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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아나 Mar 01. 2021

박아나의 일상뉴스

좋은 소리, 좋은 근육

 내 피아노 소리만 듣다가 좋은 소리를 찾아 오랜만에 연주회에 갔다. 일리야 라쉬코프스키 피아노 리사이틀. 몇달 전 롯데 콘서트홀에서 피아니스트 임동민, 신창용과 함께 ‘오마주 투 쇼팽’이란 타이틀로 연주회를 열었던 그의 공연을 보고 너무 좋았다던 피아노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꼭 가봐야겠다 싶었다.


 전반부에 포레와 류재준 작곡가의 소나타를 연주했을 때도 좋았지만, 인터미션이 지나고 쇼팽의 곡을 연주하러 나오는 그의 등장에서부터 뭔가 공기의 흐름이 바뀐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쇼팽이라면 나지, 하는 은은한 자신감과 편안함이 표정과 발걸음에서 느껴졌달까. 쇼팽의 마주르카 24번과 피아노 소나타 3번. 과연... 속으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의 연주는 힘차면서도 연약했고, 부드러우면서도 팽팽했다. 섬세함과 강렬함이 교차하는 그의 터치는 쇼팽이 원했던 그런 것이 아닐까. 특히 피아노 소나타 3번의 4악장 피날레를 들으니 꾸불꾸불한 해안도로를 위태롭게 달리는 모습이 떠오른다. 피아니스트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저렇게 빠른 곡을 한 음도 헛투루 치지 않고 연주할 수 있는 걸까. 건반 위를 날아다니는 저런 용감무쌍한 테크닉이 가능한 날이 내겐 올 것 같지도 않아 점점 괴로운 마음이 든다.

뭔가 외모도 쇼팽같...은 느낌?

 공연장에서 직접 보는 감동과는 또다른 의미로, 요즘은 집안에서도 얼마든지 좋은 컨텐츠를 접할 수 있어 그런 면에서 꽤나 ‘감동적’인 세상이다. 피아노 관련 채널로는 가장 유명한 유튜브 채널 “또모”에서 진행하는 피아니스트 임동혁의 마스터 클래스를 보게 됐다. 임동혁 님의 팬들도 많았고, 피아노에 관심 많은 나같은 사람들의 열기로 실시간 댓글창은 아이돌의 라이브 방송만큼 뜨거웠다. 세명의 학생들이 각자 다른 곡으로 레슨을 받았는데, 실시간 방송에, 무려 피아니스트 임동혁 님 앞에서 떨지 않고 연주하는 담대함에 일단 놀랐다. 물론 속으로는 엄청 떨렸을 거라고 생각되지만, 임동혁 님의 날카로운 지적에 당황하지 않고 그자리에서 바로 고쳐나가는 학생들을 보니, 우리 선생님은 나를 지도하면서 어떤 생각이 들까 싶었다.


 마스터 클래스에 참가한 학생들의 실력은 정말 뛰어났다. 아직 저렇게 어린데, 앞으로 얼마나 더 발전할까 생각하니 몹시 부러웠다. 그러나 이번 마스터 클래스의 포인트는 임동혁 님의 시범이었다. 연주한 학생들 서운하라고 하는 소리는 절대 아니고, 같은 곡인데 다른 소리가 났다. 몇마디 치지 않은 잠깐의 연주에서도 뚫고 나오는 소리의 힘이 남달랐다. 청아함도, 강렬함도, 깊이도... 누가 들어도 확연히 달랐다. 실시간 댓글에도 임동혁 님의 소리를 언급하며 감탄이 이어졌다. 그래, 저런 소리를 내야 하는데... 저런 소리는 어떻게 나오는 걸까.

