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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아나 Oct 12. 2019

파도 속으로

 피아노 연주회를 앞둔 요즘의 나는 예전에 비하면 세상 돌아가는 일에 빠릿빠릿하지 않다. 뉴스로 시작해서 뉴스로 마무리하는 하루를 보냈던 때와 비교하면 당연히 그럴 수밖에. 그때는 뉴스를 참 좋아했었다. 사람들에게 뭔가 새로운 소식을 알려주는 데서 오는 뿌듯함과 특보라도 하는 날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생생하게 전할 수 있는 짜릿함도 좋았다. 그 시절에는 그랬다. 지금의 나는 매일같이 등장하는 이름들도 지겹고, 돼지열병은 좀처럼 잡히지 않아 걱정이고, 세계 경제는 더 어려워진다고 하니 미래가 암울한 것 같아 뉴스를 보는 것도 부담스럽다. 약간의 환멸도 느껴질 때도 있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피곤해지는 일들로 가득한 뉴스 세상을 외면하고 살고 싶지만, 여덟 시가 되면 어김없이 뉴스를 보기 위해 TV를 켠다.


 이제 막 기자 시험 준비를 시작한다는 학생이 “뉴스를 매일 봐야 되는 건가요?”라는 질문을 던진다. “영화감독 되겠다는 사람이 영화 안 보고 영화 만들 수는 없잖아. 기자 되려면 뉴스 챙겨 봐야죠.”라고 대답하면서도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매의 눈으로 바라보는 일이, 쏟아지는 이야기들 중에 무엇이 진짜이고 가짜인지 가려내는 일이, 그리고 그렇게 돌아가는 세상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어두운 감정들이 생기는 일이, 얼마나 피곤하고, 때로는 허탈한 일인지 말해주고 싶었다. 물론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알게 될 테지만. 모두가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하고 살고 있는데, 왜 세상 살기는 더 빡빡해지고 힘들어지는가. 뉴스를 아무리 봐도 그런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음모와 거짓 속에 온갖 자극적인 이야기들만 자리를 차지할 뿐.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인가 나는 나쁜 놈이 너무 나쁘게 나오는 드라마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세상이 너무 험악한 것 같아서. 주인공이 너무 힘들어지는 영화도 싫었다. 내가 같이 우울해져서.


 영화 ‘조커’를 보았다. 배트맨을 좋아했던 나는 조커라는 캐릭터에 관심이 있었던 데다, 평이 워낙 좋아서 보고 싶었다. ‘JOKER’라고 영화 제목이 선명한 노란색으로 화면에 나올 때만 해도 이 영화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영화는 한마디로 우울했다. 엄마와 함께 사는 조커, 아서는 정신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고, 세상으로부터 조롱과 멸시를 받는 존재였다. 그는 세상에 적응하려고 나름 애쓰지만 정상인 척 살기에는 그도, 엄마도, 세상도 정상은 아니었다. 항상 웃으라는 뜻으로 집에서는 해피라는 애칭으로 불리지만, 단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던 그에게서 시도 때도 없이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는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무엇이 사실인지, 어디서부터가 망상인지 그 경계가 모호해지는 순간, 나의 기분도 함께 추락했다. 그렇게 조커는 나를 흔들어댔다.

