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제주
제주행 비행기에 올랐다. 오랜만에 비행기를 타니 약간의 벅찬 감정이 느껴졌다. 활주로에 대기하는 순간도, 이륙하는 순간도, 하늘에 떠 있는 순간도, 그리고 착륙하는 순간까지 모두 영상에 담았다. 지금 같은 상황에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가장 멀리 갈 수 있는 곳으로 떠난다는 생각에 몹시 들떴다. 날개에 걸려 시야가 완전히 확보되지 않았고, 장마철이라 짙은 구름에 가려져 딱히 보이는 것도 없었지만, 신기한 듯 밖을 바라봤다. 생각해보니, 작년 이맘때 나는 이탈리아의 시칠리아 어디 해변에 누워 있었구나. 그러나 올해는 사정이 다르고 내년도 어떨지 알 수 없다. 지금 내게 제주는 시칠리아만큼이나 멀리 떨어진 이국적인 곳이다.
착륙을 앞두고 제주의 거센 바람은 우리를 격하게 환영했다. 그 큰 바람을 타고 북적였던 김포공항의 수많은 관광객들이 다 같이 제주로 넘어와서일까. 렌터카 셔틀버스를 기다리는 줄이 엄청나다. 가까스로 셔틀버스에 올라탔는데, 이런... 나만 타고 남편은 타지 못했다. 버스에서 다시 내리고 싶었지만 그 과정이 모두에게 민폐일 것 같아 잠깐의 이별을 선택하기로 했다. 타고 온 비행기도 지연 출발해서 예정시간보다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조금 서둘러야 될 것 같기도 했다. 짐칸에 가방을 싣다 자리가 없어 버스에 못 탄 남편은 내 짐까지 챙겨 택시로 뒤쫓아왔다. 예약 시간보다도 한 시간도 넘게 늦게 왔는데도 우리 차는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서울에서 이런 일이 연속으로 일어났다면 조금 짜증이 났을 텐데, 기분이 괜찮다. 제주의 바람은 그런 나쁜 감정들을 날려버리는 재주가 있나 보다.
숙소가 있는 귀덕으로 향한다. 귀덕이라는 지명은 좀 낯설긴 한데, 제주 서쪽의 애월 아래쪽, 한림읍에 위치한다. 비양도로 가는 배가 운행하는 한림항과 가깝고, 요즘 핫하다는 애월의 한담 해변 산책길과도 가깝다. 우리 숙소는 해변에서는 거리가 있어 제주에서는 흔한 바다가 보이지 않았지만, 관광객들이 다니지 않는 한적한 밭들 사이에 있어서 나름의 운치가 있었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기 위해 이곳에 왔을 정도로.
여름철 성수기라 어딜 가도 사람에 치이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생각보다는 괜찮았다. 주요한 관광지, 예를 들어 성산일출봉이라든지, 중문 관광단지, 산방산 같은 곳들을 아예 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고, 해외에서 오는 관광객들이 없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뭐가 됐든 여름휴가 성수기에, 해외로 나갈 수 없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 별로 선택지가 없는 거 치고는 북적대지 않았다. 물론 해수욕장에는 사람이 많았다. 어떤 해변은 발 디딜 틈도 없었는데, 편하게 해수욕을 즐기기에는 요즘 같은 때에 좀 부담스러워 오래 머물지는 못했다. 차가 좀 막히는 구간들도 있었고, 뉴스에서만 보던 역주행 차량을 만나서 경악하기도 했다. 설마 제주도민의 차는 아닐 테고, 운전에 서툰 관광객이 운전한 차겠지. 다행히 사고는 면했지만, “휴가철이라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구먼!” 역시나 운전은 조심해야 한다.
가장 최근인 작년 1월에 제주에 왔었는데, 그 당시 제주에 살던 친구 덕분에 제주가 예전의 그 제주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생각하는 제주는 아름다운 경치를 가진 예스러운 곳이었지만, 이제는 뭔가 젊어진 느낌으로 많이 달라졌다. 잘 알려지지 않았던 동네에 핫한 카페들이 줄지어 들어서고, 숙박 시설도 관광객들의 구미에 맞게 다양해졌다. 갈치조림이나 흑돼지 구이 같은 토속적인 음식들이 여전히 인기지만, 그 틈새에 카레나 파스타 맛집들이 끼어들었다. 일주일 정도 긴 시간을 이곳에 머문다면 이런저런 음식들을 다 맛볼 테지만, 2박 3일의 짧은 일정이라 제주스러운 음식들을 먹기에도 시간이 부족했다.