유튜브 채널 또모의 “피아니스트 임동혁의 마스터 클래스”

 요즘 피아노 레슨 시간에 가장 신경 쓰이는 부분이 소리인데, 예전보다 내 소리가 더 거슬리기 때문이다. 피아노 선생님은 좋은 소리를 내는 방법은 소리를 잘 듣는 것이라고 한다. 어찌 보면 정말 간단한 방법 아닌가. 피아노를 연습할 때 소리를 듣지 않고 할 수 있나. 한 음을 누르건, 여러음을 한꺼번에 누르건, 아무튼 소리가 들린다. 이렇게 쉽게 나는 소리다 보니, 소리보다는 손가락이 제자리를 찾고 있는지, 속도는 제대로 내고 있는지에만 집중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연습이 잘 풀리지 않을 때는 양손을 따로 연습하고, 그것도 속도를 확 줄여서 연습해야 되는데, 우리는, 적어도 나는 그런 연습 방법을 별로 즐기지 않는다. 자동차가 속도를 내야 신나는 것처럼, 피아노도 처음부터 끝까지 완주해야 연습하는 재미가 있다. 목적지에는 누구보다도 빨리 도착해 있겠지만, 정신없이 달리다보면 아름다운 풍경들을 놓치는 것처럼, 좋은 소리들도 다 놓치게 된다. 그렇지 않은가?


 헬스장에서 근육 운동을 할 때도 비슷하다. 무작정 아령을 들어올린다고 그게 운동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내 팔의, 내 등의 어느 지점을 자극하는지 집중하면서 아령을 들어올려야 근육이 생기고 운동이 되는 것이다. 아무 생각없이 들어올리는 아령은 힘자랑일 뿐이다. 단순해 보이는 근육 운동도 제대로 하면 섬세함이 꽤나 필요한 것처럼 피아노도 그냥 누르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다. 건반을 누름과 동시에 거기서 나오는 소리에 하나 하나 집중해야 된다.


 그렇게 하면 피아노도 무슨 근육같은 거라도 생기는 걸까. 그렇다. 소리에 근육이 생긴다. 근육 운동을 통해 우리의 몸이 변하는 것처럼 소리도 달라진다. 소리를 하나하나 주의 깊게 듣는 것만으로도 얕았던 소리는 깊어지고, 성의 없던 소리는 진중해진다. 16분음표로 이어지는 빠른 속도로 움직여야 하는 구간에서도 그 어떤 음표도 잃어버리지 않고 옥구슬 굴러가듯 또렷해진다. 오른손과 왼손의 화음이 어우러지는 부분에서는 풍성함이 묻어나고, 혼잣말같던 트릴은 선명하게 들리는 그런 신기한 마술이 일어난다. 그렇게 소리에 근육이 생긴다.


 다시 근육 운동으로 돌아가서, 고작 몇번 그렇게 운동한다고 근육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잠깐은 근육이 나올수도 있지만, 그 근육을 오랜 시간 유지하는 것은 또다른 이야기다. 피아노도 역시 마찬가지다. 소리의 근육을 만들고 유지할 수 있게 소리 하나 하나에 집중하면서 내가 어떤 소리를 내고 있는지 끊임없이 관찰해야 한다. 연주자들이 지금의 훌륭한 소리를 갖게된 것도 그런 훈련 방식이 몸에 굳었기 때문이다. 피아노란 악기는 무척 섬세하기 때문에 좋은 소리를 위해서는 엄청난 인내심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시간을 줄이는 유일한 방법은 내가 내는 소리에 집중하는 것 뿐이다.


 하나하나의 과정에 집중하기 보다는 얼마나 빨리 끝낼지, 손쉽게 해낼지에만 신경쓰는 일은 허다하다. 결과의 디테일이 어떻게 달라질지, 그것부터 생각하는 경우는 사실 드물 것이다. 처음에는 큰 차이를 못 느낄지 몰라도 그런 작은 결과들이 쌓이고 쌓이면 결국에는 그 차이가 커지기 마련이다. 피아노 뿐 아니라 모든 일이 대부분 그렇게 되기 쉽다. 인정하기 싫지만. 어쩌면 나의 꿈, 나의 목표는 내가 원했던 지점과는 다른 곳에 와있을지도. 흠...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아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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