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보다 Go
밀가루를 끊은 지 2주째다. 빵순이들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냐고,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독하다고 할지 모르겠다. 사실 밀가루를 끊은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년 전인가, 속이 좀 불편해서 한 달 동안 밀가루를 끊어본 적이 있다. 혹시 밀가루를 멀리하면 어떤 변화가 있는지 궁금한가.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몸이 정화된 느낌이다. 만약 위가 좋지 않다면 속도 편해진다. 잠도 깊이 오고 꿈도 별로 안 꾸게 된다. 잠도 잘 자고 위도 좋아지니 피부도 당연히 좋아진다. 체질과 상황마다 다르니 잘은 모르겠지만 나는 그랬다.
이렇게 나의 최애 크루아상, 스콘과 손절한 독기라면 뭐든지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뭐라도 해내기 위해 내 몸부터 먼저 실험해 보고 싶었다. “심플하게 살아볼까”라는 제목으로 두 주 전에 올린 글에서 알 수 있듯이, 나는 한동안 집안 정리에 몰두했었다. 집을 치우고 정리하다 보니, 정작 정리하지 못한 것은 나 자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사람을, 특히 나란 존재를 내가 직접 정리하는 일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몇 톤 트럭도 가득 채우고 남을, 미려한 마음과 버리고 싶은 습관들,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걱정들을 도대체 어떻게 정리한단 말인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고민 끝에 정리하기 어려운 마음보다는 몸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몸과 마음은 떨어질 수 없는 존재니까 몸에 변화가 오면 당연히 마음에도 영향을 끼칠 것으로 기대하면서.
마음의 변화를 유도할 수 있는 몸의 변화를 위해, 앞에서 밝힌 것처럼 밀가루 끊기를 시작한 셈이다. 예전에도 경험했듯이 밀가루를 멀리하면 몸에 긍정적인 신호가 오고, 덤으로 내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 확인할 수 있다. (세상에는 밀가루를 끊어본 적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으로 나뉘는데, 난 거기서 전자이니까, 의지가 좀 센 편이길 바라본다) 거기다 식단을 조절하고 운동을 열심히 하다 보면 말로만 부르짖어왔던 몸짱이 되는 행운을 얻을 수도 있다. 늘 다이어트를 신경 쓰고 살았던 나는 한 번도 다이어트를 성공해 본 적이 없었다. 늘 유혹에 넘어가고, 중간에 포기하고, 살이 찌고 빠지기를 반복했다. 가뜩이나 코로나로 우울한 기분인데, 내 몸 하나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인생이라고 생각하니 왠지 씁쓸해졌다. 그래, 이번에는 제대로 정리해보자. 뭐라도 해낼 수 있는지 없는지. 일단 내 몸부터 통제해 보고 싶었다.
정리에 들어간 것은 내 몸뿐만은 아니다. 사실 내 유튜브 채널도 정리 중이다. 아, 완전히 정리하는 것은 아니고 좀 다듬어볼 계획이다. 그래서 지금 3주째 쉬고 있다. 돌려 말하지 않겠다. 채널이 자리를 잡지 못해 방황 중이다. <무료한 박아나>의 문제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확실한 문제는 박아나의 관심사가 너무 흩어져 있어, 채널 자체가 산만하다는 점이다. 어떤 편은 정원 이야기를 하다가, 어떤 편은 패션 이야기를 하다가, 어떤 편은 책 이야기를 한다. 물론 그 산만한 일상이 내 자연스러운 모습이긴 하지만, 구독자수가 크게 오르지 않는 이유가 주제의 일관성이 떨어져서 그런 게 아닐까 고민이 된다. 구독자들 입장에서 본인의 관심사가 지속돼야 볼 맛이 나는데, 자꾸 관심도 없는 이야기들이 들쑥날쑥 나오니 혼란스러웠겠지. 다음 편에 대한 기대도 그만큼 떨어지고.
이렇게 잘 알고 있으면서, 왜 진작 한 주제로 집중하지 않았냐고 물으면 뭐라고 해야 될까. 변명을 하자면 처음에 유튜브 채널을 시작할 때 피아노라는 하나의 주제로 시도를 하긴 했었다. 그 당시 피아노 연주회를 준비하고 있어서 피아노 관련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면 이래저래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 당시에는 내가 피아노에 꽂혀 있었기 때문에 피아노라는 주제 외에 다른 것이 생각나지 않기도 했고. 그러나 피아노의 벽은 너무 높았다. 내 피아노 연주 실력은 그렇다 치고, 내가 연주할 수 있는 곡들의 레퍼토리가 그렇게 다양하지도 않았고, 피아노에 대한 지식이랄까, 이해랄까, 그런 것들이 많이 부족했다. 한 회, 한 회 넘어갈수록 다음 회에는 뭘 해야 되지 하는 부담이 컸다. 뭔가 피아노나 클래식 음악 세계에 대한 전문성이 떨어진다는 생각에 자신이 없었다. 지나고 보면 그 누구도 내게 전문적인 식견을 기대하지 않았는데, 그때의 나는 그게 그렇게 의식이 됐었다.
