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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믹스커피의 맛

일상의 구세주, 믹스커피 

인생은 믹스커피의 맛과 같다고 봉구는 생각하고 있다. 아무도 없는 집을 깔끔하게 치워놓은 뒤 혼자서 마시는 믹스커피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즐거움이다.      




오늘 봉구는 아침 6시에 일어났다. 이제는 알람을 맞추지 않아도 저절로 눈이 떠진다. 오른쪽에는 서린이가 가로로 누워 봉구의 배에 다리를 척, 올리고 자고 있고 왼쪽에서는 지연이 만세 자세로 자고 있다. 서린이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지연의 손을 아래로 내려 준 다음 봉구는 주방으로 나왔다.      


어제 저녁 소분해 놓은 채소들과 찬밥을 꺼낸다. 전자레인지에 찬밥을 살짝 데우는 사이 채소를 버터에 볶는다. 잠시 후 밥이 데워지면 밥도 넣어 함께 볶다가 간장을 한 숟갈 두르고 좀 더 볶는다. 그러는 틈틈이 옆에서 된장국을 데우고 그릇을 꺼내 놓는다. 이번 된장국에는 두부와 함께 표고 버섯을 넣어보았다. 파와 양파는 볶음밥에 넣을 것보다는 좀 더 크게 썰어 넣었더니 보기에도 그럼직해졌다. 마지막으로 노른자가 탱탱하게 살아 있는 계란 프라이까지. 그렇게 아침상을 준비하고 나서 안방에 들어가 두 여자를 깨웠다.     


https://www.sbfoods-worldwide.com/ko/recipes/071.html

 

“오늘도 잘 먹었습니다. 고마워, 봉구 씨.”      


야근을 하느라 어제도 11시에 들어온 지연은 아침만 되면 이상하게 기운이 넘친다. 전쟁터에 나가는 장군처럼 씩씩하게 밥을 먹고는 후다닥 씻고 봉구와 서린에게 진한 뽀뽀를 남기고는 출근을 한다. 그 사이 오늘도 아리따운 바나나 똥을 싼 서린이는 양치를 하고 옷을 고른다. 요새는 하트핑 드레스에 꽂혀서 매일 입기 때문에 봉구가 매일 저녁 손빨래를 해 말려두고 있다. 핑크색 레이스 드레스를 입은 서린이가 성일의 앞에 앉으면 봉구가 머리를 빗어 묶어준다.     

 

오전 8시 30분. 서린이와 봉구와 함께 집을 나선다.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유치원으로 가는 것이다. 그 길에서 두 부녀는 적어도 세 명의 서린이 친구와 엄마들을 만난다.      


“안녕하세요.” 

“서린이는 오늘도 아빠랑 가는구나.”

“서린이는 좋겠네. 아빠랑 같이 유치원 가서.”      


서린이를 유치원에 들여보내고 돌아서는 봉구의 눈에 삼삼오오 모여있는 엄마들이 보인다. 지금, 유치원 마당에서 봉구는 청일점이다. 몇몇 익숙한 얼굴들과 어색하게 눈인사를 주고받은 봉구는 얼른 집으로 돌아온다. 서둘러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돌리고 한바탕 청소기를 돌린다.  그제야 찾아오는 완벽한 고요. 딱 그때, 믹스커피를 두 봉지 타 먹는 것이다. 회사에서 먹던 커피와 분명 같은 브랜드인데, 이상하게도 지금 먹는 이 커피가 훨씬 더 맛있었다. 텅 빈 식탁에 커피를 놓고 앉아 있으면 알 수 없는 마음도 몽글몽글 피어나는 것 같고 괜히 기분이 막 좋아졌다.      

https://www.ssg.com/item/itemView.ssg?itemId=0000006829364


봉구는 서재에서 노트와 볼펜을 하나 꺼내왔다. 사방이 조용하다보니 뭐라도 쓰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막상 손을 움직여 적은 것은      


[양파, 두부, 버섯, 믹스커피, 양배추]      


봉구는 다리를 꼬고 앉아 컵을 들었다. 어느 새 커피가 사라지고 없었다. 내일은 세 봉지를 타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날 오후 봉구는 마트에서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서린이를 데리러 갔다.      


