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까르보나라의 맛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

by 바람부는 언덕


pasta-carbonara-with-guanciale-12.jpg https://casualepicure.com/pasta-carbonara-with-guanciale/ - 하다하다 외국 사이트에서까지


인생은 어쩌면 이 까르보나라의 맛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고 지금 봉구는 생각하고 있다. 얼핏 보면 스파게티를 그저 삶아 놓은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포크에 둘둘 말아 입에 넣어보면, 전에 없던 파스타의 세계가 펼쳐진다. 그제야 요염하게 꼬여 있는 파스타 면에 노랗고 꾸덕한 소스가 충실하게 버무려져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제껏 내가 먹어왔던 건 무엇이었는가. 그건 파스타를 가장한 라면이었을까. 이 꼬롬하게 짭짤한 이 녀석은 뭐지. 베이컨은 아니라고 했는데. 뭐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어느새 포크를 한껏 눕혀서 그릇에 달라붙어 있는 소스를 긁고 있는 것이다.




일의 시작은 얼마 전 저녁 식사였다. 그날은 서린이의 유치원 단짝인 재현이와 함께 밖에서 외식을 하기로 한 날이었다. 3월이 되어 서린이는 튤립반을 졸업하고 6세 반인 햇님 반이 되었다. 아쉽게도 재현이는 달님반이 되었는데 그 사실을 알게 된 날 서린이는 집에 와 한참을 울었다. 얼마나 서럽게 울던지 하마터면 봉구는 현경에게 전화를 걸어 따질 뻔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서럽게 운 것이 서린이 하나는 아니었다. 재현이를 좋아하는 또 다른 여자아이인 수빈이는 별님반이 되었는데, 수빈이 역시 밤새 울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애들 한 번 같이 밥 먹게 해 주려고요. 혹시 서린이도 올 수 있을까요?”


그렇게 말하는 재현 엄마 얼굴에는 왠지 모를 간절함 같은 것이 있었다. 아마도 같이 밥을 먹자는 말은 수빈 엄마에게서 나왔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재현 엄마는 봉구에게 구원 요청을 보내고 있다. 봉구는 흔쾌히 그렇게 하자고 답했다.


그날 저녁 식사 자리는 근처 쇼핑몰 안에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이었다.


“어? 여기 우리 삼촌 식당이랑 되게 비슷하다~”


레스토랑에 들어선 서린이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봉구가 보기에도 학규의 식당과 비슷한 면이 많았다. 주방에 가지런히 걸려 있는 프라이팬 하며, 여기저기 붙어 있는 토마토와 치즈 사진도 익숙했다.


“저는 토마토 파스타랑 치즈 피자 먹고 싶어요.”


서린이가 늘 먹던 메뉴를 외치자 아이들도 따라서 먹고 싶은 메뉴를 말했다.


“나는 까르보나라!”

“나는 오븐 치즈 스파게티!”


그리하여 잠시 후 식탁에는 어른들 것까지 해서 다섯 개의 파스타와 두 개의 피자가 등장했다.


ce6d9d8e-a2fb-42cc-a717-923f7be0e1dd.jpg https://wtable.co.kr/recipes/uYizd78DSG47VWqQoZEJ9Sd9#google_vignette


“이게 뭐야?”


서린이가 재현이의 파스타를 보고 물었다.


이거 까르보나라 파스타. 먹어 볼래?”

“응! 너도 내 거 먹어봐.”


서린이가 하얀 크림소스가 흥건한 파스타를 포크에 둘둘 말아 입에 쏙 넣었다. 그 순간 서린이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며 함박웃음이 떠올랐다.


“아빠, 이거 먹어봐. 진짜 맛있어!”


서린이가 다시 한번 포크에 파스타를 둘둘 감아 맞은편에 앉은 봉구에게 내밀었다. 봉구는 파스타 주인인 재현이의 눈치가 살짝 보였지만, 서린이가 내민 것을 마다할 수 없어 얼른 입에 넣었다. 부드럽고 고소한 맛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그 사이로 짭짤한 베이컨이 끼어들면서 간도 완벽하게 맞았다. 확실히 맛있는 음식이었다.


“이게 이번에 수빈이가 레벨 테스트 본 거잖아. 지난번 보다 성적이 올라서 반을 옮길 것 같아. 그래서 교재를 미리 받아봤는데 요새 영어 교재는 이렇게 생겼더라? 이걸 하면 발음이랑 단어 뜻을 완벽하게 익힐 수 있는 거지. 그래야 나중에 리스닝이랑 리딩, 라이팅까지 한 번에 쭉쭉하는 거거든.”

“그렇구나. 수빈이가 영어를 잘하네. 재현아, 밥 먹어야지.”


수빈이랑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던 재현이는 엄마의 말에 다시 포크를 들었다. 그리고는 서린이와 함께 까르보나라와 토마토 파스타를 사이좋게 나누어 먹기 시작했다. 그 사이 수빈 엄마 이야기는 영어 동영상으로 넘어가 있었다.


