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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볶음밥의 맛

“차라리 잘 됐어. 이 참에 좀 쉬면서 성일 씨 하고 싶은 일 좀 찾아봐.” 

“엄마. 나 쉬.” 

“우리 서린이, 이제 화장실 혼자 갈 수 있지?”      


다섯 살 서린이가 콩 하고 의자에서 내려와 쪼르르 화장실로 들어갔다. 봉구는 말없이 퍽퍽한 닭가슴살을 씹었다. 오늘 저녁은 배달 치킨이다. 봉구는 퍽퍽살을, 지연은 날개를 좋아하고 닭다리 두 개는 서린이의 차지다. 


“봉구 씨 한 번도 쉰 적이 없잖아. 졸업하자마자 취업 돼서. 너무 정신없이 살아온 것도 맞지 뭐.”     

 

졸업을 하면 취업을 한다. 취업을 했으니 일을 한다. 거기에 의문을 품어본 적은 없었지만.      


“우리 대출금은 얼마나 남았지?”      


그 말에 지연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하하. 그걸 뭐하러 물어? 거긴 밑 빠진 독이야. 부어도 부어도 안 줄어. 그냥 그러려니 해.” 

“엄마 나 배 아파”      


그 소리에 지연은 얼른 화장실로 달려갔다.      


“똥 쌀 수 있겠어? 오늘은 응가를 좀 하면 좋겠는데.” 

“몰라. 배 아파.”      


봉구가 슬쩍 화장실을 들여다본다. 서린이의 얼굴이 새빨갛다. 응가를 하느라 힘을 주는 모양이다. 먹으면 싼다, 이 급식스러운 일이 서린이에게는 너무나 어려웠다. 서린이는 지금 변비다.    

  

“여보. 쉬는 김에 내일 서린이 병원에 좀 데려가 줄래? 아무래도 약 한 번 더 먹어야 할 것 같은데.” 

“응 알았어.”      


아프면 병원에 간다. 그게 당연한 것이었다. 서린이의 병원에 봉구가 함께 하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물 많이 먹게 하시고요, 채소 많이 먹이시고요, 일단 유산균이랑 장 운동 도와주는 약 처방해드릴게요.”      


병원을 나선 성일은 일단 물부터 샀다. 다행히 서린이는 꿀꺽꿀꺽 물을 잘 마셔주었다. 그리고는 약도 먹였다. 서린이에게서 달콤한 요거트 향이 났다.     

 

“아빠 안녕!”      


느즈막히 유치원으로 들어가는 서린이가 봉구를 향해 손을 흔든다. 서린이를 유치원에 데려다 주는 건 늘 지연의 몫이었다. 서린이의 작은 어깨에 매달린 작은 가방, 봉구의 손보다도 작은 서린이의 실내화, 나비처럼 팔랑거리는 서린이의 머리카락이 하나 하나 봉구의 눈에 새겨진다. 그 순간 마음 한구석이 잠시 간지러워진다. 


"흠흠...!" 


마치 재채기를 하듯 봉구는 헛기침으로 간지러움을 꾹 누른다. 그렇게 서린이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발걸음을 돌렸다.       




냉장고에 채소라고는 얼마 전 홈쇼핑에서 산 김치가 전부였다. 채소 칸에 파와 양파 였던 것이 있었지만 지금 그것들은 끈적이는 갈색 진액을 뱉어내고 있었다. 반면 냉동고는 꽉 차 있었다.      


‘돈가스, 함박 스테이크, 탕수육,..’     


모두 서린이가 좋아하는 음식이지만 오늘은 안 된다. 의사 선생님이 채소를 먹으라고 했으니 오늘은 채소를 먹어야 한다. 하지만 냉장고에 채소가 없다. 그렇다면? 사야 한다. 대신 냉동고에 있는 돈가스는 봉구가 먹기로 한다. 그것이 봉구의 점심이었다.      


나름 속을 든든히 채우고 갔건만, 마트에 간 봉구는 순식간에 패닉에 빠졌다. 이전에도 지연과 몇 번 이곳에 온 적이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봉구는 지연의 등만 쫓아 다니며 카트를 끌었다. 전장을 누비는 장군 같았던 지연이 없으니, 마트는 너무나도 넓은 미지의 세계였다. 무엇보다 채소의 종류가 너무 많았다.      

https://www.hankyung.com/article/2021011991811


‘애호박, 단호박, 노란 호박, 주키니 호박,..’ (다 같은 호박인데 다 다르게 생겼다.)

‘시금치, 참나물, 공심채, 미나리...’ (다 똑같이 생겼는데 이름이 다르다.) 

‘느타리버섯, 새송이버섯, 표고버섯, 팽이버섯...’ (이름도 다르고 생긴 것도 다르다.)     


이 아득한 채소의 늪에서 봉구를 건져준 것은 학규였다. 학규는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이 시간에 웬일이냐?”

“채소 반찬....”

“뭐?”

“채소 반찬이 필요한데...” 

“채소? 너 회사에서 그런 일도 하냐?” 

“서린이가 채소를 먹어야 해.”

“그래? 그럼 볶음밥 해줘. 애들이 그건 잘 먹잖아.”      


학규는 천재다. 그 천재성이 요리에만 발휘되는 게 문제라면 문제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봉구를 구원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전화를 끊은 봉구는 그간 급식에서 먹은 볶음밥을 떠올리며 채소를 골랐다.      


