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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외식의 맛

feat. 생선의 맛 

(이야기 속 '지연' 캐릭터는 '곽선영배우'님을 떠올리면서 썼습니다.)



인생은 외식의 맛과 같다고 지연은 생각했다. 지금 지연의 눈 앞에는 말 그대로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다. 탐스런 새우가 올라간 토마토 파스타와 포근해 보이는 버섯 크림 리조또, 서린이가 좋아하는 고르곤졸라 피자와 감히 건드리기 아까울만큼 예쁘게 담긴 치즈 샐러드까지, 개 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쓴다고 했던가. 지금 이 순간은 그 어떤 정승도 부럽지가 않다.  

     

사진: Unsplash의Elena Leya

“재수 씨, 죄송해요. 제가 이 놈을 제대로 교육 시켰어야 했는데, 가게 연다고 한 눈 판 사이에 그만 똑, 하고 잘려 버렸네요. 제가 재교육 빡세게 시켜서 조만간 돈 버는 기계로 만들겠습니다.”      


학규가 두툼한 안심 스테이크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는 오히려 좋은데요.”      


이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봉구는 별 표정 없이 서린이 접시에 피자를 한 조각 덜어주고 스테이크를 썰어 지연의 접시에 놓아준다. 그리고는 여전히 아무 말 없이, 아무 소리 없이 지연과 서린이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다. 지연은 그런 봉구를 한참 보다가 더 늦기 전에 스테이크를 한 입 먹는다. 맛있다. 봉구는 그제야 포크를 들고 파스타를 먹는다. 소리 없이 조용히.     

 



저 사람을 소란스럽게 만들 수 있을까. 처음 봉구를 만났을 때부터 지연은 그런 호기심을 들었다. 겉은 호랑이 때려잡는 사냥꾼처럼 생겼는데도 봉구는 늘 고요했다. 웬만해서는 먼저 말을 거는 일도 없었고 심지어 소리를 내는 일도 거의 없었다. 연애 시절, 한 번은 봉구의 소리(?)가 궁금해서 골목에 숨어 있다가 놀라게 해 본 적도 있는데, 그때도 눈만 껌벅일 뿐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림자 같아’      


사실 소리 뿐 아니라 표정도 없었다. 좋은지 싫은지 의사를 물으면 그저 끄덕일 뿐이었다. 지연의 말에 싫다는 의사를 표현한 적이 없으니 고개를 젓는 것도 볼 일이 없었다. 그래도 지연은 봉구가 좋았다. 너무 좋아서 미칠 것 같은 얼마의 시간을 보낸 뒤, 결국 지연이 먼저 고백을 해 사귀었고 4년 연애 끝에 청혼도 지연이 했다. 주변에서는 지연에게 콩깍지가 씌었다는 둥, 알고 보면 봉구가 재벌 집 막내아들인 거 아니냐는 둥 말이 많았지만 다른 이유는 없었다. 지연은 그냥 봉구가 너무 좋았다.    

  



봉구를 처음 만난 건 대학교 4학년 때였다. 그때 지연은 교환 학생을 다녀온 뒤였는데, 그래서 그런지 학교 친구들이 조금 서먹했다. 삼삼오오 같이 학생 식당에 가던 길, 누군가 봉구에게 아는 채를 했다. 체크무늬 셔츠에 베이지색 면바지. 더부룩한 머리에 짙은 눈썹. 아주 느리게 움직이던 봉구.        

 

‘곰이다.’ 


한 눈에 봐도 답답해 보이는 유형의 인간이었다. 도무지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하던 지연의 눈에 학생 식당 메뉴가 들어왔다.   

   

<오늘의 식단>     
찰현미밥
미역국
조기구이
갈비찜
배추김치
잡채


‘누가 요새 생선을 먹는다고.’     


지연은 생선을 좋아하지 않았다. 젓가락으로 요리조리 헤쳐서 손톱만한 살을 발라 먹는 건 아무래도 비효율적이다. 지연은 잡채 한 젓가락에 밥 한 숟갈을 번갈아 먹으며, 자꾸만 올라오는 불만과 짜증을 억누르고 있었다. 그런데,      


‘헐. 발골 장인?’      


