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노멀의 뮤즈란 무엇인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테넷>을 이제야 봤다. 무려 10년 전에, 놀란 감독의 영화 <인셉션>을 미국에서 봤었는데, 영화를 보고 나서 도대체 내가 뭘 본거지? 했던 기억이 여전하다. 영어 대사를 알아듣느라 더 어렵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영화가 솔직히 어려웠다. 거기에 영화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내 모습에 약간의 충격을 받기도 했었다. 생각해 보면 언제부터인가 그런 영화들이 조금씩 늘었다. 특히 물리학, 우주, 미래... 뭐 이런 개념들이 막 튀어나오는 영화들은 나를 피곤하게 만든다. <인터스텔라>가 떠오른다. 역시나 놀란 감독의 영화다.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세상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데 영화가 많은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놀란 감독의 영화처럼 시공간을 뛰어넘는 영화들은 너무 어렵다. <백 투 더 퓨쳐> 같은 영화를 보며 웃고 즐기던 시절이 좋았던 건가.
이번 영화, <테넷>도 어렵다는 평을 이미 많이 들었고, 매번 당하는 놀란 감독의 영화인지라 영화 보기를 계속 미루고 미뤘다. 그렇게 버티다가 추석 연휴가 끝나면 극장에서 영영 못 보는 게 아닌가 싶어 결국 영화관으로 향했다. 중반부까지는 생각보다 괜찮았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과거와 미래를 왔다 갔다 하는 장면들이 많이 나오면서 내 정신도 오락가락해졌다. 복잡한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영화에 몰입했더니 3시간 가까이 되는 영화가 순삭으로 끝났다. 중간중간 뭐지? 하고 아리송한 부분들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전반적으로 잘 이해한 것 같아...라고 생각했었는데, 이것저것 질문하는 옆사람에게 내놓는 답이 영 시원찮다. 질문이 계속될수록 역시 난 놀란 감독 트라우마가 있는 게 틀림없음만 깨닫는다.
머리를 써야 하는 어려운 영화에서 영감을 받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내가 어려워하는 놀란 감독의 영화지만, 큰 스크린에서 영화를 보면 새로운 영감들이 막 쏟아질 줄 알았다. 코로나 때문에 오랜만에 찾은 영화관이었는데, 영감보다는 좌절이 밀려왔다. 지금의 현실도 이해하기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데, 그런 지금의 세상을 반영한 앞으로의 영화는 얼마나 더 어려울까. 놀란 감독이 영화에서 그린 세상이 현실이 되면 어떡하지. 늘 영화는 미래의 모습을 그려왔고 아주 똑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일들이 일어났으니까. 놀란 감독의 영화뿐 아니라 많은 영화들이 보여주는 미래는 늘 어둡잖아.
그래도 내게는 미술관이 남아있다. 그림에 관심이 많은 나는 미술관 가는 것을 아주 좋아하는데, 평소에 내가 잘 느끼지 못하는 신선한 자극 때문이다. 어떤 한 단어로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조금은 나른하기도 하고, 때로는 격렬하기도 한 그런 감정들이 전해질 때면 내가, 내 감정이 살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자주 놓치지만 매서운 관찰력을 지닌 작가가 묘사한 그림들을 보면 새로운 영감도 떠오른다. 그런 이유로 미술관에 가는 것을 좋아하지만, 이 즐거움을 누리는 것도 이젠 호사다. 코로나로 휴관하는 경우도 많고, 크고 작은 기획들이 무산되는 경우도 많아서다.
최근에 이태원에 갔다가 미술관에 들렀다. 그날따라 관람객이 나밖에 없어 더 고요한 미술관 특유의 분위기가 나를 손쉽게 무장해제시킨다. 여러 작품들을 둘러보다 독일 작가 Tim Eitel의 Interior(Passage),2020을 마주하게 되었다. 미술관을 찾은 한 남자가 유심히 그림을 보고 있고, 그 옆을 은발의 중년 여성이 지나고 있는 순간을 포착한 그림이었다. 두 사람은 같은 공간에 있긴 하지만 각자 다른 방향을 응시하고 있다. 한 명은 가만히 서서 그림을 보고 있고, 한 명은 그를 등지고 무심히 걸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봐도 둘은 연결관계가 전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둘 사이의 분절된 선들도 그렇고. 그렇다면 작가는 현대의 외로움이나 고독함 같은 감정들을 표현했을까.
그러나 계속 그림을 들여다보니, 외로운데 외로워 보이지 않고, 고독하지만 고독해 보이지 않았다. 이 그림은 그저 지금의 우리의 모습을 정확하게 묘사해낸 것이다. 외로움 같은 구식 감정들은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각자의 삶이 있는 것은 당연하고 서로에게 무심한 것이 현대의 삶 아닌가. 아니 지금 이 시점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더 분명해진 뉴노말의 삶 말이다. 옛날 사람인 나는 옛날의 감정들을 자연스레 떠올리지만 그것은 그저 옛날의 것일 뿐. 지금 뉴노말의 시대에는 상황도, 감정도 모두 달라졌다. 사실 그런 변화는 코로나 이전에도 있었다. 그때는 다만 내가 직접 경험할 일이 많지 않아서 그저 막연하게 생각했지만, 이제는 점점 분명해지고 확실하게 와 닿는다.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내 일이 되고 있다. 먼 미래라고 생각했던 새로운 변화들이 현재의 일상이다.
그림에서 받는 영감도 이제는 다른 기준으로 해석해야 할까. 달라진 기준에 맞는 영감은 무엇일까. 영감이란 게 생기기는 하나. 삐걱거리는 머리로, 나를 배신하지 않을 것 같은 영감 제공자 책을 뒤적인다. <공부란 무엇인가>에서 김영민 교수는 창의적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뮤즈를 찾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의 뮤즈는 바다 괴물이라는 다소 엉뚱한 고백을 하였다. “나의 뮤즈는 바다 괴물이다. 사실 난 언제나 바다 괴물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중요한 정책 결정을 앞두고 벌어지는 열띤 토론의 시간에도, 정말 맛있는 디저트를 먹을 때도, 남북한 정상회담이 이루어지는 역사적 순간에도, 건강 검진을 하기 위해 채혈을 하는 순간에도 나는 마음 한 구석에서 심해의 바다 괴물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의 의미를 바꾸어 놓을 수 있는 거대한 바다 괴물을.”
그가 그런 의미로 쓴 바다 괴물은 아니지만, 모든 것의 의미를 바꾸어 놓는다는 점에서는 지금의 코로나 바이러스가 거대한 바다 괴물이 아닐까 싶다. 아무리 영향을 받지 않으려고 해도 피하기 어렵고, 적응하자니 너무 억울하고. 글을 쓰고 유튜브를 만드는, 다소 창의적인 일을 하는 나로서는 영감을 찾는 일도 더 어려워졌다. 원래 창의적인 사람은 외부의 도움 없이 자체적으로 영감을 떠올린다고는 하는데 그럴 능력은 없어서 요즘은 머리를 더 쥐어 짜야한다. 무엇보다 세상을 쫓아가는 일은 더 만만치 않다. 마음으로도 어렵지만 머리로도 따라가기 힘든 뉴노멀 시대의 자괴감이 나를 덮친다. 나를, 아니 우리를 구원해 줄 바다 괴물, 진짜 뮤즈를 찾고 싶은 열망만 깊어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