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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김밥의 맛


인생은 정말이지 김밥의 맛이라고 지금 봉구는 생각하고 있다. 색색의 재료가 섞여 있으면서도 한 가지 맛을 내는 김밥. 김밥은 햄과 맛살과 계란과 밥과 단무지와 시금치의 맛이 아니다. 김밥은, 김밥 맛이다.    

  

“아빠! 우리 소풍 간대!! 나 김밥 싸 줘!!”      


며칠 전 서린이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서린이 아버님, 이왕 싸는 김밥, 제 것까지 부탁 드려요!”      


조막만한 서린이 얼굴 뒤로 짓궂게 웃고 있는 현경이 보였다. 그래도 이제는 오빠라고 부르진 않는...     


“오빠, 오이 말고 시금치로 부탁해!”     

 

방심한 틈에 현경이 다가와 속삭인다. 봉구가 보란 듯이 입모양으로 험한 말을 내뱉었지만  현경이는 어느 새 서린이의 신발을 신겨주고 있다.      


“아빠, 나도 오이 보다 시금치가 좋아.”   

   

혹시 현경이가 세뇌시킨 건 아닐까. 매일 아침 교실에서 “나는 오이가 싫어요!”를 열 번 씩 외치게 한다거나 오이가 멍청한 악당으로 나오는 책을 반복해서 읽어준다거나. 하지만 오이가 싫다는 그 말에 딱히 불만은 없다. 봉구도 김밥에는 오이가 아닌 시금치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햇님 보육원 급식 실장님은 다른 음식은 참 맛없게 만들었지만, 이상하게도 김밥만큼은 정말 맛있게 만들어주셨다. 참기름을 반지르르하게 바른 오동통한 김밥이 잔뜩 쌓여 있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침이 고였다. 보육원 아이들은 자신과 누나 오빠 동생들의 소풍을, 운동회를 손꼽아 기다렸다. 

사진: Unsplash의chiara conti

그 김밥에는 늘 시금치가 들어 있었다. 그때는 집 김밥에도, 분식집 김밥에도 시금치가 당연했다. 하지만 어느 날부턴가 오이가 그 자리를 대신하기 시작했다. 대학에 들어온 후 봉구는 김밥을 꽤 자주 사먹었는데, 그 때마다 이 오이가 거슬렸다. 그 식감이란. 그 맛이란. 아무래도 김밥의 멤버가 되기에는 자꾸 겉돌았다. 비슷한 식감을 가진 단무지는 이렇게 김밥의 맛을 든든하게 받쳐주는데, 오이는 따로 놀았다. 그래서 몇 번인가 오이는 빼 놓고 먹기도 했다.      


그렇다. 평소 봉구의 입맛은 무난을 넘어 무감에 가까웠지만 김밥만큼은 깐깐했던 것이다. 따라서 봉구의 김밥에 오이가 들어갈 일은 절대로 없었다.      




다음 날 서린이를 유치원에 데려다 준 봉구는 곧바로 시금치와 햄, 맛살과 김, 그리고 단무지를 사왔다. 완벽한 김밥을 위해서는 지금부터 연습해야 한다. 봉구는 먼저 시금치를 꺼냈다. 그런데 거기에는 웬 뿌리가 달려 있었다.      


시금치가 뿌리가 있었나? 혼란스러웠다. 마트에서는 ‘시금치’라는 글자만 보고 샀기 때문에 (참나물이나 바질이랑 헷갈리면 큰일 난다.) 그 모양새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자신이 평생 먹어온 시금치와는 사뭇 달랐던 것이다. 고민을 하던 봉구는 이파리를 하나 하나 뜯기로 했다. 뿌리를 먹은 기억이 없으니 이파리만 있으면 된다. 봉구는 시금치 이파리를 하나씩 떼어서 깨끗이 씻었다.    

  

그리고 물을 끓인 후 시금치를 넣었다. 그리고 한참을 지켜보았다. 서린이가 먹을 거니까 푹 익히는 게 좋을 것 같다. 이만하면 됐겠지 싶어 시금치를 건져 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시금치에 소금과 참기름을 넣고 젓가락으로 살살 버무렸다. 금세 초록색 물이 흥건해졌다. 그런 물기는 본적 없는 것 같아서 그릇을 기울여 따라 버렸다. 아직 김이 하얗게 나고 있는 시금치를 한 젓가락 들어서 호호 불어 먹어 보았다.      