웃어 보지만 웃을 수 없는... 사진: 영화 '조커'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그저 영화일 뿐인데, 상상으로 만들어낸 이야기가 이렇게 힘들게 하다니. 세상의 수많은 어두운 뉴스들처럼 이 영화도 나를 흔든다. 이런 가혹한 현실에서 피아노를 친다고 뭐가 달라질까. 글을 쓴다고 뭐가 바뀔까. 유튜브는 뭐하러 시작한 것일까. 영화 보는 내내 이런 생각이 자꾸 튀어나온다. 조커를 연기한 호아킨 피닉스가 문제였을까. 그래, 그의 연기가 문제다. 그전에 했던 다른 인물들을 지워낼 만큼, 그리고 앞으로 다른 역을 어떻게 맡으려고 저러지 싶을 정도로 연기가 너무 훌륭했다. 그러니 그의 탓으로 돌려본다. 영화 한 편에 휘청거리는 나약한 내 마음 탓만은 아니라고 그렇게.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의 호아킨 피닉스, 이때도 인상적이었다. 사진:mbn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조커가 병원 복도를 걸어 나오는 장면인데, 우아하고 섬세한 그의 몸짓이 화면 전체를 압도한다. 거기에 그의 발자국에 찍힌 핏빛이 대조를 이루며 섬뜩한 가운데 하얀 복도는 눈이 부실만큼 환하게 빛난다. 세상을 환하고 따뜻하게 비출 그런 빛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우울함으로 도배된 하얀빛이지만, 거기엔 빛이 있었다. 빛이 나는, 나에게 빛나는 존재는 뭐지. 피아노가 떠오른다. 우리 집에서 제일 볕이 좋은 곳에 놓여있어서 더 그렇게 보이나. 밝게 빛나 보였던 피아노의 세계, 거기서라면 나도 함께 빛날 것 같았다.


 빛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그림자는 길게 드리운다고 그랬던가. 아름답게 빛날 거라고 믿었던 피아노의 세상도 어둠이 짙게 찾아왔다. 지난주에 나는 큰 파도를 만나 좌초될 것 같은 두려움에 떨었다. 연주회의 날은 다가오는데 아무리 연습을 해도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뭔가 정체되는 느낌. 내 한계가 여기까지인가, 도대체 연주회를 하겠다는 발칙한 생각은 어떻게 한 거지, 일을 크게 벌인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래도 다행히 구명조끼는 입고 있었다. 선생님의 도움으로, 소중한 사람들의 응원으로, 일단의 위기는 극복했다. 한숨 돌리고 나니 나를 뒤흔들었던 파도는 잠잠해져 있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파도는 다시 찾아올 것이다. 지난번에 나를 힘들게 했던 파도보다 더 센 것일지, 그보다는 약한 것일지 알 수 없지만, 다시 나를 흔들 것이다. 그렇게 파도에 몸을 맡기든, 피하든, 부서지든, 어떻게든 헤쳐나갈 방법들이 생기겠지. 이렇게 잘 알고 있는데 막상 파도가 오면 왜 또 겁이 날까. 나와는 달리 파도를 두려워하지 않는, 뱃사람은 아니지만, 파도와 친했던 사람들이 떠오른다. 예전에 내가 진행했던 ‘고향이 좋다’라는 프로그램의 리포터들인데 그들은 촬영을 위해 배를 자주 탔었다. 찍어온 영상을 보면서 저렇게 작은 배를 타면 멀미 나서 힘들지 않냐고 물어보니, 배에서는 괜찮은데, 오히려 배에서 내려오면 육지에서 멀미가 나 괴롭다고 한다. 


 육지 멀미라... 불혹이라는 나이지만 작은 자극에도 흔들리는 나를 돌아본다. 지금보다 세월이 더 흘러 흔들리던 배에서 내려와 땅을 밟으면 어떨까. 진정한 마음의 평화가 찾아올까. 육지에서 멀미를 느꼈던 리포터들처럼 너무 잔잔한 나머지, 지루하다 못해 괴롭지 않을까. 지금도 가끔은 그런 기분이 드는데 삶이 헛헛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흔들리는 파도에 몸을 맡겼던 과거의, 아니 젊음의 혼돈의 시간들이 그리워질 날이 오지 않을까.


 어쩌면 지금 경험하고 있는 것이 육지 멀미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미 배에서 내려와 육지에서 파도치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것 뿐인데, 겁을 먹었다. 진짜 파도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한걸음 물러나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움찔하고 있는 것인지도. 그래, 그런가. 그렇든 아니든 세상의 파도로부터 도망쳐 온 나는 이제 다시 세상으로 나갈 수 있는 큰 파도를 기다리는 서퍼였으면 좋겠다. 그렇게 오늘도 흔들리는 바다에 진정 몸을 맡겨보길, 그것 또한 기다린다. 

사진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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