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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아나 Apr 13. 2018

박아나의 일상뉴스

안경선배, 안경앵커

 나는 안경을 쓸 필요가 없어 몰랐다. 그래, 그러고 보니 안경 쓰고 진행하는 여자 뉴스 앵커는 없었지. MBC 후배인 임현주 아나운서가 안경을 쓰고 뉴스를 진행한 것이 화제다. 안경 한 번 썼을 뿐인데... 본인도 이렇게 많은 관심을 받게 될지 몰랐을 것이다. 흔하디 흔하게 안경을 쓰고 진행하는 남자 앵커들 사이에서 안경 쓰고 뉴스 진행한 여자 아나운서가 검색어 순위에 오르는 것도, 그리고 그 기사를 보고 신선하다고 생각한 나도, 아직 갈 길이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안경 진작 쓸 걸 그랬어요! 사진:뉴스인사이드

 뉴스를 진행할 때는 프롬프터라는 것에 의지하게 된다. 앵커를 비추는 카메라 렌즈에 뉴스 원고를 띄워주는 장치가 바로 이 프롬프터인데, 이 프롬프터 덕분에 앵커들은 고개를 숙이고 종이 기사를 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뉴스 기사를 읽을 수 있다. 내가 막 입사했을 때는 이 프롬프터 시스템이 제한적이어서 앵커 멘트가 따로 없는 스트레이트 기사를 처리해야 하는 경우에는 앵커 얼굴에서 기사 영상으로 넘어가기 전까지 두세 줄 정도를 외워서 진행해야 했던 시절도 있었다. 그래, 그때는 뉴스 준비하면서 기사 외우는 게  일이었지... 그러나 뉴스 진행하다 보면 순서가 바뀌는 경우도 있고 기사가 빠지는 경우도 있어 그런 경우 방송 사고의 위험이 있고, 두세 줄이었지만 기사가 많아서 외우는 게 쉬운 일은 아니어서,  나중에는 모든 뉴스에 대해 프롬프터가 제공되게 되었다. 물론 엄청 편해졌지만, 프롬프터도 100% 믿으면 안 된다. 갑자기 작동이 안 되는 경우에도 대비해야 하기 때문에 예전처럼 기사를 외울 필요는 없지만, 대략적인 내용은 파악하고 있어야 실수가 없다.

 

뉴스용 프롬프터, 사진:cjmediamall

 여하튼 이 프롬프터에 뜬 기사를 읽으려면 시력이 좋아야 한다. 카메라는 앵커와 거리가 좀 떨어져 있기 때문에 시력이 별로 좋지 않으면 맨눈으로는 글씨가 잘 보이지 않는다. 내 시력은 1.0 정도인데, 만약 여기서 좀 더 시력이 떨어진다면 눈에 힘을 팍 주고 인상을 써야 글씨가 보이지 않을까 싶다. 물론 요청에 따라 카메라의 위치를 조금 더 가깝게 바꿀 수는 있지만, 그렇게 되면 프롬프터를 읽기 위해 눈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움직이는 게 너무 티가 날 수도 있다. 그러니 일정 거리 이상 가까워질 수는 없어, 시력이 나쁜 사람은 렌즈를 쓰든 안경을 쓰든 뭔가 보조 장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뉴스의 생명은 정확성이다 보니 행여라도 눈이 잘 안 보여서 사람 이름이라도 틀리게 읽으면 문제가 생길 수 있지 않은가?  일단 눈은 잘 보이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많이 보다시피 남자 앵커들 중에는 안경 쓰는 사람이 많고, 여자 앵커들은 안경 대신 렌즈를 착용한다. 