사진: Unsplash의Hasan Almasi


미국 교도소에 가면 이런 걸 준다고 했던 것 같다. 도저히 먹을 수 없는, 먹어도 되지만 먹을 수 없는 것들. 봉구는 난생 처음으로 음식을 뱉어냈다. 그리고 마트 영수증을 꺼내봤다. 시금치 한 단 5800원. 세상에. 김밥천국 우동 한 그릇 가격이다. 봉구는 마음을 다잡았다. 맨 처음 볶음밥을 만들었을 때 아작거리던 당근과 매큰하던 양파도 문제 없이 먹었던 봉구였다. 그러니까 이 시금치도 먹을 수 있다...고 생각은 했지만 도무지 자신이 없었다. 난 미국 교도소에 갈 만큼 나쁜 짓을 한 건 아닌 것 같다고, 다른 데서 아껴서 5800원을 만회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직 미지근한 시금치를 싱크대에 버리려던 봉구는 잠시 멈췄다. 그래도 5800원인데. 지연에게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 지연이 일을 할 때는 거의 방해를 하지 않는 봉구였지만 지금은 사안이 민감했으므로 봉구는 문자를 보냈다.      


[지연 씨. 정말 미안한데. 내가 시금치(5800원)를 샀거든. 서린이 김밥 도시락 연습을 하려고. 그런데 망친 것 같아.]     


한 차례 문자를 보내고 봉구는 축축해진 손을 바지에 닦았다.      


[어떻게든 먹어보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심각해서 말야. 정말 미안해. 내가 이 5800원은 어떻게 해서든....]    

 

- 띠리리리리리리      


두 번째 문자를 채 보내기도 전에 지연에게 전화가 왔다.  

     

“지연씨...!”

“버려. 봉구 씨 그거 버려. 알았지? 먹지 마!! 나 바빠서 더는 문자 못 볼 것 같아. 미안해. 나 돈 잘 버니까 그거 꼭 버려!!!! 끊을게!”     


봉구의 가슴께가 간질거린다. 자꾸 입꼬리가 올라간다. 지연은 정말 멋있는 사람이다. 박력 있고 씩씩하고 내 마음도 잘 알아주고. 봉구는 실실 웃으면서, 여전히 흐물거리고 있는 시금치를 싱크대 하수구에 버렸다. 그때 지연에게 다시 문자가 하나 왔다.      


[봉구 씨 이거 봐봐. 나 이제 진짜 바빠서 답 못 해. 미안해! 이따 저녁에 만나자! 사랑해!]     


훗! 봉구의 입에서 봄바람 같은 탄성이 나온다. 지금 봉구의 심장은 막 잡아 올린 광어처럼 팔딱인다. 몸을 비비 꼬면서 봉구는 지연이 보내준 링크를 클릭했다.      


사진: Unsplash의Christian Wiediger


[시금치 삶는 법 - 이 영상 하나면 됩니다!]      


유튜브 영상이었다. 그걸 보자마자 봉구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나는 바보였나. 나는 바보다. 내 바보는 현재 진행형이다. 나는 바보 멍청이 똥쟁이다. 왜 유튜브 생각을 못했지? 그간 망쳐왔던 볶음밥과 된장찌개에게 미안했다. 빈 그릇 놓고 제사라도 지내주고 싶은 심정이다. 서린이와 지연에게도 미안했다. 학규 말대로 나는 하나를 가르쳐주면 하나만 아는 인간이었다. 학습 불가능자. 우물 안의 개구리. 바보 멍청이.      


띠링. 지연에게 문자가 왔다.      


[봉구 씨. 나는 봉구 씨 음식이 제일 좋아. 사실 봉구 씨가 망텼다는 그 시금치도 먹거 보고 싶은데 봉구 씨가 너무 속상햐 하는 것 같아서 영상 보낸 거야. 자책하지 말고 얼른 가서 기슴치 사 와!]      


봉구는 벌떡 일어났다. 그렇다. 이렇게 앉아서 자책하는 건 바보짓에 바보짓을 더하는 일이다. 봉구는 장바구니를 챙겨 들고 곧바로 마트로 갔다. 앞치마를 한 상태라는 건 혼자만 몰랐다.      




