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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아나 May 10. 2018

박아나의 일상뉴스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랐다!

 화제의 영화,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를 봤다. 마블표 개성 넘치는 히어로 캐릭터들 사이에서 '신스틸러'라고 표현해야 할까 소리 없이 강한 캐릭터가 인상적이다. 나무 모습의 외계인, 그루트인데, 사춘기 아이들처럼 게임하느라 고개도 들지 않는다. 동료들이 불러도, 심지어 적이 나타나도 시큰둥하던, 그랬던 그루트가 토르의 망치가 완성돼야 하는 순간, 극적인 모습을 보여 주는데...! 너무 자세히 말하면 스포일러가 되니 이쯤에서 그만두겠다. 중요한 건 토르의 힘의 원천인 망치는 나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베이비 그루트 시절, 이제 많이 컸네.  사진출처: 중앙일보

 나무의 존재감은 나로서는 이맘때 가장 많이 깨닫는다. 슈렉의 피부색처럼 변한 주차장의 차들을 보면서 말이다. 올해도 소나무에서 송홧가루를 많이 뿜어내는구나, 어디까지 꽃가루를 보내는 걸까. 그 위세가 대단하다. 테라스 밖에 내놓은 의자도, 테라스 바닥도, 어느 한 곳 빼놓지 않고 누런 녹색의 가루들로 물들었다. 뭐, 나무가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는 증거겠지. 미국 브리슬콘 소나무는 4700년 이상의 나이를 자랑한다고 한다. 앞으로 지구가 사라지지 않는 한, 송홧가루는 계속 날아다닐 것이다. 앞산에 나무들도 더 이상 연둣빛 모습들이 아니라 초록빛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어찌나 숱이 풍성하게 자랐는지 얼핏 보면 브로콜리들이 모여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 달 전과도 많이 변했지만, 특히 겨울의 앙상했던 모습을 떠올리니 달라도 너무 다르다. 너네 언제 그렇게 살쪘니?

의자고, 탁자고 송홧가루로 엉망이다. 알레르기 주범으로 오해받지만 실제로는 거의 알레르기를 유발하지 않고,  몸에 좋은 성분까지 많이 들어있다고 한다.



 지난 겨울 엄청나게 추웠다. 그랬었나 싶지만 그랬다. 추위와 싸우며 겨울을 나던 나무들 중에 못 버티고 전사한 아이들을 볼 때마다 지난 겨울의 추위를 잊을 수 없다. 우리 집 대나무가 그렇다. 소나무,  매화나무와 함께 추운 겨울의 세 가지 벗이라 해서 세한삼우라 불렸던 너였는데... 큰 추위에 더 이상 벗으로 남지 못하고 말았다. 그 전에는 아무 일 없이 잘 버텨 주었는데,  이번에는 좀 어려웠나 보다. 키가 큰 대나무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살펴보고 있는데, 가만 보니  뭔가 초록빛이 보인다. 그 죽은 대나무 사이에 소나무 새순이 올라오고 있다. 송홧가루가 제대로 잘 정착했나 보다. 손하나 대지 않았는데, 바람 타고 날아온 자연의 신비는 놀랍다. 어디선가 날아온 꽃가루들이 낯선 땅 속에 자리를 잡고, 어느 순간 땅을 뚫고 올라오는 것이다.    

소나무 새순 장하다!

 라벤더와 로즈메리 허브 자매들도 모두 하늘나라로 갔다. 라벤더는 사실 로즈메리에 비해 추위에 훨씬 약해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로즈메리는 이미 두 번의 겨울을 견뎌낸 지라 괜찮을 줄 알았다. 명을 다한 허브 자매들을 다 뽑아내고 그 자리에 다른 씨앗들을 심었다. 며칠 뒤, 그 자리에 로즈메리 새순이 돋기 시작한다. 완전히 죽은 줄 알았는데, 땅 속에 새로운 생명이 추위를 피해 조심스럽게 숨어있었나 보다.  과학자 호프 자런이 쓴 '랩 걸'이라는 책에서 읽은 부분이다. "숲에 들어간 사람들은 대부분 인간으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높이로 자란 큰 나무들을 올려다볼 것이다. 그러나 발아래를 내려다보는 사람은 드물다. 발자국 하나마다 수백 개의 씨앗이 살아서 기다리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렇다. 나는 죽은 나무는 봤지만, 그 아래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씨앗은 알지 못했다. 1년이고, 2년이고 씨앗은 기다린다. 그리고 기회를 기다리다 생명을 이어나간다. 물론 모든 씨앗들이 다 기회를 잡는 것은 아니지만, 나의 로즈메리의 어떤 씨앗은 기회를 잡은 것이다. 내 눈에 들어오기 훨씬 전부터,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의 역사는 시작되고 있었다.  

 

사진의 정가운데 올라.오고 있는 뾰족뾰족한 로즈메리 잎들

 마음의 씨앗은 누구에게나 있다. 어떤 사람은 씨앗이 다 자라서 벌써 열매를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이제 막 씨앗을 심고 있는 중일 수도 있다. 요즘 나도 기획하고 준비하고 있는 게 있다. 지금 단계를 굳이 말하자면, 씨앗을 심고 때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물론 그냥 가만히 기다리기만 해서 되는 일은 아니다. 씨앗이 땅을 뚫고 나와 새싹을 틔우려면 햇빛과 물이 필요하듯이, 내가 기획하고 있는 것들도 더 다듬고 고치면서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그런 노력과 인내의 시간을 거쳐, 때가 되면 싹이 돋는 것이다.


 물론 싹을 틔웠다고 해서 다 꽃을 피우고 원하는 모양으로 자라는 것도 아니다. 나무들을 보라. 여러 개의 꽃을 피울 수도 있고, 꽃이 피지 않은 채로 키만 쑥 자라는 경우도 있다. 우리 집 목련도 이번 해에는 꽃이 피지 못하고 연둣빛 잎만 쑥쑥 자라고 있다. 목련도 말 못 할 사정이 있겠지. 꽃을 피울 수 없는 나름의 사정이 있겠지. 목련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우리 마음속 씨앗도 마찬가지다.  아름답고 화려한 결과가 아닐 수도 있다. 그래도 어떠랴. 무엇이든 시도는 했다. 이번에 꽃이 피지 않았다 해도, 내년에 더 잘 신경 써서 관리하면 꽃이 피지 않을까? 지금 당장은 아니어도 다음에는 좋은 기회가 오지 않을까? 다만, 씨앗을 심어야 한다는 것.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잊지 말아야겠지만.

일단 씨앗은 심어보자!

 완연한 봄 날씨에, 고맙게도 요 며칠은 미세먼지로부터 자유롭다. 하늘도 선명하고 나의 마음도 선명하다. 미술관에서 멋진 그림들을 보고 밖에 나오자마자,  '아니! 설레는 풍경들이 여기 더 많잖아!'라고 여겨지는 날들이다. 그 풍경의 중심에는 나무가 있다. 나무들도 이 날씨를 즐기고 있을까 생각하니, 그건 나무 속도 모르는 이야기다. 봄에는 한창 자라느라 바빠서 날씨를 즐길 여유가 없다. 여름이면 이미 성장 속도를 늦추고 겨울 준비를 시작하는 게 나무들의 속성이다. 뭐, 어쩔 수 없네.  자라느라 바쁜 나무들 대신, 우리가 나무를 보고 즐길 수밖에. "우린 너희들보다 훨씬 오래 살아서 틈틈이 많이 봤다. 즐길 수 있을 때 즐겨라!" 어떤 나무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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