무래도 빈 손으로 가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서 편의점에 들러 주스도 한 박스 샀다.      


“구 서방, 우리 집에서 일하던 아주머니가 갑자기 급한 일이 있다고 해서 못 온다더라고. 그런데 이따 저녁에 동네 친구들이 오기로 했거든? 그래서 말인데 청소 좀 해 줘. 지연이한테는 말하지 말구.

“네.”     


봉구가 대답을 하자마자 장모님은 가방을 들고 휑하니 나가버렸다. 그제야 집 안을 둘러본 봉구는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왜 그 동안 장모님, 장인어른과는 식당에서만 만났는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집은... 물건이 너무 많다. 발 디딜 틈이 없이 많다.      

사진: Unsplash의Dina Badamshina

주방에는 착즙기, 식품건조기, 에어프라이, 오븐, 전자레인지, 무쇠솥, 압력솥, 전기밥솥, 정수기, 생수통, 커피머신.  

거실에는 안마의자, 종아리마사지기, 러닝머신(이라고 쓰지만 빨래 건조대), 몇 개의 화분(이지만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는), TV와 오디오, 턴테이블, LP 수납장. 


안방과 작은 방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봉구는 일단 자질구레한 쓰레기부터 치웠다. 그리고 자주 쓰지 않는 것 같은 가전제품들은 팬트리와 세탁실에 넣었다. 그제야 주방도, 거실도 바닥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가전제품들에 가려져있던 물건들이 드러났다. 먹다 만 빵과 과자들, 보다만 책들, 찻잎이 말라 버린 컵, 벗어 놓은 양말과 던져 놓은 수건들. 버릴 건 버리고 넣을 건 넣다 보니 어느 새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그때 장모님이 집으로 돌아왔다.    

  

“구 서방, 가는 길에 분리수거도 잊지 말고!”     


그 말에 봉구는 커다란 비닐봉지에 플라스틱과 캔, 병을 담았다. 신발을 신고 장모님께 꾸벅 인사를 하려는 그 순간, 도어락 소리가 들렸다.      


띠띠띠띠-      


“이 양반이 벌써 들어오나?”     


현관으로 다가오던 장모님의 눈이 당황스러움과 놀라움으로 커졌다. 봉구가 돌아보니 그곳에는 지연이 서 있었다.      


“... 구, 구 서방, 자네 결국 지연이한테 일렀나? 치사하게?”


“엄마!!!!!!!!!!!!!!!!!!!”     

지연의 포효. 난생 처음 그것을 들은 봉구는, 평생 그것을 가장 두려워하며 살게 되리라는 걸 예감했다. 저 목소리로 ‘봉구 씨!!!!!!!!!!!!!’를 부르는 순간, 봉구는 무(無)로 돌아갈 것이다.      


“엄마! 봉구 씨는 내 거야! 엄마가 오라 가라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아니 내가 기운이 너무 없어서 부탁 좀 한 거 가지고 왜 그렇게 화를 내? 장모가 사위한테 이 정도 부탁도 못해?”

“어 못해. 봉구 씨한테 그런 부탁은 나만 할 수 있어. 봉구 씨를 진짜로 사랑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다고!!!!!”      

지연은 신발을 벗고 성큼성큼 집 안으로 들어가더니 매서운 눈으로 두리번거렸다.      


“사람을 얼마나 부려먹었으면 이 집이 이렇게 깨끗해? 나 억울해서 그냥 못 가. 봉구 씨, 봉구 씨 일당 챙겨 가자!”     


거실과 주방을 부지런히 뒤지던 지연은 고급스러워보이는 빵 상자 두 개와 원두커피 상자 하나를 들고 나왔다.      


“야, 그거 비싼 거야! 백화점에서 줄 서서 사온 건데!”

“봉구 씨 일당 보다는 안 비싸! 엄마, 다시 한 번 우리 봉구 씨 부르기만 해. 그 땐 나, 이민 갈 거야. 나 괜한 말 안 하는 거 알지?”     


