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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된장의 맛

인생은 된장의 맛이라고, 봉구는 생각하고 있다. 쿰쿰하고 짭짜름한 맛, 도무지 콩과 소금, 물만 가지고 만들었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맛. 지금 봉구는 눈앞에 있는 된장찌개를 노려보고 있다.   

   


그날도 저녁은 당연히 볶음밥이었다. 얼마 전 학규에게 칼질을 배운 후로 봉구의 볶음밥은 날로 발전해 나갔다. 재료를 서린이 새끼손톱만 하게 자른 후 팬에 넣고 충분히 볶는다, 그 다음에 밥을 넣어 볶는다. 이 규칙만 알면 그럴듯한 볶음밥이 만들어졌다. 덕분에 자기주장과 질긴 고집으로 봉구를 괴롭히던 당근과 파는 모두 얌전히 조각나 세 식구의 접시에 오르곤 했다.      


봉구는 햄과 양배추와 당근과 파를 모두 서린이 새끼 손톱만한 크기로 잘라서 비닐 봉투에 담아 두었다. 이렇게 해두면 밥을 할 때마다 꺼내서 볶기만 하면 되니까. 봉구는 발전하는 자신의 모습에 조금 뿌듯했다.      


그런데 어느 날 오후 서린이가 유치원에서 된장을 한 움큼 들고 온 것이었다.      


“자연관찰 선생님이 주셨어. 이거 먹으면 응가 잘 한 대!”      


그 말을 듣자 한 움큼의 된장이 아주 잠깐 응가처럼 보였지만 봉구는 얼른 그 생각을 떨치고 된장 봉지를 받아들었다.      


“오늘 체험학습 다녀왔거든요. 콩과 관련된 활동을 해서 선물로 된장을 조금씩 나눠주셨어요.”     


서린이의 선생님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아, 네, 하며 봉구는 서린이의 운동화를 신겨 주었다.      


“아빠 오늘 저녁 된장찌개 끓여주세요.”      


그 말에 봉구는 깜짝 놀랐다. 갑자기 두뇌가 확장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왜 이제껏 나는 볶음밥만 만들 생각을 했던 걸까? 그리고 한결 같이 자신을 놀라게 하는 이 예쁜 아이는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서린이를 기특하게 바라보며 봉구는 작은 손을 꼬옥 잡았다. 그리고는 다시 마트에 가서 두부와 새송이 버섯을 사왔다.      


두부와 버섯, 그리고 파와 양파. 이것이 봉구가 떠올린 된장찌개의 재료다. 급식이나 삼겹살 집에서 먹은 된장찌개에는 대게 그런 것들이 들어가 있었다. 자신 있게 팔을 걷어 부친 봉구는 냄비에 물을 담고 된장을 풀었다. 그리고 두부와 버섯을 썰어 넣었다. 그 다음으로는 아까 낮에 썰어두었던 양파와 파를 한 스푼 떠 넣었다. 그러자 모든 재료들이 물 위로 둥둥 떠올랐다. 그간 봐 왔던 된장찌개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지만 일단 불을 켜 찌개를 끓이기 시작했다. 끓기를 기다리는 동안 오늘도 마찬가지로 볶음밥을 만들었다. 가스 불을 두 개나 쓰다니. 마치 학규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늘은 무슨 볶음밥이야?”      


지연이 현관을 들어서며 묻는다.      


“어? 이거 무슨 냄새야?” 

“된장찌개. 아빠가 된장찌개 끓였어. 내가 된장을 이만큼 받아왔거든.” 

“된장찌개애~?”     


지연의 얼굴에 호기심이 가득 떠올랐다. 그건 봉구가 좋아하는 지연의 표정 중 하나였다.      


“진짜? 당신이 찌개를 다 끓였어? 뭘 넣고 끓였어?”      


지연은 가방을 든 채로 주방으로 향했다. 보글보글 끓고 있는 냄비를 보더니 바로 숟가락을 들고 한 입 먹어 본다. 이어지는 당황한 표정. 봉구가 그리 좋아하는 표정은 아니다.      


“봉구 씨, 이거.. 짜.” 

“짜?” 

“짠 거 많이 먹으면 안 된댔어. 선생님이”      


말리는 시누이가 아니라 말리는 딸이다. 봉구는 얼른 물을 한 컵 부었다.      


“그 정도로는 안 될 것 같은데. 된장을 얼마나 넣었어?” 

“이만~큼!”      


서린이 두 주먹을 모아 쥐어 보여준다. 말리는 딸은 이르는 딸이 되었다.      


“이게 좀 짠 된장인가보다.”      


이렇게 말한 지연은 허리를 숙여 커다란 냄비를 꺼냈다. 저런 게 우리 집에 있었나? 봉구가 갸우뚱 하는 사이 지연이 찌개를 옮겨 담고 물을 여러 컵 부었다. 냄비 안을 들여다보니 둥둥 떠 있는 두부와 버섯이 바다에 표류된 스티로폼 조각처럼 힘없어 보인다. 거기에 서린이 새끼손톱만한 파와 양파까지 떠오르고 보니, 자신만만하게 시작했던 된장찌개가 갑자기 사소해져 버렸다. 