“아빠!”      


달려오는 서린이를 보며 봉구는 간지러움을 느끼면서도 행여 넘어지지는 않을까 싶어 곧장이라도 달려 나갈 듯이 무릎을 굽히고 손을 뻗는다. 그 안으로 서린이가 쏙 들어와 안기면, 입꼬리가 씰룩.      


“저기 혹시... ”     


그때 서린이의 담임 선생님이 조심스레 다가왔다.      


“성함이 구봉구 씨.. 이신가요?” 

“...네.”      


봉구의 대답에 선생님의 표정이 한층 더 복잡해진다.      


“정말 죄송한데... 혹시... 양서에 있는 햇님보육원에 계셨었나요?” 

“네.”     


그 순간, 선생님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거기서 그쳤으면 좋았을텐데. 그녀는 이렇게 외치고야 말았다.   

   

“오빠! 나야 나! 현경이!!!!”      

그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유치원 마당에 있던 다른 엄마들과 교실에 있던 선생님들까지도 내다 본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현경은 덥석 봉구의 손을 잡고 방방 뛰기 시작한다.      


“이게 얼마만이야! 오빠 여기 살아? 서린이가 오빠 딸이야? 언제 결혼한 거야? 너무 잘 됐다. 근데 서린아, 다행이다, 아빠 안 닮아서. 근데 새언니는? 매일 오빠가 데리러 오던데 혹시 이혼했어? 오빠 돌싱이야? 잘 좀 하지 그랬어~”      


주변에서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봉구가 걱정스러운 건 따로 있었다.   

   

‘이 사람에게 서린이를 맡겨도 되는 걸까.’      


물론 봉구 역시 현경을 기억하고 있었다. 햇님보육원 3년 후배인 그녀는 보육원에서도 알아주는 말썽꾸러기였다. 초등학교 때는 내내 남자 여자 가릴 것 없이 싸움을 하고 다녔고 중학교에 올라가서도 툭하면 선생님께 대들어서 혼이 나곤 했다. 그나마 고등학교 때는 조금 정신을 차렸다고 다른 후배에게 소식은 들었지만, 이렇게 유치원 선생님이 되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네가 주현경 이라고?” 

“응! 이거 완전 운명이다, 그렇지?”      


그때 나이 지긋한 할머니가 한 분 나오셨다. 유치원 원장 선생님이었다.      


“주 선생님, 잠시 내 방으로.”     


원장은 봉구에게 눈짓으로 인사를 하더니 다시 원장실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집에 가라는 뜻인 것 같았다.      

“또 한 소리 듣겠네. 오빠, 일단 가. 내가 연락할게! 서린아, 내일 보자!”     


그제야 돌아 나오는 봉구는 어딘가 모르게 따가운 시선들을 느꼈지만 그 역시 봉구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서린아. 선생님 어떤 분이셔?” 

“튤립 반 선생님? 완전 좋아. 동화책도 많이 읽어주고 같이 그림도 그려주고.” 

“혹시.... 혹시 말이야... 소리 지르거나 때리지는 않지?” 

“응. 소리는 민준이가 지르지. 오늘도 민준이가 예진이 때려서 예진이가 울었거든? 그랬더니 민준이가 막 소리를 지르는 거야.” 

“그런 일이 있었어?” 

“응. 그런데 선생님이 민준이랑 예진이 둘 다 안아줬어. 예진이가 울음 그칠 때까지 안아주고 민준이가 소리 그만 지를 때까지 오래오래 안아줬어. 아빠 나도 안아줘.” 

“어 그래.”      


봉구는 얼른 서린이를 품에 들어 안았다. 서린이의 가느다란 팔이 목에 감겨온다. 아무래도 현경은 봉구가 알던 현경이 아닌 것 같았다. 아직까지는 그랬다.      