봉구는 얼른 빵과 커피 상자를 받아들었다. 구두를 신은 지연은 봉구의 팔을 잡고 밖으로 나왔다. 장모님은 얼이 빠진 듯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왜 말도 안 하고 여길 와? 우리 엄마 어떤 사람인지 아직도 몰라?”     


한참을 씩씩 거리던 지연은 차에 타고서야 입을 열었다.      


“부르시면 와야지...”

“오지 마. 이제부터 엄마 아빠한테 전화 오면 나한테 다 말해. 알았지? 안 그러면 나 울어 버릴거야.”     


끼익-      


놀란 봉구가 브레이크를 밟았다. 지연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시간 전, 지연은 아빠의 전화를 받았다.      


“우리 집 살림해주던 아주머니, 그만 오시라고 했다. 집에 노는 사람 있는데 뭐하러 돈 줘가며 사람 써? 오늘부터 늬 서방, 와서 일 좀 하라고 해!”     


엄마는 지연에게 비밀로 해야 한다고 신신당부 했지만, 봉구를 괘씸하게 여긴 아빠가 결국 한 소리 하고 만 것이다. 얘기를 들은 지연은 그대로 박차고 나와 봉구를 데리러 왔다.      


“어느 누구도 봉구 씨를 함부로 대하지 않게 할 거야. 봉구 씨는 소중하니까. 너무 소중하고 소중하니까.”     

 



그날 저녁 봉구는 지연을 위해 갈치를 구웠다. 그리고 그 언젠가처럼 숟가락과 젓가락을 들고서 갈치살을 발라주었다. 그리고 같은 일을 한 번 더 했다. 이번에는 서린이를 위해.      


“아빠, 갈치 진~짜 맛있어. 세상에서 제일 맛있어. 나 이제 갈치가 제일 좋아.”     


하얀 밥 위에 갈치를 얹어 먹으며 서린이가 엄지를 치켜 세웠다. 하지만 봉구는 말이 없는 지연이 더 신경 쓰였다. 지연은 그저 묵묵히 밥을 먹고 있었다. 그러더니 설거지를 하던 봉구를 뒤에서 안아 주었다.      


“아까 엄마 집에서 가져 온 거, 그거 좋은 거래. 그거 봉구 씨 다 먹어.”

“지연 씨랑 서린이도 먹어야지.”

“아냐. 봉구 씨 다 먹어. 봉구 씨가 일해서 번 돈이야.”     


그리하여 봉구는 다음 날, 말끔해진 집 식탁에 앉아 팔자에 없을 뻔 했던 원두커피와 백화점 카스테라를 먹고 있는 것이다. 

예쁜 카스테라 사진을 찾다보니 서-울 카스테라 


사실 봉구는 어제 장모님 집에 간 것이 그리 속상하지 않았다. 자존심이 상하지도 않았다. 할 수 있는 일이고 부탁을 받았으니 하면 그만이었다. 게다가 이런 원두커피와 카스테라라는, 작고 소중한 맛을 알게 되었으니 결과적으로도 나쁠 게 전혀 없었다. 하지만 지연이 너무 싫어하니까, 속상해 하니까 이제는 가지 말아야지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다, 그래도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집안 정리를 해드리고 싶다고, 지연의 마음이 좀 가라앉으면 얘기를 해봐야겠다. 사실, 그 집에는....     


봉구는 자신의 세계가 조금씩 넓어지고 있는 걸 깨닫는다. 스쳐지나가던 카페의 메뉴에서, 갑작스레 불려간 장모님의 집에서, 봉구는 낯설고 흥미로운 세계를 만났다. 그 중에서도 쇼핑을 좋아하고 ‘좋은 걸’ 좋아하는 장모님의 집은 아무래도 구미가 당기는 세계라는 걸 딱히 부인할 마음은 없었다. 때로 인생은 갑작스레 우리 손을 잡아 이끌어 백화점 카스테라의 맛을 보여주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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