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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아나 Sep 04. 2020

박아나의 일상뉴스

심플하게 살아볼까

 최근에 방송인 오정연 씨가 출연한 <신박한 정리> 편이 화제였다. 평소에도 이 프로그램을 곧잘 봤었는데, 오정연 씨 집은 역대급으로 짐도 많고, 그만큼 정리도 잘 되어 있지 않았다. 단아한 이미지의 그녀인지라 조금은 의외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녀는 왜 그 많은 물건들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을까. “매 순간 그 순간 집중하고 열심히 했던 기억 때문에 하나하나가 다 소중해요. 쉽게 얻은 게 아니라 너무 감사하고  의미를 부여해서 다 기억이 나죠. 그래서 더 쉽게 없애지 못한 것 같아요” 그녀는 그렇게 추억과 함께 살고 있었다. 초등학교 때 일기장부터 대학 때 썼던 리포트들, 방송사 입사 시험 수험표들까지. 의미가 있는 것들이라면 쉽게 버리지 못하고 간직하고 있었던 그녀의 집은 그렇게 추억으로 넘실댔다. “내세울 건 없지만 이제까지 열심히 공부하고 일한 거 하나, 나의 역사고 분신 같고, 열심히 살게 해 주는 증표 같은 것들이에요.”

TVN 신박한 정리, 방송인 오정연 편 중에서.

 그래, 그런 증표를 쉽게 버릴 수는 없지. 남의 이야기를 할 것도 없다. 나도 한때는 방송 때 썼던 라디오 원고들과 10년 전 뉴욕에 살았을 때 모아두었던 뉴욕타임스를 쌓아놓고 있었다. 방송국 시절과 뉴욕의 추억이 그리워서 쟁여둔 것뿐인데, 언젠가는 써먹을지도 모른다는 소금을 치면서. 그렇게 몇 년이 흐르고 그런 게 있었는지 기억도 못하게 되겠지. 그러다 어느 순간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드는 날도 오더라. 방송 콘텐츠도 바뀌어서 예전 원고가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뉴욕타임스를 버림으로써 더 이상 영어 공부에 집착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속이 다 후련했다.


 요즘 나는 다시 현타가 오고 있다. 코로나 상황이 안 좋아지고 집에 있는 시간이 엄청 길어지면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 자꾸 보인다. 설거지가 조금 쌓여 있어도 그러려니 했었는데, 먹고 바로 치우지 않으면 거슬리지 않나, 청소기 자주 돌리지 않아도 먼지 하나 없이 말끔해 보였던 거실도 몽골 사람들처럼 시력이 좋아진 건지, 갑자기 예민한 깔끔이가 되어 버렸다. 청소도, 빨래도, 설거지도 부지런히 해본다. 그러나 그때뿐이다.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아직 비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가 내리는 어느 아침, 나는 내 욕망의 화신인 옷방을 들여다본다. 내가 열심히 살아왔다는 증표라기보다는 내가 열심히 낭비해왔다는 증거로 가득 찬 그곳. 들어오는 것은 많지만 나가는 것은 거의 없는 나의 옷방. 맥시멀리즘의 본거지. “너무 많이 가지면 자신을 잃어버리게 되지만, 적게 가지면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라고 그 누가 그랬던가. <심플한 정리법>의 도미니크 로로의 말이 뼈를 때린다. 너무 많은 옷 자체가 나 자신을 잃어버렸다고 광고하는 것일까. 수많은 옷 사이 그 어디쯤에, 언제 어디서 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회색 티셔츠처럼 구겨지고 바래진 내가 있는 걸까.


  “더 버릴수록 정신은 더 맑아진다. 물건들은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그 사실을 깨달아야 끊임없이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싶어 하는 우리의 고질적인 불만족이 마음과 정신의 휴식을 방해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불만족에 대한 치유책은 자기 자신을 되찾고, 과거를 그리워하느라 세월을 낭비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더 많은 것을 바라게 만드는 것들을 멀리하고, 그저 단순하게 살아감으로써 점점 커져가는 행복을 맛보아야 한다. 더 이상 자신의 소유나 욕망에 휘둘리지 않게 되었을 때 얼마나 큰 감동이 밀려오는지 모른다... 버리는 것은 어떤 만족감이나 즐거움을 위해서가 아니라, 더 자유롭고 평온하며 우아한 삶을 위한 일이다.”


