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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아나 Feb 14. 2021

박아나의 일상뉴스

시작의 시작

 올해는 눈이 자주 그리고 많이 왔다. 기다리고 기다려도 눈이 오지 않았던 겨울도 많았는데, 흔하디 흔한 게 눈이라니... 첫눈보다는 갈수록 감동이 줄어들긴 했지만, 눈 내리는 순간만큼은 세상은 마법에 걸린 것 같았다. 날리는 눈발을 보는 것만으로도 감탄사가 나오지만, 눈이 내리는 소리는 또 어떤가. 타닥타닥.쉬이이익. 부엌에서 음식 만들 때 나는 소리 같다. 계속 듣고 있으면 배가 고프다.

 그렇게 눈 내리던 겨울은 끝나고, 입춘도 지났다. 요 며칠 낮에는 두터운 겨울 옷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따뜻했다. 어느 날인가는 운전할 때 에어컨을 틀기도 했는데, 봄도 건너뛰고 바로 여름인가 싶게 시간은 자꾸 앞으로 뛰쳐나간다. 허우적대며 발걸음을 맞춰오던 나는 숨이 찼다. 잠시 숨을 고르려고 게으름을 피웠더니 2주가 확 지나갔다. 사실 아무것도 안 한 것은 아니고, 오히려 새로운 이슈가 생겨 바빠졌다. 그러니까 새로운 일에 신경 쓰다 보니, 그동안 해왔던 일들을 잘 돌보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아무튼 지금 이렇게 앉아서 글을 쓰는 것을 보니 제자리로 돌아가긴 하려나 보다.


 내게 생긴, 아니 생길 변화는 이사이다. 새로운 곳으로 내 터전을 옮기는 일. 설레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걱정도 된다. 설레는 것이야 어떤 감정일지 설명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변화란 늘 설레는 감정을 품고 있으니까. 한적한 곳에 살다가 번잡한 서울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뭐랄까, 도시인들의 바쁜 에너지를 공유하며 나도 이제 슬슬 기지개를 켜어볼까, 뭐 그런 기대를 해도 괜찮겠지. 슬픔도 당연한 감정이다. 지금도 눈앞에 보이는 저 테라스 친구들과는 어찌 이별할지 먹먹하다. 목련나무, 수국들, 사과꽃나무, 포도나무, 대추나무, 로즈메리, 라벤더... 우리가 떠나면 다음에 올 주인이 그대로 둘까,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여름 저녁이면 테라스에서 고기 굽던 냄새, 옆집 아저씨가 건네주던 싱싱한 유기농 상추와 고추들도 그리울 것이다. 아침이면 나를 깨우던 새소리도, 자전거 타고 신나게 달렸던 내리막길도, 그리고 출퇴근길 꽉 막히던 경부고속도로까지도 많이 생각나겠지.

올해는 포도를 따먹지 못하겠구나...

 걱정 박사인 나는 할 일이 너무 많을 것 같아 미리 걱정이다. 가구와 그 밖의 잡동사니들을 정리해야 하고, 새로 들어갈 집의 인테리어를 어떻게 할지 고민해야 한다. 어렸을 때부터 이사를 많이 다녀서 이사가 뭐 어렵나 싶지만, 그때는 내가 전적으로 책임질 일이 아니었다. 엄마의 진두지휘 아래, 고작해야 내 방 짐 정리나 했던 거다. 이번에는 내가 책임자이기 때문에 알아봐야 할 것도 많고, 돌아다녀야 할 일도 많다. 게다가 이사 갈 집도 전체적으로 손을 봐야 하기 때문에 이사의 난이도가 다른 때에 비해서 더 높다고 해야 할까.


 하긴 한국 집을 정리하고 미국에도 살다왔던 사람인데, 같은 한국에서 뭐가 그리 힘들까 싶다. 약간의 용기를 얻기 위해 옛날 일을 떠올려본다. 지금으로부터 10년도 더 전에, 결혼한 지 3년 차에 뉴욕에 가게 됐다. 뉴욕집은 한국의 아파트처럼 넓지 않아서 큰 짐들을 둘 곳이 마땅치 않았다. 어차피 가전제품은 코드가 맞지 않아서 가지고 갈 수 없었고, 부피가 큰 가구들은 부치는 비용도 만만치 않았기에, 아깝지만 정말 필요한 짐 외에는 싹 다 정리해야 했다. 미국으로 떠나기 한 달 전, 보낼 짐들을 쌓아놓고 보니, 꽤나 단출했다.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살 수 있는데, 그동안 그렇게 많이 짊어지고 살았나 싶었다. 지금까지의 삶을 리셋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기분이 들었다.


 뉴욕에 도착하고 며칠간은 침대 매트리스 없이 며칠을 마룻바닥에서 자야 했다. 도착한 날 바로 매트리스를 사러 갔는데, 우리나라처럼 배달이 빠르게 오는 시스템은 아니었기 때문에 일주일 뒤에 왔던 것으로 기억된다(그나마 뉴욕이라 빠른 편이었다). 수건 같은 것을 깔고 잤는데, 자고 일어나면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프고 결렸다. 그사이 한국에서 온 짐들이 도착해, 한국에서 공수해온 라면은 뭔가 맛이 다르다며 시원하게 끓여먹고 나니 그제야 내 등짝이 조금씩 풀렸다. 그렇게 2년이 지나고, 정들었던 뉴욕의 시간만큼 또 다른 짐들이 쌓였다. 한국에 가지고 가도 써먹을 일이 없는 것들은 주변 친구들에게 나눔을 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시작했다. 뭐든 큰 변화의 시작은 정리정돈이었음을 다시 한번 깨달으며.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날, 뉴욕에서 먹다 남은 김치들로 김치찌개에 김치전을 만들어 친구들과 함께 김치 파티를 열었다. 그날 지겨울 정도로 김치를 많이 먹었지만 떠나는 자의 헛헛한 마음만은 채워지지 않았다. 10년 전 나는 뉴욕 케네디 공항에서 엉엉 울었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당장 떠나는 것이 아닌데도, 이 집을 떠날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날 것 같다. 떠나려면 석달이나 남았는데, 벌써 여기가 그리운 기분이다.

자전거 타고 놀러올게...

 새로운 변화보다는 안정에 익숙해진 나이라 10년 전보다 이별이, 아니 새로운 시작이 더욱 힘들지도 모른다. 뭔가 귀찮고 주저 않고 싶기도 하지만, 누군가 그랬다. 이사를 가면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활기를 얻는다고. 변화가 불러올 힘은 상당하지 않을까. 없던 활기도 생긴다는데, 지금 내게 필요한 건 그런 새로움이 주는 활기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그럼 슬슬 정리부터 시작해볼까. 활기차게 봄처럼.


## 2주 쉬고 인사드려요. 구독자님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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