“이런 걸 아침에 수빈이 일어나기 전에 틀어주는 거야. 그러면 애들 귀가 확 트이는 거지. 그런데 듣기만 하면 뜻이랑 연결이 안 되니까 이렇게 영상도 꾸준히 노출을 시켜주는 거지. 자기도 한 번 해봐. 집에 틀어 놓으면 애들이 알아서 본다니까. 애들은 아직 귀가 안 굳어서 어른들보다 빨라.”


그러는 동안 봉구는 저 까르보나라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고민했다.




“야!!! 그걸 서린이한테 먹였다고??”




학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몇 달 전 봉구가 처음 요리를 시작했을 때 볶음밥을 해서 서린이와 지연에게 주었다는 말에도 저렇게 소리를 질렀었다. 얘는 왜 이렇게 요리 얘기만 나오면 화를 내는 걸까.


“나 참 어이가 없네. 네가 감히 내 조카 서린이한테 그 말도 안 되는 까르보나라를 먹였다는 거지?”


그저 학규에게 까르보나라 만드는 법을 물어보러 왔을 뿐이었다. 지금 보니 그 까르보나라가 그 까르보나라가 아닌 모양인데, 그게 이렇게나 화를 낼 일인가 싶었다.


“까르보나라라는 건 말이다, 크림이 전~혀 들어가질 않아. 그게 정통 까르보나라라고.”

“그럼 그건 정통은 아닌가 보지.”

“야!!!!!”


학규는 자신의 화를 주체하지 못하겠다는 듯 주방을 서성거렸다.


“정통이 아닌 게 아니라, 완전 야매라니까? 너 서린이한테 야매 음식을 먹이고 싶어?”

“서린이는 맛있게 먹던데?”

“그러니까!!!!”


학규가 봉구가 사 온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벌컥벌컥 마셨다. 저 자식, 말은 저렇게 하면서 아이스아메리카노는 아주 달고 살지. 그런 생각을 할 때 즈음, 학규가 다시 입을 열었다.


olena-bohovyk-GMjmcNtr9QM-unsplash.jpg 사진: Unsplash의Olena Bohovyk


“그러니까 조기 교육이 중요하다는 거잖아. 그런 근본 없는 크림 파스타를 까르보나라라고 가르치면 안 되지!”

“내가 그랬냐. 거기 식당이 그렇게 써 놓은 걸 나보고 어쩌라고.”

“다시는 가지 마.”


뭐 이런 억지가 있나. 얘가 원래 이렇게 앞뒤가 꽉 막힌 애였던가.


“그리고 조만간 서린이 데려와. 내가 진짜 까르보나라를 만들어 줄 테니까.”


그건 분명 선전 포고였다. 서린이의 미식 경험의 지평을 (잘못?) 넓힌 근본 없는 크림 파스타를 향한 선전 포고.




얼마 후 봉구는 약속대로 서린이를 학규의 레스토랑에 데려갔고 학규는 의기양양하게 까르보나라를 만들어 왔다.


Guanciale-Carbonara.jpg https://kaylamagazine.com/guanciale-carbonara/


“삼촌, 이게 뭐예요?”

“서린아, 이게 진짜 까르보나라야. 지난번에 서린이가 먹은 건 가짜 까르보나라고.”

“진짜요?”


서린이는 얼른 학규의 까르보나라를 한 입 입에 넣었다. 그 순간 봉구는 알 수 있었다. 학규가 패배했다는 것을.


“삼촌, 근데요...”

“응. 서린아. 이건 어때? 맛있지? 막 관찰레의 풍미가 느껴지지?”

“제가 관찰은 안 해봤는데요, 삼촌, 근데 삼촌은 가짜 까르보나라는 못 만들어요?


풉...!


봉구는 웃었다. 하얗게 질린 학규의 얼굴을 보며 호탕하게 웃어버렸다. 녀석, 폼은 있는 대로 잡더니. 하지만 학규는 끝까지 가짜 까르보나라를 만들어 주지 않았다. 대신 서린이가 제일 좋아하는 치즈피자를 크게 만들어 주었다.




결국 봉구는 학규에게서 가짜 까르보나라 레시피를 얻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유튜브를 찾아봐 가며 크림스파게티를 만들었고 서린이는 그에게 엄지를 세워 보여주었다. 이렇게 무사히 크림 파스타 전쟁이 끝나가나 했는데 의외의 복병은 따로 있었다. 바로 재현이가 학규의 까르보나라를 먹어 보고 싶다고 했다는 것이다.

“서린이가 그랬다던데요? 그건 가짜 까르보나라라고, 우리 삼촌이 진짜를 만들 줄 안다고.”


재현 엄마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혹시 괜찮으면 재현 아빠랑 서린 엄마까지 다 모여서 식사 한 번 해요. 지난번 돈가스 주신 것도 있고 해서 밥 한번 사고 싶었어요.”


그리하여 장장 여섯 명이 모인 식사자리가 마련되었다. 아이들을 마주 보게 앉혀 놓고 그 옆으로 어른들이 앉다 보니 이건 뭐 정략결혼시키는 부모가 된 느낌이 들긴 했지만 지연은 이런 자리가 싫지 않은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인사 한 번 드리고 싶었어요. 우리 서린이가 재현이 얘기를 얼마나 많이 하는지 몰라요. 재현아, 반가워. 서린이 엄마야.”