그래도 어제 보다 나은 건, 오늘은 각 사람 앞에 그릇이 두 개씩이라는 점. 볶음밥 그릇과 찌개 그릇. 그것만으로도 봉구는 꽤나 뿌듯했다. 하지만 된장찌개를 한 입 먹자 그 뿌듯함은 혀 표면의 미뢰들 사이로 사라졌다.      

뭘까. 뭐지. 이건 분명 된장찌개인데 된장찌개가 아니다. 혼란스러웠다. 슬쩍 고개를 들어보니 지연과 서린이는 그런대로 잘 먹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다. 두 사람 다 두부와 버섯만 건져 먹고 있다.      


“내가 집에서 봉구 씨가 끓여주는 된장찌개를 다 먹어보네. 이래서 다들 집에 살림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 건가봐.”      


그 말에 봉구는 국물은 한 숟갈도 먹지 않으면서 말은 잘도 한다고 생각할 뻔 했다. (그렇다. 벌써 했다.) 볶음밥을 입에 열심히 쑤셔 넣은 봉구는 말없이 식탁에서 일어났다. 잘 한 것도 없으면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찌개 냄비를 들어 싱크대로 가져갔다. 이 찌개는 망했으므로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한다. 없애버리고 말겠다!      

“잠깐만! 그걸 왜 버려?”      


지연이 급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이상하네? 당신 음식 버리는 사람 아니잖아.”      


지연이 봉구에게서 냄비를 받아들어 다시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놓았다.      


“눈 딱 감고 내일 아침까지만 있어 봐. 정 뭐하면 두부나 더 썰어 넣든가. 두부가 맛있네. 잘 골랐어요, 구봉구 씨.”      


분명 두부는 맛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서린이는 찌개에 든 두부를 건져 볶음밥과 야무지게 섞어 먹고 있다. 하긴 봉구도 된장찌개에 들어간 두부를 좋아했다. 지연의 말대로 두부를 더 썰어 넣기로 했다. 그러는 김에 버섯도 조금 더 썰어 넣었다. 이번에는 조금 크게 썰어 넣었다. 그렇게 건더기를 보충했더니 그나마 찌개다운 느낌이 났다. 지연의 말대로 내일 아침까지만 두고 보자. 된장찌개 네 놈의 목숨은 내일 아침까지다.      


다음 날 새벽 제일 먼저 일어난 건 다름 아닌 서린이였다.      


“엄마, 나 배 아파.”      


그 소리에 눈을 떠 보니 새벽 5시 30분이었다. 지연이 서린이의 손을 잡고 화장실로 향했다. 이어 잠시 후      


“우와! 응가다!!!”      


봉구의 눈이 번쩍 떠지고 몸이 벌떡 일어났다. 서린이가 집에서 응가를 했다. 이게 얼마만인가. 봉구는 얼른 화장실로 달려갔다. 거기(?)에는 정말이지 바나나처럼 예쁜 서린이의 응가가 얌전히 놓여 있었다.      


“아빠가 해준 밥 열심히 먹더니 변비 탈출 하셨네요, 공주님!”      


지연과 서린이가 마주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마음이 간질간질, 입 꼬리가 씰룩씰룩, 괜히 쑥스러운 마음에 봉구는 바로 주방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그 녀석, 된장찌개가 여전히 살아 있었다. 불을 올리고 그 옆에서 (역시나) 볶음밥을 만드는 동안 봉구는 내내 된장찌개를 째려보았다. 살짝 끓어오르자 얼른 숟가락을 들고 먹어보았다.      


찌개는 변태했다.      


어디선가 달큰한 맛이 올라왔고 어제의 그 짠 맛 아래로 묵직하고도 구수한 맛이 층을 이루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지연이 화장실에서 나오면서 그 비밀을 알려주었다.      


“원래 찌개는 하루 지나면 더 맛있어. 이모가 늘 그렇게 전날 끓여 놓으시더라.”      


된장, 너란 녀석. 죽음의 위기를 넘어 극적으로 살아남아 제 역량을 발휘해 내고야 만 녀석. 봉구는 왠지 된장에게 조금 미안해졌다.      


그날 아침 세 식구는 다 함께 볶음밥과 된장찌개를 맛있게 먹었다. 특히 지연은 어제 저녁과는 달리 국물까지 싹싹 긁어먹었다. 그 모습을 보며 봉구는 인생은 아무래도 된장의 맛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충분히 흐르기 전까지는 대체 무슨 맛인지 알 수 없는, 봉구의 인생에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이지연이라는 여자처럼, 그리고 선물처럼 태어난 박서린이라는 아이처럼. 


콩과 소금, 물로만 만들어진 된장이 그런 오묘하고 복잡한 맛을 갖게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는 걸 봉구는 아직 모른다. 봉구가 지금 이 순간 콩이 소금과 물을 만나 된장이 되는 그 놀라운 시간을 겪고 있다는 것도 시간이 훨씬 흐른 뒤에나 깨닫게 될 일이었다.      


아침을 든든히 먹고 현관문을 나서던 지연이 갑자기 봉구를 껴안았다.      


“봉구 씨 있잖아...”      


왜 이렇지. 지연은 원래 말을 망설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몸을 떼어낸 지연이 봉구의 손을 만지작 거리며 한참 시간을 끌었다. 그러다 결심했다는 듯이 한숨을 한 번 훅, 쉬더니 봉구를 똑바로 바라봤다.      


“나 승진했어. 그래서 말인데 봉구 씨 당분간 가정 주부 좀 해주면 안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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