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아나 Dec 29. 2019

박아나의 일상뉴스

2019와 2020 사이에서

 새해가 얼마 남지 않았다. 작년에 브런치에 이맘때 올렸던 글의 제목은 ‘나이아가라’였다. 나이 먹는 게 꽤나 싫었었나 보다. 격렬히 저항하고 싶지만 저항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게 된, 저항할 힘도 빠져버린 나는 한 살을 무던하게 받는다.

2018년 12월 28일에 올렸던 글 <나이아가라> 그러나 나이는 가지 않았다. 사진 : 한국경제

 서점에 갔다. 올해는 영어와는 아예 손절했는데, 내년에는 다시 친하게 지내야 될 것 같은 압박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뭐든 새로 시작하려면 준비가 필요한 법. 영어 공부에 도움이 될 만한 책을 고르고 있는데, 의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두 유 라이크 잉글리시?” “네? 저... 요?” 다행이다. 내가 아니라 내 옆에 있는 아이들과 함께 온 엄마에게 한 이야기였다. 난데없는 영어에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니까, “이런 책 다 필요 없고, 영어 영상 계속 틀어놓으세요. 책 살 필요 없어요.” 어렸을 때 부모님이 영어 방송을 계속 들려주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영어에 입문하게 됐다는 의문의 목소리는 반쯤은 영어로, 반쯤은 한국어로 영어 공부 팁을 전수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영어 교육이 일본의 영향을 받아 잘못된 것이라며, 글로 배우는 영어는 소용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행여나 내게도 말을 걸까 봐 급히 자리를 피한다. 그리고 한참 뒤에 내 손에는 영어책이 들려 있었다. 내가 영어를 여전히 잘 못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걸까. 늘 그래왔듯 영어 공부는 새해 결심으로 자동 등록된다. 떠밀려서 하는 느낌은 그냥 기분 탓이겠지. 아무도 시킨 사람은 없으니까. 


  뭔가를 계획할 수 있는 나이가 된 이후로, 거의 사십 년 가까이, 새해의 결심을 해왔다. 매년 성공률이 그리 높은 편은 아니지만, 올해를 돌아보면 피아노 연주회의 꿈은 이루었다. 이제껏 꿈꾸지 않았던 꽤나 참신했던 소망이기 때문에 이룬 것일까. 그동안 지루할 정도로 반복되는 소망들, 예를 들면 앞에서 언급했던 영어 공부라든지 체중감량, 아침 독서 같은 것들은 십몇 년 전에도 리스트에 있었다. 그냥 목록을 채우려고 써놓은 말인건지, 우선순위에서 밀려서 그런건지 여전히 그 뜻을 이루고 있지 못하다. 어떻게든 이루겠다는 마음이 절실하지 않아서가 가장 큰 이유겠지만. 


 솔직히 요즘의 나는 늘 해오던 새해 결심 따위는 그냥 접어두고 싶다. 11월에 이미 준비한 내년 플래너는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은 지 오래다.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깨끗한 상태로 말이다. 친구가 새해 복 많이 받으라며 보낸 이모티콘 문구에 '새해에도 달리자' 한다. 나는 제법 진지하게 묻는다. “꼭 달려야 되나?” 이 정도면 의욕이 떨어진 게 맞는 것 같다. 앞으로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연말 시상식의 단골 멘트처럼, 누르면 자동으로 나오는 나의 새해 결심과 소망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는가. 뭔가 나사가 하나 빠진 느낌이다. 자괴감이 든다.

카톡 대화 내용. 친구야 미안^^

 리셋 차원에서 지난주에 다녀온 휴가는 꿈이었나 보다. 살짝 그을린 피부만이 내가 휴가를 다녀왔다는 유일한 증거일 뿐. 일상으로 돌아온 나는 매일 피아노 앞에 앉는 일이 다시 어려워졌다. 연주회를 준비할 때는 피아노 연습을 하지 않으면 오히려 불안했었는데, 지금은 피아노 앞에 앉기까지 시간이 엄청 걸린다. 게다가 요즘 새로 시작한 쇼팽의 녹턴은 보기보다 어렵다. 악보는 그렇게 복잡하지 않은데, 그 느낌을 표현하는 게 만만치 않다. “절절한 곡을 절절하게 연주해야 되는데, 그렇게 되지 않아 제 마음이 절절해요. 그래서 슬퍼요.” 레슨 중에 선생님에게 절절한 내 마음을 고백해 본다. “쇼팽이라면 흔히들 연주하지만, 기교적으로 복잡한 프로코피예프보다 쇼팽이 더 소화하기가 어려워요.” 그렇다. 피아노 친다 하면 쇼팽의 곡들은 기본으로 연주되지만, 쇼팽을 잘 소화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커피숍에서 카페 라테는 흔히 시키는 메뉴지만, 우유가 들어간 라테를 모두가 잘 소화시킬 수 없는 것처럼 , 마신다고 다 소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랫동안 묵혀둔 새해 결심들도 그렇다. 

사진 보니까 까페 라테 마시고 싶네요^^ 사진 :소믈리에타임즈

 늘 뭔가를 꿈꾸고, 목표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가야 되는 것은 아니지만, 갑자기 텐션이 떨어지니까 불안한 마음이 든다. 피아노 연주회에 쏟아부었던 나의 열정은 갈 곳을 잃고 방황하고 있다. 어쩌면 그때 그 불타오르던 열정은 일회성이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뭐가 됐든 지금은 바닥난 것 같다. 이런 내용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는 브런치 글을 쓰고 싶지 않았지만, 내 생각과 감정을 숨기기는 어렵다. 작년에 썼던 ‘나이아가라’에서는 의욕이 그렇게 넘치더니, 1년 사이 이렇게 바뀔 줄이야. 하긴 내가 인공지능 로봇도 아니고 인간인데,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는 거지, 뭐.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잠시 쉬어가는 시간이라고 생각해볼까. 


 올해가 지나간다고 해서 너무 다른 내년이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그저 긴 시간의 흐름 속에 작은 점을 찍는 것일 분, 우리의 시간의 계속 이어진다. 나중에 돌아보면 그 작은 점들은 보이지도 않을 텐데, 그 점들에 연연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작년에 썼던 글을 되새김질해본다. 지금 보니 낯설지만, 그때의 나는 그랬다. 지금의 나는 또 이렇지만, 내일의 나는 또 어떨지. 만약 그럴 수 있다면 그 어떤 ‘나’이든 너무 연연하지는 말기를, 2019년과 2020년 사이에 조심스럽게 빌어본다. 

2019와 2020사이에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사진 : 독서신문

 










작가의 이전글 박아나의 일상뉴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