다시 시금치를 사온 봉구는 영상을 3번 쯤 돌려보았다. 그 후 먼저 물을 올리고 끓기를 기다리는 사이, 시금치 뿌리를 잘라 내고 깨끗이 씻었다. 물이 끓자 굵은 소금을 넣고 시금치를 줄기 쪽부터 천천히 넣었다. 손을 떼자마자 휴대폰으로 27초 타이머를 맞췄다. (시금치에서 휴대폰 조작까지 3초 쯤 걸린 것 같았다.) 체를 준비해 두었다가 타이머가 울리자 바로 체에 시금치를 부었다. 찬 물에 열기를 완전히 식힌 후 물을 꼭(꾹 말고 꼭!) 짜 볼에 담았다. 거기에 다진 마늘, 국간장, 참기름을 넣고 봉구는 다시 한 번 손을 깨끗이 씻었다. 그리고 손으로 조물, 조물, 시금치를 버무렸다. 손끝에 닿는 익힌 시금치의 촉감은 남달랐다. 단단하면서도 촉촉한 이파리. 이렇게 짙은 초록의 것은, 곧 서린이의 입 안으로 들어가 뼈와 살이 될 것이다. 지연의 예쁜 손톱과 부드러운 머리칼이 되어줄 것이다.      


깨를 뿌린 후 봉구는 시금치 이파리 하나를 먹어보았다.      


- 오호...!!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이런 시금치는 난생 처음이다. 그간 수많은 급식에서 먹어보았던 그 시금치는 다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왜 그렇게 뻣뻣했던 걸까. 게다가 고소하기보다는 매웠던 것 같은데. 그나저나 이 시금치는 대체 무슨 일인가. 어쩌다가 이렇게 맛있어진 건가...! 혹시 나 요리 천잰가? 아니다. 천재는 내가 아니라... 저 유튜브 녀석이다.      


봉구는 한참동안 휴대폰을 째려보았다. 마치 시험 날 아침 나 공부 안하고 자버렸어, 라고 말해 놓고는 1등을 한 친구를 째려보듯이. 진작 좀 말해주지. 진작 좀 알려주지!! 뭔가 굽신거리는 것 같아 살짝 자존심이 상했지만 봉구는 다시 유튜브를 열어 검색했다.   

   

[김밥 만드는 법]


영상에 나온 대로 햄과 맛살은 적당히 잘라 익히고 밥은 찬밥을 데워 소금과 참기름을 살짝 섞었다. 시금치는 완벽하니까 이제 계란만 부치면 된다. 그런데 이 놈의 계란이 의외의 복병이었다. 후라이팬에 넓게 펴진 계란 지단을 뒤집으려는 순간, 찢어졌다. 봉구는 휴대폰을 째려봤다. 이런 얘기는 없었잖아. 오늘은 일단 찢어진 계란으로 김밥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영상에서 본 대로 김에 밥을 넓게 펼치고 재료를 하나씩 올리고 돌돌 말았다. 김 가장자리에는 밥풀도 몇 개 붙였다.      


그리고 칼로 조심스레 잘라 그 단면을 보는 순간....!      

사진: Unsplash의Devi Puspita Amartha Yahya

아무래도 나는 요리 천재라고 봉구는 생각했다. 영상으로 보는 김밥과 눈앞에 있는 김밥은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사 먹는 김밥과 직접 만든 김밥 역시 전혀 다른 세상의 것이었다. 이 고소한 냄새, 그 속을 헤엄쳐 다가오는 단무지의 시큼 달달한 향과 비릿한 맛살의 향. 의식의 흐름대로 김밥을 하나 입에 넣은 봉구는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신이시어, 정녕 이 김밥을 제가 만들었단 말입니끄아....!      




완벽한 김밥을 만들었건만, 그날 저녁은 김밥도, 볶음밥도 아니었다. 김밥은 서린이의 소풍날, 짠! 하고 보여줄 계획이었다. 대신 봉구는 유튜브라는 학교에서 요리라는 수업을 충실히 들은 후 돼지갈비 구이를 해주었다. 비싼 돈 주고 사서 망치면 어쩌나 싶어 엄두도 못 냈던 고기 요리였지만 유튜브가 있으니 든든했다. 열 번쯤 돌려보고 머리로 상상을 하며 마트에 다녀왔다. (집에 와서야 깨달았다. 오는 길에 서린이를 데리러 가는 걸 깜박했다는 걸. 장바구니를 그대로 들고서 서린이를 데리러 다녀왔다.) 설레는 마음을 억누르고 갈비 양념을 해서 고기를 재웠고 (zzz) 지연이 올 시간에 맞춰 고기를 구웠다.      


