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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아나 Dec 23. 2019

박아나의 일상뉴스

바람의 노래, 하와이

 열아홉 시간을 뒤로 돌리면 그곳의 시간이다. 열아홉 시간이 어디서 뚝 떨어졌으니, 그 핑계로 조금 느긋하게 지내도 될 것 같은 곳에 왔다. 반대로 돌아갈 때는 도둑맞은 기분도 들지만, 그것은 그때 가서 생각할 일이다.  여기서는 그저 마음 가는 대로, 발 닿는 대로 시간을 보내면 된다. 아니, 그렇게 해야 될 것 같다.

 오랜만에 하와이, 오하우섬에 다녀왔다. 그러고 보니 오하우는 내게 첫 해외 여행지였다. 처음 나간 외국이니만큼 강렬한 기억이 남을 법도 한데, 의외로 없다. 그것은 시차 때문이다. 시차라는 것 자체를 처음 경험한 그때의 나는 시도 때도 없이 졸았다. 숙소에서도, 관광을 위해 이동하는 차 안에서도, 그 어디에서든 잠이 쏟아졌다. 폴리네시안 센터에서 훌라춤을 췄는지, 파인애플 농장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었는지, 다이아몬드 헤드에 올라가긴 한 건지, 꿈인지 현실인지, 기억이 날 듯 말 듯하다.


 계속 병든 닭처럼 있었다고 해서 하와이가 별로라는 뜻은 아니다. 정말 별로라면 이십 년도 더 지난 지금 여기에 내가 다시 있을까. 뭐 그때만큼은 아니어도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사이 여러 시차를 많이 경험했고, 심지어 뉴욕에서 살았어도, 이제는 ‘나이’라는 다른 이유로 시차 적응이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다행히 이번 여행의 대부분의 시간은 해변의 선베드에 누워 지낼 생각이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말하자면, ‘느긋한 나’가 이곳의 콘셉트이다. 비록 새벽에 눈이 번쩍 떠져 현실의 걱정들이 하나둘 머릿속을 헤집고 들어오긴 했지만, 그 정도쯤이야 바닷가에서 멍 좀 때리면 날려버릴 수 있겠지. 

 느긋한 하와이의 내가 그동안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게 했던 게 있었다. 바로 하와이의 날씨였다. 처음 찾았던 이십몇 년 전에도 날이 좋았고, 그 이후에 왔을 때도 계속 좋았다. 이번에 알았다. 12월의 하와이는 바람이 주인이었다. 체조선수처럼 유연한 야자수가 아니라면 거친 바다 바람에 버틸 수 있을까. 미친 듯이 부는 바람에, 그 바람과 함께 날아오는 모래에 맞으면 아프긴 하더라. 

 하와이로 향하는 비행기에서도 바람과 함께이긴 했다. 난기류에 비행기가 흔들릴 때마다 겁을 내는 내게 이번 비행은 기나긴 공포의 시간이었다. 불안한 마음을 없애기 위해 <걷는 사람, 하정우>를 읽기 시작했는데, 하루에 삼만보는 기본으로 걷는다는 걷는 사람, 하정우는 난기류를 두려워한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같은 두려움을 갖고 있는 사람의 글을 읽는다는 게 이렇게 위안이 될 줄이야. 매번 난기류를 극복하고 찾는 하와이에서 그는 걷고 또 걷는다고 했다. 그래, 나도 한번 걸어볼까... 했지만 나란 사람은 누워있는 사람이었다.

하와이에서도 역시 걷는 배우 하정우 씨 사진 :독서신문(문학동네 제공)

 그렇다고 계속 쉬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거친 바람은 나의 마음에도 바람을 일으켜 영화 <Jurassic Park>를 찍었던 쿠알로아 랜치로 향하게 했다. “하와이만큼 아름다운 바다를 가진 곳은 없어요. 특히 83번 해안도로는 최고예요. 바다 바로 옆에 산도 있잖아요.” 현지 가이드의 말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무지개색으로 빛나는 바다가 질리면, 영험한 기운이 감도는 산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쿠알로아 랜치 안, 높은 언덕에서 바다를 내려다본다. 지금 내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12월의 하와이 바다에는 특별한 손님이 있단다. 바로 고래들이다. 알래스카의 추위를 피해  따뜻한 하와이의 바다로 새끼를 낳으러 몰려든다. 여기에 또 바람이 있다. 바람은 고래의 여행이 힘들지 않게 속도를 높여준다. 그리고 새끼 고래를 낳는 어미 고래의 절규가 새어 나오지 않게 쉴 새 없이 파도를 일으킨다.

랜치(목장)에서 바라본 83번 도로와 바다

  랜치를 투어하고 돌아오는 길, 해는 저물고 있다. 83번 해안 도로 왼편의 바다만큼이나 가깝게 닿아있는 오른편의 산들이 절경이다. 이 섬의 이야기를 오롯이 새긴 듯한 주름으로 가득한 산 위에 모여든 구름이 인상적이다.  하와이 섬사람들의 절망들을 모두 품어버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구름들이 산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다. 이 또한 바람의 힘. 바람만이 이곳에 숨겨진 비밀스러운 이야기들을 듣고 있으려나. 

 바람의 절정을 경험하고 싶다면, 오하우 섬 북쪽 해변인 노스 쇼어로 가야 한다. 큰 서핑대회 때문에 노스 쇼어로 가는 길은 정체가 심해 이번에는 가다가 포기했다. 아쉬운 마음에 서핑 중계를 TV로 본다. 햇볕에 그을려 건강해만 보이는 베테랑 서퍼의 몸은 성치 않았다. 서핑을 하면서 입은 이런저런 상처 때문이다. 저렇게 높은 파도를 겁 없이 올라탈 수 있을까 대단해만 보였는데, 모든 위대함 뒤에는 아픈 과정이 존재한다. 너무 당연하게도.

노스 쇼어 선셋 비치에 밀려오는 파도. 지난번 여행 때 찍어둔 사진이 있었다. 

 서퍼들이 타는 큰 파도처럼 우리 인생에 쉴 새 없이 휘몰아치는 바람에 우리는 흔들린다. 때론 무너지고, 때론 버텨내면서 그렇게 바람을 타고 살아간다. 거친 바람에 너무 아프지는 않기를, 힘들었다면 그 아픈 기억은 바람에 날려 버리기를, 그런 바람을 가져본다. 그리고 그 바람 덕에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기를. 


 바람이 분다, 아니 노래한다.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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