 더 버릴수록 정신이 맑아진다. 그래, 답답하고 불확실한 지금 같은 시대에 정신이 맑아지도록 버려보기로 한다. 몇 년 사이 손도 대지 않았던 옷들, 유행은 돌고 도는 거라 믿지만, 재유행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모자와 가방들, 바지만 주로 입는 내게 언젠가는 필요할지도 모르는 스타킹 뭉치들, 그리고 갖가지 브랜드의 쇼핑백은 뭐에 쓰려고 이렇게 악착같이 모아두는 것일까. 며칠에 걸쳐 하루에 두세 시간씩 정리를 시작했다.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어서 몰랐는데 상당한 양이었다. 큰 쇼핑백 다섯 개 - 이런 용도로 쓰려고 모았던 거다 - 가 금방 찼다. 첫날에는 망설여졌던 손길이 시간이 지날수록 빨라진다. 뭔가 자유로워지는 느낌이랄까. 저것들이 비워지면 그만큼 여유가 생기겠지 싶어 마음이 홀가분하다. 이런 게  바로 정신이 맑아지는 과정일까.


 “감금 상태에 있거나, 사막 한가운데 있거나, 아주 가난한 나라에 살거나, 화재와 홍수, 지진 등으로 모든 것을 잃는 등 어려운 경험을 해본 사람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 얼마나 적었는지 또 어떤 것이 소중하고 어떤 것이 아무 쓸모가 없는지 깨닫고 놀라게 된다.” 감금까지는 아니지만, 예전에 비해 활동폭이 훨씬 줄어든 요즘, 내게 필요한 것은 나를 빛나게 해 줄 에지 있는 옷이나 럭셔리한 가방이 아니었다. 그런 것들을 입고 들고나갈 곳이 없으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실제로 내가 주로 입고 쓰는 것들은 제한적이었다. 청바지 , 면바지, 티셔츠, 블라우스, 원피스 각각 두어 개, 가방, 그것도 큼직한 에코백 한 두 개면 여름을 충분히 날 수 있었다.


 “물건은 많을수록 제 값어치를 잃어버리는데, 이는 물건이 많은 탓에 사용 빈도가 낮아져 물건의 가치가 점점 떨어져서 결국 득보다는 실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물건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으면 그것을 제대로 활용하기 어렵다.” 예전에 자유로이 외출하고 일이 많았을 때도 그 값어치만큼 써먹지 못했던 것 같은데, 이제는 먼지만 쌓여가는 느낌이다. 보관료도 내지 않고 내 방을 차지해버린 물건들. 그렇게 그들은 주인인 나를 내쫓고, 내 방을, 내 마음까지도 점령해 버렸다. “무언가를 소유하게 되면 그것이 필요하건 필요하지 않건 사용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게 된다. 그것을 사용하지 않으면 왜 그 물건을 가지고 있는지 스스로 의문이 들까 봐 불안하기 때문이다. 이때 주변에 쓸데없는 물건들을 없앤다면 우리의 정신에서도 그 물건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점점 헤어 나오기 힘들어지는 악순환의 고리에서 빠져나오려면 먼저 자기 주변을 정리하라. 결국에는 많은 물건들이 쓸모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가벼운 주머니 사정이나 일기 예보보다 우리의 소유물이 더 우리를 구속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은 심플한 정리법 중에서 인용>


 이제 겨우 조금 비웠다. 조금 버렸다고 뭐 얼마나 크게 달라졌겠는가. 뭔가를 사고 싶은 욕망이 올라올 때마다 나 자신을 통제할 수 있을까. 어떻게 보면, 집에 오래 있어야 할 것 같은 지금의 이 시기가 비움 훈련을 하기에 적기일지도 모르겠다. 이미 너는 많은 것을 가졌다고. 지금 네게 필요한 것은 그게 아니라고. 내 옷장을 비우는 것이 결국은 내 마음을 비우는 일이고, 그 비워진 자리는 새로운 에너지가 대신할 수 있다는 것. 쓸데없이 남을 의식하기보다는 내 자신을 더 충실히 채우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내가 좋아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는, 그런 시간으로 지금을 채워보면 어떨까.


 그러기 위해서 오늘도 좀 더 비워보겠습니다.

도미니크 로로의 <심플하게 산다>부터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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