“오빠! 아니, 서린이 아버님, 안녕하세요.”     


다음 날 아침 현경은 불쑥 튀어나온 오빠라는 말을 얼른 치우고서 튤립 반 선생님으로 빙의해 다소곳하게 인사를 했다.      


“네. 선생님.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봉구는 평소보다 목소리에 힘을 줘 인사를 했다. 내 딸을 비롯한 다른 아이들의 안녕을 바라는 마음에서. 그때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문자할게.”      


서린이의 손을 잡고 교실로 가면서 현경은 작게 속삭였다. 그때 봉구는 옆에 있던 다른 집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그 엄마가 허둥거리기 시작했다.       


“어, 있잖아, 예진아, 어, 얼른 들어가. 엄마 갈게. 이따 데리러 올게~!”      


그녀가 서둘러 나가고 나서 봉구도 밖으로 나왔다. 지금 봉구의 머릿속에는 집 정리를 마치고 마실 믹스커피 생각뿐이었다.      


‘오늘은 세 봉지 타 먹어야지.’      


어제 마트에서 믹스 커피 250봉지가 들어있는 박스를 사온 참이었다. 하루에 세 개씩 타 먹으면 83일을 먹을 수 있다. 83일이면 3달이 조금 안 되니까 올 가을을 누리기에는 충분하다는 생각을 하던 중, 지연에게 문자가 왔다.      


[당신, 바람 피워?]      


붕구의 걸음이 멈춘다.      


[예진이 엄마한테 전화 왔어. 당신 바람 피우는 것 같다고. 유치원 선생님한테 당신 이혼남이니까 오빠라고 부르랬다며?]      


두둥. 믹스커피의 갈색 빛깔이 사라지고 새하얀 백지가 떠오른다. 뭔가 답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이게 아닌데, 정말 그건 아닌데, 아무 말도 떠오르질 않는다. 멈춰있던 걸음이 어느 새 안절부절 못하고 서성이는 걸음으로 바뀌었다. 그때 지연에게 전화가 왔다.      


“지, 지연 씨, 아니야. 아니야. 그,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뭐야, 봉구 씨 당황했어? 하하하하하하하하!!”      


휴대폰 너머로 지연의 호탕한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봉구 씨 오늘 저녁에 튤립 반 선생님 초대하기로 했어. 봉구 씨가 식사 좀 준비해줘. 볶음밥 좋아하신대!”      



햇살처럼 쏟아지는 지연의 목소리에 긴장이 풀린 봉구는 핑-하고 어지럽다. 바람 피운다는 오해는 사라진 것 같지만 그 흔적은 봉구의 귓가에 아직 맴돌고 있다.    

   

‘내가 이혼남이라서 오빠라고 부르랬다고?’     

 

회사에 다닐 때에도 별별 소문을 듣곤 했다. 이 팀 신입 여직원이랑 저 팀 유부남 부장이 사귄다느니, 유명했던 사내 커플이 결국 이혼으로 결말이 났다느니 하는 얘기는 흔하디 흔했다. 하지만 봉구가 그 당사자가 될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지연의 문자를 봤을 땐 자칫하면 지연과 서린이를 모두 잃을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목 뒤로 소름이 돋았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정말이지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아찔한 경험이었다.      


집으로 간 봉구는 엉망인 집을 치우지도 않은 채 뜨거운 물부터 받았다. 지금 당장 달달한 믹스커피를 마셔야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앗 뜨거!”      


외마디를 내지른 봉구는 지금 자신이 얼마나 이성을 잃은 상태인지 깨달았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커피를 불어 마신다. 따뜻하고 부드럽고 달콤한 갈색 액체가 목 안으로 들어오자 한결 마음이 차분해진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250개짜리 커피 박스가 구세주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그것이 회사의 탕비실마다 저 커피 박스가 들어차 있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후들거리는 하늘다리 같은 하루하루를 무사히 건너가게 하는 맛. 그것이 믹스커피의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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