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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아나 Oct 25. 2019

조금 이르게 돌아보는 2019

 지갑을 열다가 뭔가 툭하고 떨어진다. 꼬깃꼬깃하게 반으로 접힌 작은 종이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당신이 원하는 그것이 먼 길이든, 험한 길이든 무엇이든지 해낼 수 있다는 열정을 가지고 있으니 결국 얻게 될 것입니다. 시간은 당신의 편입니다.” 1년 전 즘인가, 책을 샀는데 그 책 안에 포춘 쿠키 속에 숨어있는 종이처럼 이 말이 꽂혀 있었다. 나를 위한 맞춤형 문구인 것 같아 뭔가를 이뤄내는 날에 꼭 다시 펼쳐봐야지 하고 보관해 두었는데, 갑자기 내 눈 앞에 나타났다. 아직 그때가 오지 않았지만.

 10월 말에 접어들었으니 올해도 얼마 남지 않은 시점. 11월 23일에 연주회가 있는 나는 마치 그날이 올해의 마지막 날인 것 같은 느낌이다. 올해는 이 연주회만 보고 죽 달려왔기에, 연주회가 끝나면 동시에 한해도 마무리된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인가 보다. 그러니 내게 올해는 이제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그래서인가. 떨어지는 나뭇잎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미리 찾아온 연말 감성에 마음이 쓸쓸해, 작년 이맘때 쓴 브런치의 글을 찾아보았다. 그때의 나는 뭐라고 썼을까. 어떤 생각을 하고 살고 있었을까.


 작년 가을에 나는 영화 ‘체실 비치에서’를 봤다. 막 결혼식을 올린 두 남녀 앞에 펼쳐질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을 다룬 영화이다. 그리고 “가보지 않은 길”이란 제목의 글을 썼다. 영화 속 체실 비치 앞의 그들도, 글을 계속 써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했던 나도, 그리고 내 선택에 확신이 가지 않아 망설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가보지 않은 길’은 늘 두렵고, 늘 미련에 남는다. 그때 나는 글 쓰는 일이 힘들기도 하고, 큰 재능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아 고민이 많았었다. 그 고민은 여전하지만. 당시 팟캐스트도 만들었었는데, 기대했던 것보다 잘 되지 않았고, 시간과 노력만 쓸데없이 들어가는 기분이 들어 어떻게 접어야 되는지 그것 역시 문제였다. 한마디로 가성비가 떨어진다고 생각했었다. 그때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무작정 투자를 하는 게 맞는지, 회사를 그만둔, 몇 년 전의 나의 지난 선택부터 잘못된 것이었는지 머릿속이 좀 복잡했었다. 이렇게 끝까지 갔는데 막다른 길이 나타나고, 거기에 유턴 표시가 나오는 건 아닐까 하면서.

 

영화 '체실 비치에서' 도 다시 보고, 내가 쓴 '가보지 않은 길(2018.10.19)'도 다시 읽고. 사진 : 씨네 21

 그때도 몰랐지만, 지금도 여전히 그 답을 모르는 것이 확실하다. 나는 유튜브 채널(레가토 by박소현, 구독 부탁합니다만)을 지난달에 시작했는데, 굉장히 익숙한 고민들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래, 팟캐스트 때도 생각이 많았었지. 그때 그렇게 머리 아파하더니 그새 잊고 또 뭔가 일을 벌였다. 인간이란 망각의 동물, 지난번의 실수는 금방 지워내지. 거기다 근자감까지, 이번에는 잘 해낼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쓸데없이 불타오른다. 아직은 뭐라 판단하기에는 너무 이르지만, 그걸 알면서도 괜한 조바심이 생기는 성격 급한 나지만, 일단은 긍정적인 마음으로 구독자수가 많이 늘어나기를 기대해 본다. 또 다른 가보지 않은 길에 들어선 나의 여정은 그야말로 이제 막 시작이니까. 그냥 천천히 걸어보자고.