맞은편에 앉은 봉구가 아주 꼼꼼히 그리고 정확하게 생선을 발라 먹고 있었다. 


https://school.use.go.kr/ushs-h/M01050304/view/2678125?s_idx=5


봉구가 젓가락 끝에서 생선살은 마치 모세 앞에 놓인 홍해처럼 갈라졌다. 지연은 그때 생선살에도 결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잠시 후 드러나는 생선뼈는 가늘었지만 단단해 보였고, 생선이 한때 힘차게 바다를 헤엄치던 물고기(물살이)였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다른 친구들은 식사를 마치고 제각각 수다를 떨고 있었지만, 봉구는 마치 홀로 투명한 유리방 안에 있는 것처럼 고요하게 생선살을 발라 먹었다. 얼마 뒤 그의 식판에는 조기의 머리와 내장 그리고 뼈만이 남아 있었다. 지연의 눈에 그것은 조각가가 오랜 시간을 들여 세상에 내 놓은 작품처럼 보였다. 지연은 봉구와 함께 깊은 바닷 속을 헤엄치다가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사이 짜증은 휘발되어 버렸다.      


그 생선뼈의 야무진 자태가 잊혀 지지 않던 어느 날, 지연은 우연히 학생식당 메뉴가 갈치구인 것을 발견했다.      

‘혹시...?’     


역시나 식당 한쪽 구석에 봉구가 앉아 있었다. 지연은 얼른 식판을 채워 그 앞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지난번에 만났었는데, 저 기억 하시죠?”     


봉구가 가만히 바라보더니 알겠다는 듯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했다.      


“정말 죄송한데요, 저... 생선 좀 발라 주실래요?”      


보통의 인간이라면 뭐 이런 여자가 다 있나 싶었겠지만 봉구는 그저 손을 내밀어 지연의 수저를 가져갔다. 그리고는 숟가락과 젓가락을 나눠 들고는 천천히 갈치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한쪽 면을 가늘게 가르니 가시가 쏙 빠져나왔다. 반대편은 1cm 폭으로 떼어내고 가운데 위쪽 살을 들어내 밥 위에 올려주고는 굵은 가시를 걷어냈다. 그 밑으로 뽀얀 갈치 살이 드러났다. 수저를 돌려받으려 지연이 손을 뻗었지만 봉구의 눈은 여전히 갈치에 고정되어 있었다. 1cm 폭으로 떼어낸 갈치 살을 세로로 두고 반으로 가르니 그 안에 가느다란 가시들이 나왔다. 그것까지 꼼꼼히 걷어내고서야 봉구는 수저를 돌려주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지연은 생선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맞벌이를 하신 부모님은 한가로이 생선을 구울 여유 따윈 없는 분이셨다. 덕분에 경제적으로는 꽤 풍족하게 살 수 있었지만 지연의 식탁은 늘 돈가스나 치킨, 함박스테이크 같은 레토르트 음식으로 채워졌다.     

 

‘먹어보자’     


일부러 봉구에게 부탁까지 해서 얻어낸 갈치 살이니 안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연은 밥 위에 하얀 살을 올려 입 안에 넣었다. 짭쪼름하고 비릿하니 맛있었다. 지연이 두 번째 수저를 뜨자, 봉구도 식사를 이어갔다. 그때 생각했다. 이 남자와 평생 밥을 먹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고백했다. 4년의 연애 끝에 청혼도 했다. 그때 지연은 거의 처음이자 (아직까지는) 마지막으로 봉구의 거절을 경험했다.      


“지연 씨 부모님께서 허락 안하실 거예요.”      


그 말대로 지연의 부모님은 보육원 출신인 봉구를 사윗감으로 반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연에게 그런 것 따위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는 성인이고, 내 결혼에 부모님 허락은 필요하지 않아요.”      


지연은 봉구와 함께 날짜와 예식 장소를 정해 부모님께 통보했다. 봉구는 내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그래도 늘 지연의 뜻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신혼집은 봉구와 함께 마련한 돈으로 작은 전셋집을 얻어 저렴한 살림살이로 채웠다. 지연에게 중요한 건 구봉구라는 남자였지, 좋은 집이나 살림살이가 아니었으니까. 결혼날짜가 다가오자 꼬장꼬장하던 부모님도 두 손 두 발 다 들고 친척들에게 봉구를 인사시켰다. 그렇게 지연은 봉구와 결혼을 하고 서린이를 낳았다.      


