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지는 시간이다
인생은 정말로 묵은지의 맛이라고 봉구는 생각하고 있다. 먹음직스러운 붉은 빛깔로 뭉근하게 끓고 있는 김치찜을 보며 봉구는 두부를 썬다. 3년 묵은 묵은지라니. 언젠가 학규가 자랑하던 트러플이나 샤프란 따위는 부럽지 않았다. 늬 집에는 3년 묵은 묵은지 없지?
지난 번, 직접 만든 김밥을 가지고 장모님 댁에 갔던 날, 봉구는 아무렇지 않게 장모님 집안을 청소했다. 맨 처음 지연의 포효가 있던 그 날 꽤 깨끗이 정리를 했건만 열흘 쯤 지난 장모님의 집은 또 다시 물건에 장악되어 있었다. 두 분이 교장, 교감으로 정년퇴직하시고 적적해서 그러신 거라고, 그래서 자꾸 소소하게 뭘 사시는 것 같다고 지연은 말했었다. 그럼 나도 요새 적적한 걸까. 나도 자꾸 마트에 가고 싶던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봉구는 말없이 청소를 했다.
“자네, 오늘도 일당 받아 갈 건가? 안 그럼 지연이가 또 난리 칠 거 아냐? 저기 저, 초콜렛 가져 가서 서린이 주든지.”
장모님의 말에 봉구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고 봉구는 느꼈다.). 기다렸던 말이다. 사실 그 말을 듣기 위해 봉구는 청소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 의도가 있고 계획이 있었다. 다만 봉구의 계획은 초콜릿이 아니었다. 봉구는 천천히 냉장고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나란히 서 있는 두 개의 냉장고 중에 김치 냉장고를 가리키며 말했다.
“장모님, 저 이거 주십시오!”
“뭐? 김치 냉장고?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한 거 아닌가?”
“아니, 그, 그게 아니라...”
봉구는 얼른 김치 냉장고를 열어 가리켰다. 거기에는 묵은 김치가 가득 담긴 커다란 통이 있었다.
“이거, 이거요.”
지연과 봉구는 김치를 사 먹는다. 김장철마다 장모님이 김장 김치를 가져가라고 닦달을 하지만 지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냉장고에 들어갈 데도 없어. 그렇게 많이 먹지도 않고. 필요할 때마다 사먹으면 돼.”
사먹는 김치도 꽤 괜찮다. 종류도 열무나 무김치, 겉절이에 포기김치까지 아주 다양해서 질릴 틈이 없다. 하지만 봉구는 늘 아쉬웠다. 푹 익은 김치. 왜 가끔 그게 먹고 싶은 걸까. 날이 차가워지니까 더더욱 묵은 지가 생각이 났다. 그러다 지난 번 장모님의 냉장고 정리를 하다가 이 묵은 김치를 발견한 것이다.
“묵은 김치? 가져 가. 얼마 안 있으면 언니네 또 김장할텐데 뭐.”
그리하여 한 통 들고 온 봉구는 곧바로 유튜브에 검색을 했다.
[김치찌개 끓이는 법]
당연히 그날 저녁 식사도 대성공이었다.
“아우~ 너무 맛있다. 난 얼큰해서 좋긴 한데, 서린이 안 매워?”
“안 매워! 이거 아빠가 안 맵게 끓여 준거야.”
봉구는 서린이와 지연을 위해 각각의 김치찌개를 끓였다. 서린이가 먹을 건 김치를 씻어서 충분히 볶은 후에 끓였고, 지연이 먹을 건 김치 국물을 자작하게 넣고 고춧가루도 넣었다. 두 사람은 봉구에게 정수리만을 보이며 쉴 새 없이 국물과 밥과 김치와 두부를 떠먹었다.
“근데 이 묵은지는 어디서 난거야?”
“어?”
봉구의 뇌가 멈췄다. 묵은 지에 취하고, 요리에 취해서 이 질문은 예상하지 못했다. 식은땀이 났다. 우물쭈물하는 봉구를 본 지연이 탁, 하고 숟가락을 내려 놨다.
“엄마네 집 갔다 왔어? 엄마가 또 불렀어?”
크레센도. 점점 크게. 지연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자 서린이의 눈동자가 또르르 굴러간다. 지연과 봉구를 번갈아 본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벌떡 일어난 지연이 휴대폰을 들어 전화를 걸려고 한다.
“지연 씨! 잠깐만!”
