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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일 밤 동물의 숲을 하면서 운다

이게 다 해달 아저씨, 해탈이 때문이다.

by 바람부는 언덕


바다에 들어가야겠다. 제자리에서 빙그르 돌면 입고 있던 가죽 재킷이 잠수복으로 변한다. 그 상태로 바다에 들어가면 차르르 물소리와 함께 몸이 뜬다. 좀 더 깊은 곳으로 가고 싶다. A 버튼을 눌러 헤엄을 친다. 육지가 보이지 않을 만큼 깊은 곳으로 왔을 때 내친 김에 잠수를 한다. 뭔가 꿈틀꿈틀 움직이는 것이 보인다. 다가가 손을 뻗는다. 진동과 함께 두툼한 해삼이 잡힌다. 해삼은 꽤 비싼 값에 팔 수 있다. 주머니에 넣고 다시 몸을 돌려 더 먼 바다로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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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동물의 숲’이라는 게임 중이다. 이것 때문에 좀 더 놀다가 자겠다는 아이를 억지로 방에 들여보냈다. TV소리를 최대한 낮추고 닌텐도를 켰다. 의자를 가까이 당겨 앉으면 첨벙거리는 물소리가 꽤 실감나게 들린다. 다시 한 번 잠수. 이번에는 말미잘을 잡았다. 산발한 머리 같은 모양새가 영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래도 주머니에 넣어 놓는다. 여기서는 내가 잡는 모든 것이 돈이 된다.


바다 속에는 미역, 말미잘, 불가사리를 비롯해 처음 들어보는 갯민숭달팽이, 수랑, 해로동혈 등 매우 다양한 생물들이 살고 있다. 운이 좋으면 값비싼 바닷가재나 갯가재, 심지어 왕게도 잡힌다. 그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가리비다. 가리비는 1,200벨에 팔 수 있다. 8000벨을 주는 왕게나 5000벨을 주는 해로동혈에 비해 수익성이 좋은 생물은 아니다. 그럼에도 내가 가리비를 잡고 싶어 하는 이유는, 가리비를 잡으면 해달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KakaoTalk_20250215_191549091.jpg 밤바다를 누비며 가리비 찾는 중입니다


동물의 숲은 기본적으로 혼자서 하는 게임이다. 혼자 낚시를 하고, 혼자 과일을 따먹고, 혼자 농작물을 심는다. 혼자 먼 섬으로 여행을 떠나 혼자 낚시를 한다. 그래서 처음 해달을 만났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KakaoTalk_20250215_170136440_07.jpg 가리비를 잡으면 해달이 나타난다


가리비를 처음 잡았을 때였다. 보통은 얼른 주머니에 넣고 몸을 움직여 다음 사냥감을 찾는다. 그런데 그때는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방향키를 길게 밀어 봐도 꿈적하질 않았다. 얼어버린 내 뒤로 해달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곧바로 다시 잠수를 하더니 이번에는 내 가까이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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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잡은 가리비, 나한테 주게...”


강도짓도 이렇게 하면 망할 것 같지만, 여기는 동물의 숲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그에게 가리비를 주기로 한다. 다시 한 번 잠수를 한 해달이 나에게서 가리비를 가져갔다.


“근데 한마디... 해도 될까?”


뭐야, 충고 한 마디 하겠다는 거야? 나 뭐 잘못했나? 지금까지 동물의 숲에서 나하테 뭐라고 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어. 해달 아저씨, 당신이 처음이라고. 당신 말 잘못하면 나 다시는 동물의 숲 안 할 수도 있어!


나는 OK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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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상담하는 고민은

남에게 말할 수 있을 정도의 고민이다.“


오, 명언인가? 좀 멋진데? 남에게 말할만한 고민은 진짜 딱 그 정도의 고민이지. 그런데 잠깐, 이거 멋진 말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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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완벽하게 행복하며 밝기만한 동물의 숲에서, 해달은 유일하게 사유를 하는 존재였다. 나는 다음날부터 매일 밤 아이를 방으로 몰아넣고는 밤바다를 조용히 헤엄치며 가리비가 잡히기만을 기다렸다.




해달은 그 후로도 내가 잡은 가리비를 얻으러 꾸준히 나타났다. 그의 등장에 익숙해진 나는 가리비를 잡은 순간 움직이려 애쓰지 않는다. 오히려 해달이 출현하기를 느긋하게 기다리며 오늘은 또 어떤 말을 들려줄까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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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력이란 우연히 발휘되는 운세의 힘이다."

“사람의 눈물을 끌어내는 것보다 사람의 웃음을 끌어내는 것이 훨씬 어렵다.”

“말을 거는 친절함도 있고 혼자 놔두는 친절함도 있다.”

“성공은 생각하기 나름이고 실패도 생각하기 나름이다.”

