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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양배추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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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양배추의 맛이라고, 지금 봉구는 생각하고 있다. 축구공보다도 작은 이 하얀 타원형 속에 이렇게나 많은 층위를 감추고 있다니. 봉구는 마치 인생이라는 양배추에 속은 것만 같았다. 아니, 양배추라는 인생에 속은 건가.      


“너무 크잖아. 딱 요만하게 자르라니까?”      


봉구의 혼란을 깨뜨린 것은 학규의 잔소리였다.      


“그냥 댕강댕강 썬다고 해서 써는 게 아냐. 요리의 목적에 맞는 모양과 크기, 두께로 썰어야지.”      


요리의 목적과 모양에 맞는 크기와 두께. 그렇다면 어제 그 볶음밥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봉구는 문득 궁금해졌다. 당근의 자기 주장 축제? 마지막까지 어금니 사이에 남아 있던 대파의 고집? 칼에 닿는 순간 산산이 흩어져버린 브로콜리의 하찮은 존재감? 분명 볶음밥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고, 그것을 만들었으나, 결과물은 그것이 아니었다. 어딘가에서 발생한 오류를 해결하기 위해 학규를 찾아왔던 것이다.      


“네가 요리를 했다고? 서린이랑 재수씨한테 그걸 먹였어, 미친놈아?”      


어느 지점에서 나는 미친놈이 된 것일까. 봉구는 알 수 없었다.      


“라면도 못 끓이는 놈이 무슨 볶음밥이야. 차라리 나한테 해달라고 하지.”      


이미 말 한대로 학규는 요리사다. 이태리 레스토랑 쉐프. 그것이 학규의 직업이자 정체성이다. 보육원에 있던 시절부터 학규는 요리를 좋아했고 또 잘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김치전을 부쳤고 시험공부로 밤을 샐 때면 떡볶이를 만들었다. 봉구의 급식 인생에서 학규의 요리는 일종의 특별식이었다. 물론 다른 아이들도 그의 요리를 좋아했고 심지어 원장 선생님까지도 기대할 정도라 학규에게 만큼은 주방이 쉽게 허락 되었다. 그 덕에 봉구는 한밤 중에 종종 소시지와 콩나물이 들어간, 엄청나게 맛있는 라면을 얻어먹기도 했었다. 먹고 돌아서기만 해도 허기가 졌던 10대 시절이었다. 


“난 청소를 할 테니 넌 이것을 잘라라.” 

     

서린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곧바로 찾아온 봉구에게 학규는 칼 한 자루와 양배추 다섯 통을 건네주었다. 하필(?) 오늘이 피클을 담는 날이라고 했다. 그래도 어제 채소 좀 썰어봤다고, 봉구는 자신 있게 칼을 쥐었다. 그리고는 양배추의 정수리를 힘껏 찔렀다. 예상 외로 칼은 쉽게 들어가질 않았다. 단단한 심지로 칼을 물어 버린 양배추는 칼을 놔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동그란 양배추 한 가운데에 칼이 꽂혀 버렸다.      


“야, 구봉구... 너 예상 외로... 바보로구나.”      


그 말에 봉구는 칼을 머금은 양배추를 바라보았다. 학규의 입을 다물게 하는 데에는 칼이 좋을까, 양배추가 좋을까. 고민하던 사이 가까스로 칼을 빼낸 학규가 일단 시범을 보여주었다.      


“이 자식도 가슴 한 가운데 굳건한 심지를 품고 있다고. 그래서 처음부터 중심을 찌르면 안 돼. 이렇게 동서남북 네 방향을 먼저 자르고, 그 다음 위 뚜껑을 열 듯 해체하는 거다.”      

스플레시 이미지 - 봉구는 이렇게 자르고 싶었던 걸까요 

정말이지 양배추란 녀석은 서린이 손목보다도 더 두꺼운 심지를 숨기고 있었다. 봉구는 그 심지를 잠시 노려 본 후 다시 칼을 들었다. 그리고 학규가 가르쳐준 대로 나머지 양배추를 잘랐다. 동서남북 그리고 뚜껑. 금세 다섯 놈의 심지가 모두 드러났다. 그런데 그 다음 무엇을 해야 할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이 가지각색의 양배추 잎들을 어떻게 하라는 거지? 그때 학규가 냉장고에서 남은 피클을 꺼내 분홍빛으로 절여진 양배추 한 조각을 봉구의 손바닥 위에 놔 주었다.       