피아노라는 주제가 어렵게 느껴져 좀 쉽게 가고 싶었다. 소소한 일상을 나누며 이런저런 주제로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나도 편안하고, 사람들도 재밌게 보지 않을까 싶었다. 공개할 복근도, 예쁜 아이도, 귀여운 반려동물도 없었지만, 내 스타일을 좋아할 만한 사람들이 있겠지 막연히 생각했다. 그러나 대단한 셀럽이 아닌 내가, 뭔가 자극적이거나 사람들의 이목을 끌만한 일도 없었던 내가, 원하는 만큼의 채널 성장을 이끄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여기에 아나운서, 그것도 전직 아나운서라는 타이틀이 뭐라고, 있지도 않은 사회적 지위와 체면에 나는 자체 검열까지 반복했다. 뭔가 날것의 맛, 꾸미지 않는 언행이, 유튜브 채널의 매력일 텐데, 나는 굉장히 보수적인 감성으로 촬영한 내용들을 지우고 또 지웠다. ‘그렇게 하지 말자’하면서도 어느새 내 손가락은 삭제 버튼 위에 올라가 있었다.
극소수의 마니아들, 여기서 마니아라 함은 평소에 내 유머 코드를 좋아하는, 흔치 않은 고마운 구독자님들이 보내준 “채널 은근히 재밌어요”,”힐링돼요” 뭐 이런 반응들을 보면서 그나마 버텼다. 유튜브나 마케팅에 대해 좀 아는 사람들은 “채널의 타겟층이 어떻게 되냐?” “계속 이런 스타일로 만들 거냐?”는 질문을 많이 했다. 그래도 이런 질문을 해주는 사람들은 내 채널을 잠깐이라도 봐준 고마운 사람들이다. 지인들 중에 전혀 보지 않는 사람들도 허다하다. 서운하거나 섭섭해할 일은 아니지만, 문제가 있긴 한 거다. 혹시 좀 더 버텼으면 괜찮아졌을까. 성공한 유튜버 누군가가 1년 정도 꾸준히 올리면 반응이 온다고 했는데, 아직 1년을 못 채운 것이 문제였을까.
“자아비판은 일기장에나 하지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일단 나는 일기를 쓰지 않기 때문에 쓸 곳이 이곳밖에 없고, 그놈의 사회적 지위와 체면을 중요시하니, 한번 뱉은 말엔 어떻게든 책임지겠지 싶어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대단히 많은 분들이 읽지는 않으시지만 모두가 볼 수 있는 공간에 써야 내 멋대로 그만두는 일을 막을 수 있지 않겠나. 중도에 포기할까 봐, 동네방네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저 피아노 연주회 해요!”라고 소문내고 다닌 덕도 이미 경험해봤고. 이 나이에 양치기 소녀가 되고 싶지는 않으니까.
솔직히 요즘은 그냥 주저앉고 싶은 마음도 크다. 이 길은 잘못된 선택인 걸까. 내 노력의 부족일까, 그냥 코로나 탓일까. 의욕을 불태울만한 계기도, 지속할만한 동력도 자꾸 떨어진다. 그렇게 고민되면, 이참에 집안 정리하듯이 속 편하게 싹 다 정리하면 될 텐데 뭐가 문제냐. 그래, 문제는... 짧지 않은 내 경험상, 끝까지 계속해서 후회한 경우보다는 하다가 포기하거나,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아서 후회한 적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평생 신경 써 온 다이어트도 그랬고, 대학원을 다니다 그만뒀을 때도 그랬다. 퇴사를 할 정도의 결심이면 그전에 뭐라도 시도해보지 그랬냐는 생각들로 후회가 많았기 때문이다.
정말 한 번이라도 전력을 다해 달려본 적이 있을까. 진작에 달렸어야 했는데 이미 늦은 것은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들이 서늘해진 가을 공기처럼 나를 감싼다. 예전에 내가 어렸을 때 어른들이 그랬다. 나이 들어서 제일 후회된 것은 이것저것 마음이 원하는 대로 다 해보지 못한 거라고. 그래, 그게 가장 큰 후회라면, 지금도 하고 있는 이 후회들을 조금이라도 줄여야 하는 게 맞겠지. 그런 의미에서 밀가루 끊는 것도 GO, 다이어트도 GO, 유튜브도 GO다. 더 이상 고민하지 말고 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