“어머!”     


지연이 집에 들어와서 한 말은 이게 전부였다. 가방을 소파에 던져 놓은 채 곧바로 식탁에 앉아 얼른 고기 한 점을 입에 넣고는 밥을 크게 한 술 떠 넣었다. 그 후 말이 없었다. 그건 서린이도 마찬가지였다. 봉구는 침묵 속에서 비어가는 접시와 볼록 부푼 두 사람의 볼을 바라보았다. 행복했다.      




그 날은 봉구 요리의 분수령이었다. 막힌 물길이 뚫린 듯, 오랫동안 공사 해 오던 음악 분수가 시운전을 끝내고 본격적으로 공연을 시작 하듯 봉구의 요리는 터져 나왔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서린이의 소풍날이 다가왔다.      


봉구는 새벽 4시에 일어나 쌀을 씻어 밥을 했다. 시금치를 데치고 무쳤다. 햄과 맛살을 굽고 계란 지단을 비단처럼 부쳤다. 그리고 김밥을 말았다. 한 줄, 두 줄, 세 줄.... 스무 줄이었다.      


“이거 너무 맛있다. 봉구 씨, 오늘 나 김밥 좀 싸가도 돼? 한 다섯 줄..만?”     


어느 새 일어나 꽁다리를 주워 먹던 지연이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싸주고 싶던 차였다. 봉구는 세 개의 통을 꺼냈다. 서린이는 키티 모양 도시락 통, 지연은 3단 찬합, 현경이는 은박지....에 말아주고 싶었지만 꾹 참고 단정한 도시락 통에 각각 김밥을 담았다. 한 쪽에는 오렌지와 포도도 예쁘게 담았다.   

   

상기된 얼굴로 버스에 탄 서린이에게 한참을 손을 들어 인사를 하고 봉구는 돌아섰다. 남은 김밥을 학규에게 가져다 줄 것이다. 그리고....      


점심 때 쯤, 봉구는 장모님 댁으로 향했다.    

  

“이게 뭔가? 김밥? 요새 누가 김밥을 집에서 해 먹나? 밖에 나가면 2 천원이면 먹는 걸. 뭐 들어간 것도 별로 없네. 요즘은 치즈다, 참치다, 어디는 돈가스도 넣어 말던데?”   

  

장모님의 그 많던 잔소리는 김밥 한 알을 입에 넣은 순간 사라졌다. 봉구는 생각했다. 내 요리를 먹은 사람들은 말이 없어진다고. 혹시 나도 모르게 뭔가 들어간 건 아니겠지? 말을 못하게 되는 어떤 약이라거나?  

    

그런 생각을 하며 봉구는 묵묵히 소파 아래 떨어진 담요를 주워 반듯하게 접었다. 장모님이 김밥 속 단무지를 씹을 때나는 아작, 아작 소리가 적막을 간질였다. 봉구는 그 소리가 싫지 않았다. 사실 봉구는 장모님의 잔소리도 싫지 않았다. 가끔은 자꾸 자꾸 말을 하는 장모님이 서린이랑 닮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고보니 서린이는 김밥을 맛있게 먹고 있을까.     

 

[대박. 이거 뭐야. 미쳤어. 이 오빠 미쳤나봐. 김밥 왤케 맛있어?]     


현경이 단톡방(지연과 학규, 봉구와 현경이 있다.)에 사진을 올렸다. 현경이 옆에서 서린이도 함께 활짝 웃고 있었다.      


[집김밥 진짜 오랜만이다. 보육원 실장님 것 보다 맛있는 듯!]     


학규도 빈 그릇 사진을 보내줬다.      


[우리 팀원들도 엄지 척!]     


지연은 일곱 명의 팀원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내주었다. 모두가 엄지를 지켜들고 웃고 있었다.     

 

눈을 들어보니 장모님도 마지막 김밥 꽁다리를 먹으며 옆에 놓인 장인어른의 것을 힐끔 거리고 있다. 장모님과 단톡방 사진들을 번갈아보며 봉구는 생각한다. 인생은 아무래도 김밥의 맛이라고. 모두가 다르고 제각각 개성이 있지만, 결국은 함께이다. 따로 보아도 좋지만 함께 보니 더 좋다. 망쳐버린 그 때 그 시금치에게 다시 한 번 애도를 표하며 봉구는 집안 정리를 계속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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