행복한 날들이었지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건 바로 서린이였다. 서린이를 볼 때마다 어째 자신의 어린 시절을 그대로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질 않았다. 최근에는 서린이가 변비에 걸리면서 지연의 죄책감은 더욱 무거워졌다. 그런데 때마침, 봉구가 회사에서 잘린 것이다.      


첫 날 어마어마한 채소 폭탄 볶음밥을 시작으로 봉구의 볶음밥은 지금껏 계속 되고 있다. 양배추 볶음밥, 참치 볶음밥, 새우 볶음밥, 계란 볶음밥 등 갖가지 볶음밥만 연이어 먹고 있지만 지연은 너무나도 행복했다. 퇴근을 하고 집에 왔을 때 가족들이 있다는 것, 심지어 맛있는 냄새까지 풍긴다는 건 정말이지 돌아버릴 만큼 행복한 일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서린이의 변비가 해결됐다. 봉구가 볶음밥에 갖가지 채소를 썰어 넣은 덕분이었다. 모든 것이 참으로 완벽하다고 지연은 생각했다. 그래서 한 번 더 욕심을 내기로 했다.    

  

“부장님, 저 승진하고 싶습니다.”      


얼마 전 지연은 부장님을 찾아가 면담을 했다.      


“무슨 일이야, 이 대리? 내내 승진 시켜준대도 싫다고 하더니?”      


사실 이제껏 몇 번이나 승진 기회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지연이 먼저 나서 마다해왔다. 더 바빠지면 집안은 더 엉망이 될 게 뻔했고, 안 그래도 유치원에서 제일 늦게 나오는 서린이가 혼자 있을 시간이 더 길어질테니까. 서린이에게 자장밥을 데워주는 것을 떠나 밥 먹는 모습을 볼 시간도 없을지 모른다. 그래서 승진을 미뤄왔었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이제 집에는 봉구가 있다. 그래서 지연은 승진을 해버렸다. 그리하여 오늘 세 식구가 함께 학규의 레스토랑으로 외식을 하러 온 것이다.      


“서린아, 아빠가 맛있는 거 많이 해 줘?”      


학규가 서린이와 눈높이를 맞추며 묻는다.      


“응! 햄 볶음밥, 계란 볶음밥, 새우 볶음밥, 또 뭐였지 아빠?” 

“장조림 볶음밥” 

“맞아! 장조림 볶음밥!”     


봉구가 서린이의 입가에 묻은 토마토 소스를 닦아준다. 그리고는 지연의 접시에 샐러드를 덜어준다. 지연이 좋아하는 치즈와 토마토, 아몬드 조각을 꼼꼼히 골라서. 지연이 얼른 토마토를 한 입 입에 넣는다. 그러자 봉구는 토마토 한 조각을 서린이의 입에 넣어준다. 그 후에야 자신의 입에 치커리를 한 웅큼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는다.  

    

“봉구 씨 내 부탁, 생각해 봤어?”      


봉구의 씹는 속도가 느려진다. 뭔가 망설이는 게 있다는 뜻이다.      


“집 대출 같은 거 걱정하지 말고. 나 연봉도 올라서 우리 생활하는 데에는 아무 문제없어. 당신이 꼭 일을 하고 싶다면 어쩔 수 없는데 지금은 서린이도 어리고 하니까 당신이 집안 일 좀 맡아주면 어떨까? 원한다면 내가 월급도 줄게. 많지는 않겠지만.” 


“정말 내가 돈 안 벌어도 괜찮겠어?”      


봉구의 낮은 목소리가 울린다.      


“응 괜찮아. 내가 다 계산해봤어. 아무 문제없어. 나 돈 잘 벌어, 봉구 씨.” 


“아무리 그래도 재수 씨, 봉구도 아빠 노릇 해야죠. 어디 가서 아르바이트라도 하라고 해요.”      


학규가 옆에서 한 마디 거들었지만 지연의 눈은 봉구에게 고정된 채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지금 서린이에겐 옆에 있어줄 아빠가 필요해요, 돈 벌어오는 아빠가 아니라.” 


“맞아. 아빠가 집에 있으니까 너무 좋아!”      


서린이도 거들자 학규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제야 봉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좋아. 당신만 괜찮다면 내가 살림을 해볼게.”      


역시 봉구는 거절할 줄 모른다. 지연은 나란히 앉은 봉구와 서린이를 보면서 다짐했다. 열심히 일해서 맛있는 걸 먹게 해줘야지. 그게 내 인생의 맛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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