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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아나 Jan 24. 2021

박아나의 일상뉴스

또 다른 기쁨

 한동안 평온했던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현생과는 별개로 글쓰기는 계속되어야 하지만, 나는 현실적인 문제에 끌려다니고 있다. 걱정이 있다고 결근할 수 없는 것처럼 걱정이 있다고 글을 쓰는 일을 미뤄서는 안 될 텐데... 아무튼 일요일 오후까지 버티고 버티다 글을 쓰기 시작했다. 어떤 이야기를 써야 할까. 오랜만에 느껴보는 막막함이다.


 요 며칠은 책도 손에 대지 않았다. 불과 일주일 전만 해도 하루에 몇 권씩 책을 읽었는데, 이번 주 들어서는 침대 옆 머리 맡에 그냥 쌓아두고 있다. 책들이 더 높이 쌓이기 전에 걱정들을 내려놓아야 될 텐데 걱정이다. 걱정은 또 다른 걱정을 불러온다. 어떤 길이 맞는 것인지,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마음은 어지럽고 정신은 산만하다. 집중이 어려우니 책도 멀리하게 되는 걸까.


 걱정만이 독서를 방해하는 이유는 아니다. 요새 읽는 책들이 한쪽에 치우쳐 있는 탓도 있다. 로맹 롤랑의 <베토벤의 생애>, 앙드레 지드의 <쇼팽 노트>, 기돈 크레머의 <젊은 예술가에게>, 에두아르트 뫼리케의 <프라하로 여행하는 모차르트>... 예술가들의 이야기, 특히 음악가들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다. 그런 책들을 원래 좋아하긴 했지만, 목적이 있어하는, 약간의 의무 같은 독서이다. 유튜브 채널을 위한 자료 조사와 공부 차원에서 읽고 있는 것이다. 취미가 일이 되면 어떻게 될까. 예전에 영화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선배에게 “시사회 가서 개봉 영화도 제일 먼저 보고, 너무 좋겠어요.”라고 한 적이 있다. “영화를 일로 보면  생각보다 재미없어.” 유튜버도 촬영하러 맛집에 갈 때보다 순전히 배고파서 먹을 때가 더 맛있을 것이다. 독서도 마찬가지다. 기분 내키는 대로 내가 읽고 싶은 책을 만날 때 그 희열이 더 큰 법이다. 요즘의 나는 그런 기쁨을 별로 느끼지 못하고 있다.


  다행히 내겐 또 다른 기쁨이 있다. 독서를 대신하는 요즘의 기쁨은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8번, A minor k.310을 연습하는 것이다. 내 모든 불안과 걱정을 담아 격정적으로 건반을 두드린다. 이곡은 모차르트가 가장 힘들었던 절망의 시기에 작곡되었다. 1778년 3월, 구직 여행 중이었던 모차르트는 아버지의 독촉에 못 이겨 만하임에서 사랑하는 여인과 헤어지고 원치 않는 파리로 떠난다. 그는 자신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파리가 싫었다. 피아노를 둘 곳이 없을 정도로 누추한 파리 생활은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 그를 돌보기 위해 이 여행에 동행한 어머니는 장기간의 여행에서 오는 누적된 피로로 건강이 많이 나빠졌다. 결국 어머니는 7월, 낯선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절망에 빠진 모차르트는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낸다.

“이 비통한 일을 치른 기억은 죽는 날까지 잊을 수 없을 거예요. 아버지도 제가 누군가의 죽음을 한 번도 목격한 적이 없다는 걸 아실 거예요. 처음으로 맞닥뜨린 죽음이 바로 어머니의 죽음이라니, 이 얼마나 잔인한 일인가요. 그 순간에는 어머니의 뒤를 따르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불만족스러운 파리에서의 생활과 어머니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리고 그녀를 잘 돌보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을 무렵 그는 이 소나타를 완성했다. 1악장의 시작부터 조여 오는 긴박감은 다가오는 비극을 예감한 듯한 비장감을 제대로 표현한다. 보통은 오른손의 선율이 더 중요하지만, 이곡은 오른손 못지않게 왼손의 역할도 중요하다. 마치 오른손만으로는 내 슬픔을 다 감당할 수 없다는 듯이, 왼손으로도 그 아픔을 함께 나눈다. 모차르트의 절망은 단조로 표현된다. 그의 피아노 소나타 중에 단조는 두곡뿐인데, 이 8번이 바로 그중의 하나다. 그는 자신 앞에 놓인 잔인한 비극을 이미 감지했던 것이다.


 이 곡을 연습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전에 연습했던 11번과 12번과는 다른 분위기여서 좋았다. 사실 이 소나타 안에 그렇게 거대한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지는 수업 때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알았다. 그런 배경을 듣고 나니 이 곡이 괜히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누군가의 비극을 연주하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모차르트가 이 곡을 만들었을 당시의 상황은 절망적이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나만의 해석이 필요하다고 했다. 나는 어떤 그림으로 이 소나타를 그려내야 할까.


 솔직히 아직 감이 잡히지는 않는다. 다만, 이 곡을 연습하고 나면 왠지 모르게 시원하다. 내 안에 걱정과 근심이라는 것들은 어느새 안드로메다로 사라지는 기분이다. 내 절망에 비하면 너의 걱정들은 별거 아니라고, 우주의 티끌만도 못한 것들이라고, 그렇게 그의 음악이 나를 어루만지는 것 같다. 다른 사람의 슬픔과 고통이 때론 나를 위로해 줄 때도 있는 법. 극도의 절망에 빠졌던 모차르트에게는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긴 하지만, 모차르트 덕분에 나의 불편한 감정들을 조금씩 털어내고 있다.


 여전히 내 머릿속은 복잡하다. 누군가에게 내 마음을 쏟아붓든지, 그냥 조용히 말하지 않고 버티든지,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해소되긴 하겠지. 그래도 지금 당장 분명한 건... 이렇게 털어놓을 음악이, 끄적거릴 공간이 있어 고맙다는 것. 또 다른 기쁨들이 오늘도 나를 위로한다.




### 1월 26일과 30일, 롯데 콘서트홀에서 피아니스트 선우 예권이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8번을 연주한다고 하네요, 그 무대가 많이 기대됩니다. 저는 갈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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