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아나 Mar 08. 2021

박아나의 일상뉴스

봄의 기억

 봄이 왔다. 강원도에 눈이 내렸다는 뉴스도 들리고, 아침저녁으로 쌀쌀함이 남아 있긴 하지만 봄은 봄이다.


 작년 이맘때를 돌이켜보면, 코로나 19와의 낯선 동거가 시작됐었다. ‘도대체 정체가 뭐지?’하는 두려움과 ‘설마 이러다 말겠지’하는 기대가 왔다 갔다 했었지. 외출하려고 집을 나설 때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와 챙겨야 했던 마스크도 지금은 한 몸처럼 잘 붙어 다닌다. 여전히 앞을 알 수 없는 상황이지만, 몇 달 뒤면 상황이 더 나아지겠지 하는 희망이, 서서히 오르는 봄의 기온처럼 조금씩 부풀어 오른다. 따뜻한 봄기운에 홀려 ‘3월은 매년 추웠어’라는 생각이 그제야 떠올라 옷깃을 꽉 여미는 것처럼, 이런 어두운 상황에서도 매번 잊어버리고 매번 꿈을 품어보는 인간의 본성이 어쩐지 고맙다.


 미래가 불투명할 때는 어디 한 군데 집중하면 도움이 된다. 머릿속에 떠다니는 잡념들을 잡아둘 수 있기 때문이다. 쓸데없는 생각들을 지우기 위해 요즘 연습하는 곡들을 외우려고 노력하고 있다. 잊기 위해 잊지 않으려고 애쓰는 작업을 하고 있는 셈이다. 지난 연주회에서, 연주회가 처음이었던 나는 무대에서 혹시라도 실수할까 봐 악보를 앞에 두고 연주했었다. 그 덕분인지 연주회를 무사히 끝내기는 했지만, 악보 없이 무대를 마쳤다면 자신감 측면에서도, 또 음악적으로도 훨씬 더 성장할 수 있는 기회였을 거라 생각이 들어 아쉽긴 하다. 연주하면서 악보를 넘기는 곡예도 부담스럽기도 하거니와 곡에 대한 이해의 폭도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완벽히 외웠다는 것은 그만큼 내 것, 내 곡이 되었다는 의미기도 하니까.


 아무튼 그날 이후로 내가 연습하는 곡들은 다 외워서 언제 어디서든 연주할 수 있는 암보 능력을 키우고 싶다는 소망을 키워왔다. 공연장에서 피아니스트의 뛰어난 연주에 감탄하면서도 나는 암보 능력에 더 특별한 존경심을 갖고 있는 영향도 컸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악장을 저렇게 달달 외우고, 오케스트라와 호흡을 맞춰 30분이 훌쩍 넘는 긴 곡을 거뜬히 돌파하는 것을 보면 피아니스트들은 천재가 아닐까 싶었으니까.


 암기라면 학창 시절에 나름 자신 있었다. 역사나 한문 같은 암기 과목에서 성적이 좋았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단기 기억력에 강했을 뿐, 시험이 끝나고 나면 광개토대왕도, 근초고왕의 업적도 가물가물해졌고, 주관식 답으로 썼던 한자도 다시 쓰라고 하면 쓰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렇게 빛의 속도로 잊히는 기억이라면 제대로 암기했다고 말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다행히 시험은 잘 봤던 것으로 기억된다. 혹시 이것도 기억이 조작된 것일까.


 물론 공부를 위해 지식을 외우는 것과 연주를 위해 악보를 외우는 일은 조금은 다른 능력이 요구된다. 지식은 외워서 다시 꺼내 쓸 때 약간의 변형이 가능하기도 하지만, 피아노 연주는 한 글자도, 그러니까 한 음표도 틀려서는 안 된다. 이 100%라는 정확성이 암보에 대한 부담을 가중시킨다. 한 번의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것, 내 손끝에 모든 게 달려있다는 절박감은 무대에 선 연주자를 세상에서 가장 긴장한 사람으로 만든다. 그 어떤 순간에도 당황하지 않고 실수 없이 곡을 연주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완벽히 외워야만 무대에서의 긴장감을 줄일 수 있기도 하니, 암보는 연주자에게 넘어야 하는 또 다른 산임에 틀림없다.


 그럼 암보는 어떻게 하면 될까. 공부를 할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감각을 총동원해야 한다. 눈으로 악보를 외고, 소리로 들으면서 또 외고, 입으로 흥얼거리며 또 외고, 그리고 손가락 근육이 이 모든 것을 기억해 내는 과정을 무한 반복하다 보면 영원히 맞춰지지 않을 것 같은 퍼즐이 어느덧 완성된다. 곡의 패턴을 분석하거나 포인트를 찾아내면 그나마 외우는 데 걸리는 시간을 줄일 수도 있다. 그렇게 어렵게 어렵게, 나만의 암호 해독기를 돌려가며 암기 지옥에서 벗어나면 관객 앞에서 답안지를 맞춰야 하는 마지막 단계가 기다리고 있다. 웅변대회나 영어 스피치 대회에 나갔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아무리 완벽하게 외운 것 같아도 실제 무대에서는 다른 경우의 수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쇼팽의 녹턴 E minor, Op.72 No. 1. 기껏해야 5분 정도 되는 이 곡을 외우는 일이 내겐 만만치 않다. 암보에 완벽을 더하기 위해서 연주하는 모습을 촬영도 해본다. 마치 관객이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뜻대로 잘 풀리지 않을 때는 다른 연주자의 음반을 듣는 것도 도움이 된다. 백건우 선생님의 연주로 지금 연습하고 있는 이 곡을 연속 재생해서 들으니, 재작년에 들었던 연주회에서의 감동도 함께 재생되는 기분이다. 더불어 어떻게 연주해야 백 선생님처럼 애절하게, 격정적으로, 꿈결같이 이 작품을 표현할 수 있을지 슬그머니 욕심이 난다. 그래, 이런 욕심이 생기는 것을 보니 어느 정도 암보가 완성되가고 있는 걸까. 그렇게 내 피아노 실력도 한 단계 더 성장해 가고 있을 거라 믿어 본다.

 

요즘 자주 듣는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쇼팽 녹턴 전곡

  암보와 함께 이번 봄에 대한 기억도 오래 남길 바란다. 잊고 싶은 기억보다 잊고 싶지 않은 기억들로 가득한 그런 봄이 되길 기대해본다. 내게도, 당신에게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