“저도 뵙고 싶었습니다. 아내 통해서 얘기만 많이 들어서요. 저, 재현이 아빱니다.”


재현이의 아빠는 대안학교 교사라고 했다. 원래는 재현 엄마도 교사였는데, 재현이가 조금 더 클 때까지 쉬기로 했다고 한다.


“서린이 아버님도 휴직 중이세요?”

“아니요. 전 잘렸습니다.”

“아...”


봉구의 담담한 말에 다들 할 말을 잃었지만 정작 봉구는 아주 편안하게 샐러드를 먹고 있었다.


“요새 평생직장이랄 게 없죠. 저도 언제 잘릴지 모르겠습니다.”


재현 아빠 말에 분위기가 조금 풀렸다. 그때 대망의 까르보나라가 나왔다.


“서린아, 괜찮겠어? 이거 진짜 까르보나란데?”


학규가 서운한 티를 팍팍 내며 말했다.


“네! 오늘은 재현이한테 꼭 보여줄 거예요. 재현아, 이게 진짜 까르보나라야.”


재현이는 까르보나라를 눈에 새기려는 듯 유심히 바라봤다.


“아저씨, 이거 햄이에요?”

“응. 이탈리아 햄의 일종인데, 관찰레라고 해. 까르보나라는 관찰레를 볶을 때 나오는 기름으로 만들어.”



20250108_135702.png https://smartstore.naver.com/francegourmet

(저는 위 이미지의 출처인 '프랑스구르메'에서 관찰레를 구입해 보았습니다. 아주 맛있습니다)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재현이가 드디어 포크를 들고 까르보나라를 돌돌 말아 입에 넣었다. 그리고는 꼭꼭 씹어 삼킬 때까지 한마디 말이 없었다. 그 모습을 보는 다섯 명의 어른과 한 명의 아이도 말이 없었다.


“진짜 맛있어요.”


어딘가에 홀린 듯 한 재현의 말에 학규가 제일 먼저 박수를 쳤다.


“그렇지? 맛있지? 그렇다니까! 재현이가 뭘 좀 아네!!”


그러자 재현 엄마와 아빠가 차례로 파스타를 먹어 보았다.


“오, 이거 우리가 먹던 거랑 좀 다르네?”

“그러게. 이게 훨씬 풍미가 있다.”


놀라운 건 서린이까지도 그 파스타를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서린아, 너 이거 별로라며?”


지연이 묻자 서린이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내가 언제! 그냥 삼촌한테 가짜 까르보나라도 만들 수 있냐고 물어본 거지.”


그 순간 학규는 무너졌던 자존심을 되찾았지만, 오히려 봉구의 자존심이 무너져 내렸다. 처음부터 학규의 까르보나라가 좋았다고 말했다면, 별 탈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서린이는 분명 학규의 '정통 까르보나라'를 딱히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래서 봉구는 부지런히 레시피를 찾아보았고, 몇 번의 시도 끝에 크림 파스타를 만들어 내었으며, 그 결과 서린이의 엄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랬던 서린이가 오늘은 까르보나라가 좋다고 한다.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고 했던가. 아무래도 지금 그 갈대는 재현이라는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모양이다. 중요한 건 음식의 맛이 아니었다. 재현이가 얼마나 좋아하느냐. 바로 그것이 서린이의 첫 번째 기준이다.


felipe-salgado-awqZwqtnxXE-unsplash.jpg 사진: Unsplash의Felipe Salgado

(키워봐야 소용 없...)


봉구는 헛헛한 마음에 까르보나라를 한 입 먹었다. 알단테로 익힌 파스타 면은 꼭꼭 씹어 먹는 맛이 있다.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쉴 때마다 봉구는, 어딘가 저 밑바닥에서 먼지를 일으키는 짠맛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게 관찰레라고 했던가.


그러는 사이에도 서린이는 부지런히 재현이에게 치즈 피자를 날라주었고, 샐러드 속 토마토를 골라 주었다. 그 역시 봉구가 서린이에게 해주던 일이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 유치원에서 만난 남자아이에게 음식을 덜어주는 모습을 보는 건, 관찰레만 따로 골라서 씹어 먹는 것처럼 짜디 짠 일이었다.




봉구는 인생은 아마도 까르보나라와 같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주 심플한 재료를 가지고 만들었지만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맛. 나는 다 안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알던 것과는 전혀 다른 진실을 품고 있는 맛. 몇 번의 시도 끝에 가까이 다가갔다고 생각한 순간, 관찰레라는 희한한 재료를 요구하며 휙 뒤돌아 버리는 맛.

학규에게 까르보나라는 건드려서는 안 되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정통 요리였겠지만, 봉구에게 그것은 크림을 넣든, 쏟아붓든, 어떻게든 서린이에게 맛있게 만들어 주고 싶은 요리였다. 하지만 두 남자 모두 패배했다. 그렇게 이 두 남자는 여섯 살짜리 남자아이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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