숨이 찼다. 심장이 쿵쾅대고 있다. 그래도 말해야 한다. 봉구는 이런 말을 해본 적이 없다. 아니, 말이라는 걸 거의 하지 않고 산다.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보다는 함께 있는 사람의 의견을 따르며 살아왔다. 그런데 지금은 그러면 안 된다.
“내가 가고 싶어서 갔어. 정말이야.”
“엄마 감싸 줄 생각하지 마. 엄마는 봉구 씨한테 상처만 준다니까?”
“아니야, 지연 씨. 그런 거 아니야.”
설명해야 한다. 머리가 복잡했다. 그래도 말해야 한다. 지금의 생각과 마음을.
“지연 씨, 난 장모님 좋아. 장인어른도 좋고. 장모님이 말씀을 조금 얄밉게 할 때도 있지만 그래도 좋아. 내가 워낙 말이 없어서 난 말 많은 사람이 좋은 가봐. 장모님 그냥 보면 미운 말 하는 사람 같지만 한참 듣다보면 또 그렇지가 않다? 오늘도 너랑 서린이 갖다 주라고 초콜릿도 챙겨 주셨어. 내 생각에는....”
내 생각. 그 단어에 지연의 눈이 반짝 빛났다. 봉구가 ‘내 생각’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던가.
“내 생각에는 일부러 사 놓으신 것 같았어. 혹시라도 내가 오면 주려고.”
침묵. 여전히 굴러가고 있는 서린이의 눈동자. 그제야 분위기를 감지한 지연은 다시 식탁으로 와서 앉았다. 그리고 숟가락을 들었다. 그러자 서린이가 다시 밥을 먹는다.
“그리고 지연 씨. 나 사실 일부러 간 거야. 거기.”
봉구가 찌개 속 김치를 지연의 밥에 얹어주며 말했다.
“이거 받아오려고. 이 묵은지. 지난번에 갔을 때 봤었거든.”
봉구가 헤~ 하고 웃는다. 그 표정이 강아지 같다. 작은 강아지 말고 큰 강아지. 그 뭐냐 중국에서 유명한 차우차우였나? 풉, 그 생각에 지연도 웃음이 터졌다.
“진짜 일부러 간 거야? 묵은지 가져오려고?”
“어. 나 잘했지?”
“응. 근데 엄마한테는 타격이 전혀 없을 텐데. 오히려 좋아했을 걸? 앓던 이 뺀 것처럼.”
“그럼 더 좋지. 김밥도 맛있게 드셨어.”
“김밥도 가져갔어?”
“응.”
그건 너무 좋은 사이가 아닌가, 지연은 생각했다. 같은 서울 땅에 살면서도 일 년에 두어 번 보던 사이였는데.
“지연 씨, 그 집에는... 좋은 게 많아.”
서린이의 밥 위에 두부를 작게 잘라 올려주면서 봉구가 말했다.
“그래. 그 때보니까 TV 또 바꾸셨더라.”
지연이 서린이의 두부 위에 김치를 작게 잘라 올려주며 말했다.
“보니까 장아찌도 있던데.. 매실이랑 고추랑 무장아찌가 있더라고.”
어? 장아찌? TV, 냉장고, 세탁기 말고 장아찌? 그게 방금 말한 ‘좋은 거’야? 지연은 봉구의 사고를 따라가기 어렵다는 생각을 했다. 늘 말이 없어서 속을 알 수 없던 남자였다. 그래도 별 난데 없고 지연을 무한히 신뢰하고 사랑해주는 것이 느껴져서 관계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이 남자를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엔 그걸 받아 올게.”
비장했다. 봉구는 정말로 비장했다. 이 식탁에 엄마 집 장아찌를 올려놓고야 말겠다는 의지와 각오가 보였다.
“어... 그래... 이모 장아찌가 맛있긴 하지.”
사실 지연의 친정에 있는 대부분의 음식은 전주 이모네에서 올라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지연은 거기에 대해서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하루가 다르게 화려해지는 식탁에 정신이 팔려 그 동안은 몰랐는데, 요즘 봉구는 달라져 있었다. 눈이 반짝였고 말이 많아졌다. 자꾸 웃었고 가끔은 콧노래도 불렀다. 할 줄 아는 음식의 가짓수와 비례해서 밝아지는 건가?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고생했던 서린이의 변비는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간 봉구가 썰고 다듬어 온 당근과 양파와 양배추 덕분이다. 오늘의 김밥은 지연의 팀 안에서도 오래 회자될 예정이고 지금 눈앞에 있는 김치찌개도 흡입을 멈출 수 없다. 그리고 봉구 씨는 달라지고 있다.