양파, 당근, 그 파란 것은 뭐였을까. 파였을까? 브로콜리도 색깔이 좀 비슷한 것 같은데? 그럼 둘 다 사보기로 한다. 그리고 햄. (햄도 고르는데 오래 걸렸지만 일단 오늘은 넘어가기로 한다.)      


돌아오는 길에 봉구는 서린이를 데리러 갔다. 서린이는 역시나 손을 흔들며 등장했고 봉구는 다시 한 번 가슴 한켠이 간지러웠지만 이번에도 헛기침으로 외면했다. 

      

“아빠 나 유치원에서 똥 쌌다?”      


병원에 갔고 물을 마셨고 약을 먹었으니 똥을 쌌다. 너무나도 당연한 일인데 봉구의 마음은 이전보다 더 가려워졌다. 헛기침을 할 새도 없이 간지러움이 터져나와 봉구의 입꼬리를 밀어 올렸다. 서린이도 기분 좋은 지 봉구의 손을 잡고 통통 뛰며 걷는다. 작고 보드라운 손. 봉구는 감히 그 손을 꽉 쥐지 못한다.      




급식판에서 본 볶음밥을 떠올리며 봉구는 손을 움직였다. 하지만 당근은 예상외로 딱딱했고 양파는 미끄러웠으며 파는 질겼고 브로콜리는 산만했다. 


잘라놓은 조각들은 아무래도 볶음밥에 적합해보이지 않았지만 봉구는 일단 후라이 팬에 넣어보기로 했다. 급식은 제 시간에 나와야 한다. 그것이 급식의 존재 가치다. 이제 곧 지연이 퇴근을 해 돌아온다. 그러므로 지금쯤이면 볶음밥을 시작해야 한다. 


채소와 찬밥을 함께 넣고 봉구는 가스 불을 켰다. 기름을 두르고나니, 타닥타닥, 뭔가 그럴 듯한 소리가 나기 시작한다. 봉구는 부지런히 재료들을 섞었다. 자꾸만 재료들이 후라이팬 밖으로 빠져나갔다. 마치 팝콘 기계 속 바구니에서 팝콘이 밀려나오듯 당근도, 양파도, 밥알도 자꾸만 밖으로 밖으로. 시시때때로 채소와 밥알을 주워 담으면서 봉구는 계속 밥을 볶았다. 오늘 저녁 메뉴는 무슨 일이 있어도 볶음밥이다.      


“정말 봉구 씨가 한 거야?”      


지연의 얼굴에 잠시 잠깐 놀라움이 스치고 곧바로 당황스러움이 찾아왔다. 사실 접시 속 당근이 은근히 거슬리긴 했다. 주황 빛깔을 뽐내는 당근은 그 존재감이 참으로 다채로웠는데 그건 당근의 크기가 다채로웠기 때문이다. 어느 것은 봉구의 엄지손톱만큼 컸고 어느 것은 새끼 손톱만 했다. 다른 채소들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지만 당근의 자기 주장이 워낙에 강력했다.      


“봉구 씨가 집에 있으니까 참 좋다. 밥도 해주고.”      


서걱서걱. 지연이 당근을 씹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엄마. 이거 매워.”      


서린이가 눈물을 글썽인다.      


“서린아. 양파 빼고 먹어. 이 양파가 유난히 맵다.”  (양파 아웃)    


지연이 서린의 접시에서 양파를 골라낸다.      


“엄마. 이 당근 너무 딱딱해.” 

“너무 커서 그런가? 큰 것만 엄마가 골라내 줄게.”     (당근 아웃)


지연이 당근을 골라낸다.      


“엄마. 이 파가 맛이 없어.” 


지연이 파를 골라낸다.    (파 아웃)

  

“엄마 그런데 이건 뭐야?”

“그거? 브로콜리 줄기. 아빠가 서린이 응가 잘하라고 넣어 주셨나봐.”     

 

그 말에 서린이는 봉구의 얼굴을 슬쩍 보더니 눈을 꼭 감고 브로콜리 줄기를 오물오물 씹어 꿀꺽 삼켰다. 그리고는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물을 먹었으니 된 건가. 이번에는 봉구가 서린이의 접시에서 브로콜리를 골라냈다. (브로콜리 아웃) 결국 서린이는 밥과 햄만 먹었다. 봉구는 서린이가 골라낸 양파와 당근, 브로콜리 줄기를 오래오래 천천히 씹어 먹었다. 딱딱하고 매우면서도 질긴 식사였다.      


그래도 한바탕 식사를 마쳤으니 오늘의 급식은 끝이 났다.......


고 봉구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릇을 포개어 들고 돌아선 그는 심장마비에 걸릴 뻔 했다. 주방이 전쟁을 막 끝낸 전쟁터 같았기 때문이었다. 고작 볶음밥 세 그릇을 만들었는데 지금 싱크대에는 칼이 두 개, 도마가 세 개, 접시가 세 개, 볶을 때 쓴 주걱이 두 개 있었다. 거기에 미처 정리하지 못한 남은 양파 세 개와 당근 두 개, 파 한 단(에서 파 하나 빠진 만큼), 썰다 만 브로콜리까지.      


그제야 봉구는 이제껏 자신이 보고 먹은 급식은 급식의 극히 일부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배식대 너머로 보인 주방이 예상 외로 넓었던 것도 떠올렸다. 무엇보다 그 안에 조리원은 결코 한 명이 아니었다는 것도.      

그렇게 봉구의 인생은 급식대를 떠나 조금씩 넓어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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