 그러나 이 렌즈, 만만치는 않다. 렌즈를 평소에 사용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장시간 착용하면 눈이 건조해지고 뻑뻑해진다. 눈이 좋은 나도 한때 유행했던 컬러 렌즈를 착용한 적이 있다. 부끄럽지만 눈이 더 커 보였으면 좋겠다는 바람에서 사용했었는데, 데일리 뉴스를 할 때 반년 정도를 매일 사용하고 나니 눈이 건조해지고 빨개지는 현상이 생겨서 결국은 다 버렸다. 임현주 아나운서 같은 경우는 아침 6시에 시작하는 뉴스를 위해 새벽 서너 시 사이에 기상해서 출근을 하게 되는데, 그 이른 아침마다 렌즈를 착용하면 얼마나 눈이 더 힘들까 싶다. 몸도 피곤한데 눈도 피곤하고, 아마 피로감이 훨씬 더 했을 것이다. 게다가 뉴스 스튜디오는 조명이 강해서 빛을 거의 정면으로 쳐다보고 있는 격이니 눈이 부시고, 당연히 눈에도 부담이 된다. 현실적인 이유에서 안경을 썼다는 임현주 아나운서의 말에 공감이 간다.  

예전에 뉴스 진행했을 때 사진, 조명은 거의 직사광선 수준이다.

 예전에 아침 라디오 뉴스를 진행할 때 일어났던 일이다. 아침 7시 라디오 종합 뉴스인데, 이 뉴스는 남자 아나운서와 여자 아나운서가 번갈아 가며 공동으로 진행한다. 그날 담당은 나였는데, 남자 아나운서가 도저히 그 시간에 진행을 할 수 없는 사람으로 배당되어 있었다. 하필 그 아침에 나와있는 남자 아나운서도 아무도 없어서 그야말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방송 시작 5분을 남겨두고 결단을 내려야 했다. 나는 아나운서국에 있던 여자 후배와 함께 라디오 스튜디오로 올라갔다. 나는 남자 부스로, 여자 후배는 여자 부스로 각각 들어가, 나는 마치 내가 남자 아나운서인 것처럼 약간 저음으로 -원래도 저음이지만- 진행을 했고, 여자 후배는 여자 아나운서의 역할을 그대로 진행했다. 별문제 없이 뉴스는 끝났지만, 여자 둘이 뉴스를 진행한 게 문제가 되었다. 아니 사람이 없으면, 그냥 혼자서 쭉 진행하지, 왜 너는 남자 아나운서 역할을 했냐며, 한소리를 들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덤 앤 더머라는 별명을 하나 얻고 그냥 웃고 넘어가기는 했다. 나와, 끌려와서 뉴스를 한 후배 중에 누가 덤이고 더머인지는 판단에 맡기겠다.   

설마... 이런 이미지? 리얼 덤 앤 더머. 사진:마이데일리

 안경 쓰고 뉴스 진행한 후배 때문에 이 바보 같은 에피소드가 떠오를 줄이야... 뉴스에 꼭 남자 아나운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나도, 그리고 여자 아나운서 둘이 진행하는 뉴스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그 당시에는 융통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 융통성 부족 이면에는 남자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이 숨어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남자 아나운서가 없으면 당당히 내 톤으로 뉴스를 하면 될 일이었고, 또 여자 아나운서 둘이 뉴스를 진행하면 어떤가? 그럴 수도 있지!  뭐, 여하튼 MBC 라디오 종합 뉴스 역사에 여자 아나운서 둘이 진행한 경우는 내 이전으로도 내 이후로도 없다고 하니, 본의 아니게 금기를 깬 것이다. 정말 어쩌다 보니 말이다. 

이 내용에 꼭 필요한 사진은 아니지만, 그냥 좋아서! 사진: 시사위크

 요즘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라는 드라마를 보고 없던 연애 세포도 꼼냥꼼냥 되살아 난다는 사람들이 많다. 연하와 사랑에 빠지고 싶은 누나들의 로망을 그렸다고만 보기에는 현실을 많이 반영한 드라마가 아닌가. 실제로 내 주변에도 연상 연하 커플이 많다. 그러나 뉴스 진행에는 아직 그런 현실이 적용되지는 않은 것 같다. 남자 앵커에 비해 여자 앵커가 젊은 게 당연하고, 우리 눈에 익숙한 구도니까. 그렇지만 세상은 바뀌고 있고, 우리의 인식도 달라지고 있다. 안경 쓴 여자 앵커의 모습에도, 나이가 더 많은 여자 앵커와 더 젊은 남자 앵커의 조합도 그리 신선하지 않은 그런 날이 오지 않을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그런 사실에 신경조차 쓰지 않는 날도 오지 않을까? 언젠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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