 걷는 게 좋은 건지, 계속 걷다 아니, 쓰다 보니 여전히 그 길 위에 서 있다. 글이 조금 나아졌으려나. 그랬으면 진심 좋겠다. 뭐 큰 변화는 없지만, 그래도 얻은 것들이 분명히 있긴 하다. 먼저 글 쓰는 일이 예전보다 편해졌다. 영감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던 때에 비하면 조금은 수월해졌다. 수정과 퇴고의 과정은 괴롭지만 그 덕분에 생각도 잘 정리되고, 말도 더 술술 나온다. 사람들 앞에서 말할 기회가 줄어들긴 했지만, 한창 방송했을 때보다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나라는 사람에 대해서도 더 잘 알게 되었다. 글에서도 드러날 테니, 구독자분들도 나만큼이나 짐작하고 있으리라. 내가 하는 일들이 가성비로 평가할 일들이 아니라는 것도 깨닫고 있다. 이것은 다른 영역이다. 그러니 조급해할 일이 아니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서도 빛을 발할 날이 빨리 오기를 고대하고 있긴 하지만.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 했던가. 쓰는 대로 이루어진 것도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퇴사 이후 이런저런 도전을 시도하면서 나는 ‘도전’에 대한 글을 많이 썼고, 그래서인지 아직도 계속 도전을 하고 있다. 그야말로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처럼 ‘가지 않은 길’로 계속 내달리고 있는 것이다. 솔직히 작년 가을만 해도 피아노 연주회를 하게 될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는데, 이제 연주회까지 한 달이라는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아... 정말 쓰는 대로 되는 인생이라면, 이제부터는 ‘성공’ 스토리만 쓰면 성공하는 건가.  그래, 그런 성공 스토리를 쓰려면 연주회부터 잘해야겠지.

오랜만에 만나보는 처진 달팽이 버전 '말하는 대로'. 가사가 예술이죠. 사진 : 이데일리

 아침에 피아노 연습을 하고 있는데, 라이브 방송을 해볼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연주회 전에 어디서든 사람들 앞에서 연주할 기회가 있으면 해 보라는 피아노 선생님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진짜 사람들 앞도 아니고, 내 집에서 편히 치는 거니 뭐가 어렵겠냐는 마음으로 라이브 방송 연결을 확인한 뒤 바로 연주를 시작했다. 자신 있게 첫음을 누른 나는 순조롭게 연주를 이어갔다. 그러다 잠시 방심했을까. 집 밖에서 들려오는 소음 때문일까. 순간 삐끗하더니만 그때부터 멘털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라이브를 보러 들어온 사람들이 메시지를 올리고 있는 것도 곁눈질로 보일 정도로 집중력도 흐트러졌다. 뭔가 긴장이 된달까. 손가락도 함께 미세하게 떨린다. 흔들리는 마음을 간신히 부여잡으니 연주는 끝나 버렸다. 방송을 끄고,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많은 생각이 오간다. 부정적인 생각들은 빨리 떨쳐버려야 한다. 처음이니까, 라이브 방송도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서 그랬다고 믿자.

 

 삼십 분 뒤에 라이브 방송에 다시 도전했다. 요즘 유튜브 촬영 때문에 가로 본능에 충실했는지, 세로로 돌려서 찍지 않은 게 일단 마음에 걸렸다. 이건 핑계고, 떨리는 건 자꾸 해봐야 긴장도를 줄일 수 있을 것 같아 한번 더 시도한 것이다. 그보다 더 결정적인 이유는 처음에 했던 연주에서 나는 연주에 집중하지 못했고, 그래서인지 연주가 즐겁지 않았다. 두 번째 시도에서는 가능하다면 좀 더 집중을 해서, 연주에 몰입했을 때 느껴지는 희열을 경험하고 싶었다. 기대했던 희열은 희미하게 스쳐 지나갔지만, 그래도 처음보다는 긴장이 좀 풀렸고, 중간중간 집중되는 구간도 생겨서, 결과적으로 다시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긴 한다.


 재시도에서 조금 나아졌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라이브 방송에서 나의 연주는 별로였다. 많은 사람들이 보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한편으로는 정말 잘할 거라고 생각한 나 자신이 순진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글 쓰는 일도 어려운데, 피아노는 또 얼마나 어렵겠나. 이왕이면 멋지게 연주하고 싶은 것은 너무도 당연한 마음이지만 마음이 앞서면, 너무 기대가 크면, 부담만 커질 뿐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연주회까지 그동안 해오던 것처럼 충실히 연습하면 된다. 너무 잘해야겠다는 마음은 내려놓고. 그것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가지 않은 길은 늘 두렵고 겁이 난다. 그럼에도 그 과정에서 분명히 얻는 것들이 있다. 그게 바로 가지 않은 길을 걷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내가 피아노 연주회에 도전하게 된 이유도 연주회를 준비하는 그 과정에 있을 테니까. 시간은 당신 편이라고 했다. 지금 간절히 바라는 뭔가가 있는 것만으로도 시간은 이미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 이 말은 가끔씩 떠올려봐도 괜찮겠지. 2019년을 떠나보내기엔 조금 이른 오늘을 천천히 걷는 나도, 당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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