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도착했을 때 바람이 너무 세서 숨이 막혔다. 가게 뒤편의 좁은 방은 눅눅했고, 이모는 늘 날카로웠다. "애미앱시 닮아서 싫다." 그 말이 공기처럼 떠다녔다. 아이는 밤마다 이불속으로 숨었다. 울음이 새어나가지 않게 숨소리마저 조심했다. 눈물이 베개를 다 적셔도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래도 아이에게는 은정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은정이는 미용실 옆, 작은 돌담집에 살았다. 햇살이 오래 머무는 집이었다. 둘은 학교가 끝나면 늘 분식집으로 향했다. 컵에 담긴 떡볶이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고, 뜨거워서 입천장을 데어도 둘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입가에 양념이 묻은 것도 모르고 웃음이 이어졌다. 세상에서 가장 단순한 행복이 바로 그 안에 있었다.
주말이면 은정이네 집으로 향했다. 마룻바닥에 엎드려 만화책을 넘기고 있으면, 은정이 어머니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쟁반 위엔 딸기라떼 두 잔이 놓여있었다. "우리 딸들, 오래오래 친하게 지내라." 그 말은 달콤하게 방 안에 번졌다. 아이는 그 말이 좋았다.
이모는 여전히 날카로웠고, 말은 가시 같았다. 하지만 식탁 위에는 늘 따뜻한 밥이 있었다. 아이는 그 밥을 먹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마음 한쪽이 이상하게 놓이는 기분이었다. 말이 닿지 못한 자리를, 따뜻한 밥 냄새가 채워주었다.
제주는 아이에게 오래 기억되는 장소가 되었다. 차가운 공기와 따뜻한 숨이 함께 머물던 곳. 슬픔과 온기가 겹쳐 이상하리만큼 마음속에 오래 남는 곳. 무섭고 외롭던 날에도 웃을 수 있었던 건, 아주 작은 온기가 마음을 붙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상은 여전히 모질었고, 사람들은 여전히 제각각의 말로 상처를 주었다. 그런데도 아이는 알고 있었다. 사랑은 멀리 있지 않다는걸.
그건 어떤 깨달음도 아니었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니었다. 그저 조용히 마음에 스며드는 일이었다. 밥 짓는 냄새에 괜히 안심이 되고, 따뜻한 말 한마디에 하루가 조금 덜 외로워지는 일들. 아이는 그런 순간들을 통해 알았다. 사랑은 특별한 순간에 피는 게 아니라, 마음 안에서 서서히 자라나는 일이라는 걸.
누가 심어준 것도 아닌데, 부엌에서 새어 나오는 밥 냄새에 마음이 느슨해지고, 옆에서 터지는 웃음에 괜히 따라 웃게 되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렇게 모인 온기들이 조금씩 따뜻한 모양을 만들어갔다. 그것은 세상을 향한 마음이기도 하고, 자신을 향한 다정함이기도 했다. 사랑은 누군가에게 닿아 오는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아이 안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