어딜 가도 내가 좋아하는 해삼이나 멍게가 있었지만, 착한 가격은 아니었다. 그래도 제주 바다를 바라보며 한라산 소주 한 잔을 곁들인 해삼 멍게 맛은 일품이었다. 예전에 <박소현의 올댓 뮤직>이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 피디 선배와 작가 언니들과 함께 제주에 놀러 온 적이 있다. 그때 우도 어느 해변에서 해녀 어머님들이 갓 잡은, 아니 그렇게 믿었던, 해삼과 멍게를 쪼그리고 앉아 먹었었다. 피디 선배는 “한라산 소주를 먹어야 소독이 되는 거야.” 이러면서 우리에게 술을 권했었는데, 그때의 나도, 지금의 나도 여전히 그렇게 하고 있다. 나는 지금의 제주만큼 변하지 않았나 보다.
이번 제주 여행에서 나는 뭘 더 열심히, 뭘 더 많이 보고 다니려고 욕심내지 않았다. 아침에도 천천히 일어나 서둘러 외출하지 않았다. 잠깐 나가서 아침을 먹고, 근처 카페에서 커피 한 잔 하고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오후에 어디 갈까 검색하는 대신 숙소에서 책을 읽거나 좀 답답하면 바다로 갔다. 배가 고파지면 멀리 떨어진 맛집보다는 근처에서 해결했는데, 꽤나 만족스러웠다. 어딜 부지런히 다니는 것보다는 한두 군데 느긋하게 둘러보는 게 요즘의 내 여행 스타일이라고 쓰고 보니, 작년에 이탈리아에서 몇만보씩 걸어 다녔던 발바닥 아픈 기억이 떠올라 고개를 젓는다. 물론 그곳에서도 거의 하루 종일 해변가에서 노는 날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바쁘게 일정을 소화했다. 아마 처음 가는 곳이라, 다시 오기 힘든 곳이라 하나라도 더 보고 싶은 마음에 그랬는지 모른다. 일단 지금 시점에서는 부지런히 다니길 잘한 것 같다. 너무 관광객스럽지만, 이제는 언제 또 갈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니 빨갛게 불태운 발바닥이 아깝지 않아...
낯선 이국의 여행지와 달리, 이번 여행은 공항 가는 길에 들른 산책로를 비행기 시간 때문에 빨리 걸은 것 빼고는 거북이처럼 느리게 다녔다. 이곳이 제주여서 본능적으로 느긋하게 행동했을까. 섬의 시간은 우리의 시간보다 느리게 가기도 하고, 언제든 다시 찾아올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더 여유를 부리게 되기도 하고. 서둘러 돌아갈 관광객도 서서히 움직이게 만드는 곳, 제주. 여기서는 관광객도 여행자의 기분이 드는 마법에 걸릴 수 있을 것 같아.
어쩌면 내 마음이 원했을지도. 그냥 어딘가에 주저앉아 쉬어가고 싶었던 거다. 그게 내 마음의 상태였나. 여행 문학가이자 소설가 폴 서루는 <신선한 공기의 마니아>에서 “여행은 마음의 상태이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얼마나 이국적인 곳에 있는지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여행은 거의 전적으로 내적인 경험이다.”라고 했다. 회사를 그만두기 전에 마음이 많이 어지러울 때 뉴욕에 갔던 기억이 떠오른다. 현실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려고 떠난 여행이었지만, 나는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고, 낮에도 풀이 죽은 상태로 돌아다녔다. 뉴욕은 지금도 변함없이 나의 최애 도시이자 마음의 고향인데(뉴욕에서 2년 살았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때의 뉴욕은 온갖 억울하고 나쁜 감정들로 가득 찬 고담시처럼 어두웠다. 그래, 정말 폴 서루의 글처럼, 뉴욕에 있든, 제주에 있든, 내 마음의 상태가 여행의 모든 것을 좌지우지한다.
너무 짧은 여행이었을까. 제주 귀덕 숙소의 평상에서 바라본 하귤나무가, 금능해수욕장에서 밟았던 하얀 모래가 꿈같다.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에 젖어있던 나는 실제로 두 번의 밤동안 무서운 꿈을 꾸었다. 작가 폴은 같은 책에서 “여행이 무엇이든 그것은 꿈꾸고 기억하는 기회이기도 하다. 낯선 풍경 속에 앉아 있으면, 그동안 무시무시하게 여겨졌던 온갖 사람들이 나를 찾아온다. 때로는 낯선 침대에서 악몽을 꾸기도 하고, 수년 동안 한 번도 생각한 적도 없는 사건들을 머릿속에 다시 떠올리기도 한다. 그러나 거리에서 들려오는 소음 때문에, 혹은 재스민의 강렬한 향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다시 잊는 것인지도 모른다.” 고 적었다. 그의 말은 정확했다.
그래, 그럼에도 나는 다시 여행을 꿈꾼다. 내 마음의 상태가 어떻든 여행으로 꿈꾸고 기억하고 그리고 또 그렇게 잊으며 살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은 어디로 떠날까. 아무튼,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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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올리고 나니, 또 엄중한 현실이...
우리 모두 건강하게 잘 지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