문득 지연은 두려워졌다. 내가 이 남자를 감당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웅크리고 있던 봉구가 깨어나 기지개를 켜면, 그리고 반듯하게 서서 걷기 시작하면 나는 이 남자를 감당할 수 있을까?
“봉구 씨, 나 사랑해?”
갑작스러운 질문에 봉구가 놀란다. 지연과 서린이를 번갈아 보던 봉구가 말한다.
“응. 사랑해.”
봉구의 얼굴이 조금 붉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진짜 사랑해. 많이 사랑해. 매일매일 생각하는데, 나는 정말로 지연 씨를 많이 사랑하는 것 같아. 마트에서 좋은 재료를 보면 지연 씨 생각이 제일 먼저 나.”
“아빠, 나는? 나도 사랑하지?”
서린이의 명랑한 목소리가 울린다.
“그럼. 서린이도 많이 사랑하지. 아빠는 하루 종일 서린이 생각을 하고 있어.”
지연이 킁, 하고 콧물을 들이킨다. 고여있던 눈물이 쏙 들어간다. 사랑한다는 말을 이렇게 할 줄 아는 남자였다니. 멋있잖아. 더 멋있어지면 위험할테니까... 나도 멋있어져야지. 대박 멋있어 질 거야. 아주 그냥. 다 죽었어!
다음 날 봉구가 단톡방에 묵은지 사진을 올렸다. 커다란 통에 가득 담긴 묵은지는 아주 맛깔나게 푹 익어 있었다.
[봉구: 늬 집에 이런 거 없지?]
[학규: 야 구봉구. 지금 우리한테 없는 장모님 있다고 유세야?]
[현경: 아싸 오늘 금요일이네! 오늘 저녁 봉구네 오빠 집에서 묵은지 찜에 소주 한 잔 콜?]
[지연: 콜!!!!!!]
그리하여 지금 봉구는 이틀 연속으로 묵은지를 끓이고 있는 것이다. 착착 포개져 있는 묵은지 아래로는 듬직한 돼지고기가 익어가고 있다. 뻣뻣한 배추가 소금에 절여지고 젓갈의 힘으로 풋내가 사라지면서 시원한 맛이 난다. 거기에 삼 년이라는 시간이 더해지면 시큼하면서도 감칠맛이 폭발하는 묵은지가 되는 것이다.
인생이 묵은지 맛이라는 건, 인생은 곧 시간이라는 말일 것이다. 봉구는 휴대폰 타이머를 힐끗 보며 시간에 대해 생각한다. 보육원에서의 시간, 지연과 함께 한 시간, 서린이가 태어난 후의 시간, 학규와 현경과 함께 보낸 시간, 장모님의 수다를 듣는 시간. 봉구는 이런 것들로 채워진 자신의 시간이 좋았다.
인형놀이를 하던 서린이가 봉구를 본다. 봉구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떠 있다. 조금 있으면 엄마와 현경 고모가, 그리고 밤에는 학규 삼촌이 올 것이다. 아빠가 회사를 관두고(짤리고) 나서부터 서린이는 행복하다. 아빠와 마음껏 붙어 있을 수 있어서 좋고 집에서 맛있는 냄새가 나서 좋다. 유치원 선생님을 몰래 몰래 고모라고 부르는 것도 좋았고 학규 삼촌을 자주 보는 것도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빠, 오늘 고모랑 삼촌 오셔?”
“응.”
“그럼 내일 아침에도 라면 먹어?”
라면. 서린이는 라면이 좋다. 어제 김치찌개를 먹으면서도 자꾸 라면 생각이 났다.
“서린이 라면 먹고 싶어?”
“응.”
“그럼 먹어야지. 내일 아침에 라면 먹자.”
봉구의 묵은지 찜과 서린이의 라면은 공존한다. 이 시간은 봉구에게 묵은지 찜으로, 서린이에게는 라면으로 기억되겠지만, 더할 나위 없이 조화롭다.
띠띠띠띠띠-
문이 열리고 지연과 현경이 나란히 들어온다. 곧 있으면 학규도 올 것이다. 세 사람의 시간이 더해진다. 자꾸 더해져서 커다랗고 평화로운 우주를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