“모양과 크기를 관찰해라. 그리고 썰어.”      


그리하여 지금 봉구가 양배추를 자르고 있는 것이다. 학규의 말에 따라 피클을 관찰한 뒤 성심성의 껏 잘랐건만, 양배추 조각은 여전히 제각각이었다. 녀석은 남 몰래 딱딱한 심지를 숨기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속은 겹겹이 감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 겹겹은 모두 모양과 두께가 다르다. 어느 부분은 하늘하늘 얇은데 또 어느 부분은 등갈비 뼈처럼 굵다. 아무래도 이 양배추라는 녀석을 좋아하기는 힘들 것 같았다. 봉구는 절로 고개를 흔들었다.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마. 일단 잘라. 자르다 보면 알게 돼.”      


일단 자른다. 그 말에 봉구는 먼저 세로 폭부터 맞추기로 했다. 엄지 손가락을 하나 대고서 폭을 가늠한다. 자른다. 서거거걱. 어라? 다시 한 번. 엄지 손가락, 그리고 서거거걱. 세 네 번 반복하자 양배추 동 조각이 비슷한 폭을 가진 조각들로 분리 되었다. 다만 아직 길이는 모두 달랐으므로 성일은 제일 앞쪽 조각의 밑변을 기준으로 삼아 나머지 조각들을 정렬했다. 그 모양이 어쩐지 정규분포 같았다. 봉구는 그 정규분포를 역시나 엄지 손가락의 폭만한 길이로 잘랐다. 어느 것은 혁규가 보여준 것처럼 네모난 모양이었고 어느 것은 네모난 것의 귀퉁이 모양이었지만.      


“잘했네. 나머지도 부탁해.”      


칭찬은 봉구로 하여금 칼질하게 했다. 어느 새 칼질에는 리듬이 생기고, 봉구는 이내 손으로 전해지는 양배추의 겹이 썰리는 느낌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서서히 손이 빨라진다. 서걱서걱. 서걱서걱. 소쿠리에 쌓여가는 양배추 조각들이 마치 퍼다 놓은 소금처럼, 길가에 쌓인 눈더미 처럼 소복하다.      


“잠깐만, 그건 볶음밥 용이야.”      


마지막 뚜껑을 향해 칼을 꽂으려는 순간, 볶음밥이라는 말에 잠시 잠깐 트라우마가 올라왔다. 그런데, 볶음밥에 양배추를 넣는다고? 양파, 당근, 파, 그리고 브로콜리가 아니라?      


“양배추가 애들 먹기 편해. 익어도 맛있고 안 익어도 먹을 만해서 너 같은 초보들이 요리하기도 좋고. 이건 음... 서린이 새끼 손가락 손톱만한 크기로 잘라.”      


이건 아마도 봉구를 위한 맞춤 학습일 것이다. 봉구는 서린이의 손가락을 떠올렸다. 그리고 손톱을 떠올렸다. 서린이가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봉구는 아기 손톱은 전용 가위로 잘라야 한다는 걸 알고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진짜로 손톱이 가위로 잘리는 걸 보고는 더 깜짝 놀랐다. 그 때 서린이의 손톱은 아마 지퍼백 비닐보다도 더 얇았을 것이다. 지금은 꽤나 두꺼워져서 이젠 손톱깎이로 또각또각 잘라내곤 하지만.      


봉구는 먼저 서린이의 손톱의 폭만큼 양배추를 썰었다. 그리고 채 썬 양배추를 90도 돌려 서린이 손톱의 폭만큼 다시 잘랐다. 양배추 조각이 수백 개 생겨났다. 이걸 공중으로 던지면, 눈송이처럼 하늘하늘하고 떨어질까?      

“자 이번에는 베이컨이다.”      