"진수성찬을 대접하며 속내를 드러낸다."

"늦었다고 느꼈을 때가 진짜 시작해야 할 때이다."


마치 ‘물은 물이요, 산은 산이로되’ 같은 말들이다.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인 말들. 그런데도 나는 매일 밤 가리비를 잡기 위해 바다에 뛰어들었다.



KakaoTalk_20250215_170136440_15.jpg 쫓아가는 중

해달(게임 속에서 그의 이름은 ‘해탈이’다)은 가리비를 받고 나면 수면 위에 누워 유유히 사라진다. 한 번은 그를 따라 간 적이 있었다. 그때 이미 해달과 나 사이는 그물망으로 막혀 있었다. 그물망은 이 섬의 경계다. 해달은 그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 밖으로 나갈 수 없다. 그물망 밖으로 나간 해달은 품고 있던 가리비를 깨 먹는다. 그리고는 헤엄을 쳐 점점 멀어진다.


나는 속으로 울었다. 그 후로도 해달을 만나면 자꾸 울고 싶어졌다. 가끔은 진짜로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도 했다. 저 바다에 누워 천천히 멀어지는 그를 따라가고 싶었다. 하지만 갈 수 없다. 나는 마치 감옥 속에 있는 죄수처럼, 자유로운 해달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게임 속 나는, 내가 바라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그곳에서 나는 자유로우며,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다. 원할 때 등장할 수 있고 퇴장할 수 있다. 다른 캐릭터에게 말을 걸 수 있지만 또 하루 종일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지낼 수도 있다. 바다나 강에 낚싯대를 담그면 물고기가 잡힌다. 나무를 흔들면 과일이 떨어진다. 이걸 상점에 가져다 팔아 돈을 모으면, 내 집을 더 크고 넓게 만들 수 있다. 이것이 내가 바라는 완벽한 자유다. 내가 바라는 만큼만 일하고, 그것이 전혀 부족하지 않은 상태.


나는 매일 밤 그 안에 들어가 섬 곳곳을 누비며 봉숭아를 따고 야자수를 옮겨 심었다. 농어와 오징어를 잡고 불가사리를 잡아 팔았다. 가끔은 인심 좋은 척, 잡은 고기를 다른 캐릭터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아무리 비싼 것이라고 하더라도 처음 잡은 생물들은 반드시 박물관에 가져다 기증을 했다. 이 섬에 내가 있었음을 새기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해달을 만나고 나서야 알았다. 화면 속에서 누리던 그 자유는 가짜다. 뽀드득 눈 밟는 소리가 자꾸 듣고 싶을 만큼 실감나고, 밤하늘에 빛나는 오로라가 마치 눈앞에 있는 것 같아도 그건 가짜다. 첨벙이는 물소리는 진짜로 진짜 같았지만, 그것도 가짜다.


KakaoTalk_20250215_170136440_01.jpg 사진 속에 사진을 찍는 내가 보인다

섬 주변 그물망. 그것이 게임 용량의 한계이며, 나에게 허락된 자율성의 범위이다. 그것을 해달은 넘고 나는 넘지 못했을 때 나는 깨달았다. 진짜 문제는 이 그물망이 아니라는 것을. 문제는 게임 속 그물망을 넘지 못하는 내가 아니라, 여기 현실에 있는 내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해달은 그물망을 넘어 어디로 갔을까. 어디 몸을 숨길만한 집을 가지고 있기나 한 걸까. 매번 나에게 와 가리비를 구걸하는 걸 보면 딱히 생업에 열심인 것도 아닌 듯하다. 나는 그의 자유로움이 부럽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게임 버전이랄까.




언젠가 나도 저 그물망 밖으로 나가고 싶다. 그러려면 먼저 수영을 배워야겠다. 수영학원이 어디 있더라. 지하철 타고 갈 수 있을까? 아무래도 차를 타고 가는 게 편하겠지? 그러려면 운전 연수부터 다시 받아야겠다. 운전, 그거 무서운데. 수영을 꼭 지금 배워야 할까. 저렇게 물에 뜨는 건 오리발만 껴도 될지도 몰라.




이제 해달을 만나도 울지 않는다. 가끔 그물망 밖으로 나간 그를 오래오래 따라가기도 하지만, 이내 다시 돌아와 잠수를 한다. 뭍으로 올라와 잡은 생물을 팔고, 그 돈으로 섬에 다리를 놓는다. 언젠가는 정말로 수영을 배울 것이다. 그리고 바다에서 수영을 할 것이다. 내친 김에 잠수도 해볼 것이다. 그렇게 그물망을 조금씩 걷어낼 것이다. 어느 날 그물망 밖에서 해달을 만난다면 나도 실없는 한마디를 건넬 것이다.


“할 수 없는 것은, 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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