학규가 냉장고에서 베이컨을 세 줄 꺼내준다.      


“같은 크기로.”      


네 쉡! 드라마에서 그런 말을 왜 하는지 이제 알 것 같았다. 확실히 학규는 이곳 주방에서 카리스마가 넘쳤다.      

“이제 칼질 좀 할 만 하냐?”      


그러고 보니 어느 새 칼질을 하면서 다른 생각도 하고 있었다. 여유가 생긴 것이다.       


“나 때는 양배추를 서른 개 씩 쌓아놓고 했어. 다섯 개는 일도 아냐.”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두 사람은 나란히 서울로 올라왔다. 봉구는 4년제 대학에 진학을 했고 학규는 1년 짜리 요리학교에 들어갔다. 그때가 봉구의 인생에서 가장 못 먹고 살던 때였다. 요리 실습에 치인 학규가 집에서는 잠만 잤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한 덕분에 학규는 유명 레스토랑에 취직을 할 수 있었고 얼마 전에는 이곳에 작은 파스타 집을 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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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오년이라는 시간동안 학규는 얼마나 많은 양배추를 썰었을까. 봉구는 새삼 학규의 주방을 돌아보았다. 가지런히 꽂혀 있는 여러 개의 칼(왜 모양이 저렇게 가지각색일까), 선반에 놓인 갖가지 가루들(이름이 써있지만 뭔지 모르겠다), 아래 선반에 차곡차곡 놓여 있는 접시들(원래 저렇게 종류가 많았나?), 낡았지만 한결같이 깨끗한 프라이팬들(어제 주방에 쳐 박혀 있던 프라이팬이 떠오른다.). 학규는 이 주방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봉구는 직장에 있던 책상도, 집에 있는 후라이팬 하나도 장악하지 못했는데.       


“이거 가져 가. 베이컨이 색이 짙어지면, 그 때 밥을 넣는 거야, 알았지?”      


학규는 봉구가 자른 양배추와 베이컨을 싸 주었다. 베이컨이 짙어지면, 그 때 밥. 봉구는 학규의 말을 잊지 않도록 한 번 더 말해 보았다. 그 사이 학규는 점심 장사를 위해 오븐을 켰다.      


“구봉구”      


학규는 여전히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조금 쉬었다 간다고 생각해. 정 심심하면 여기 와서 알바라도 하든가.”      


학규는 봉구를 걱정하고 있었다. 시키는 대로 착실하게 살아오기만 한 친구가 어느 날 갑자기 텅 빈 바깥에 내던져졌으니. 게다가 봉구는 아무래도 좀 고지식한 구석이 있으니까 혹시 상처 받지 않았을까 걱정도 됐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여전히 아무 것도 모른다. 지금은 힘들어 해야 하는 시간이라는 것도, 스스로를 위로하고 다독여야 한다는 것도. 늘 그랬듯이 무표정한 얼굴로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학규는 그런 봉구가 늘 불안했다. 저렇게 로봇처럼 할 일만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뚝, 하고 이 세상에서 끊어지는 것은 아닐까. 오랜 시간 천천히 말린 어느 국수처럼, 뚝, 하고서. 그래서 굳이 여기까지 불러 칼과 양배추를 쥐어준 것이었다. 몸을 움직이면 조금 나아질까 싶어서.      



학규의 그런 마음 씀씀이는 아주 유효했다. 그날 저녁 봉구의 볶음밥은 아주 대성공이었으므로. 서린이는 양배추 뿐 아니라 식탁에 떨어진 밥 한 톨까지 주워 먹었고 지연도 아주 맛있다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빈 접시를 닦으며 봉구은 양배추라는 녀석에 대해 다시 생각하기로 했다. 굳은 심지를 감추고도 자신의 이파리를 모두 내어주는 녀석. 서린이가 좋아하는 얇디얇은 이파리를 겹겹이 쌓아두고 있는 녀석. 


잘라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 그 사람의 자리에 서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 늘 밝고 활기찬 학규를 보면서도 학규가 어떤 노력을 기울여 왔을지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봉구는 앞으로 채소도, 사람도 조금 더 들여다봐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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