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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아나 May 17. 2018

박아나의 일상 뉴스

어느 비 오는 날의 안목

 아침부터 비가 오락가락한다. 강남역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다행히 소강상태. 그것도 잠시, 툭툭 물방울이 머리 위로 떨어진다. 우산을 급박하게 펼치자마자 버스가 도착한다. 운이 좋다. 비를 피했다. 버스가 달리자 비가 점점 거세진다. 기사 아저씨의 한숨 소리. 비가 참 많이도 오네! 나도 속으로 그러게요... 어느덧 내려야 한다. 운이 나쁘다. 비를 제대로 만났다.


 천둥과 번개가 그야말로 세트로 몰아친다. 우르르쿵쾅, 번쩍번쩍. 무섭다. 발걸음이 빨라진다. 혹시 몰라 우산의 방향을 비스듬하게 기울여본다. 조금만 더 걸으면 집이다. 조금만 더! 운이 좋다. 다행히 벼락 맞지는 않았다. 집에 들어와 신발을 벗었다. 신발 안도 다 젖었다. 아끼는 신발인데, 이를 어째... 신을 말려 본다. 창밖을 보니 비가 그쳤다. 운이 나쁘다. 다른 신발 신을 걸. 조금 있다 내릴 걸.   


 나는 일본에서 가장 날씬하다는 ‘비 사이로 막가’상은 아니었다. 아재 개그로 실례했습니다만, 나의 운을 시험하듯 비 다 맞으며 아침부터 부지런히 다녀온 곳은 서점. 둘러볼 책들이 있어서 갔다. 아침에 서점이 막 문을 열 때 가면 사람이 없어서 좋다. 새 책의 향기를 독점할 수 있다. 책도 밤 사이 쉬면서 향이 더 짙어지나 보다. 아무도 없으니 책들이 다 내 책 같다. 서점은 내 서재인 것 같기도 하고. 역시 서점은 아침에 가야 제맛이다.

'LG 이대형, 비 사이로 막가'라는 기사가 있긴 하네요. 나만의 개그아님 인증.           사진출처: 스포츠조선

 언제부터인가 서점을 찾는 일은 수고스러운 일이 아니라 기꺼이 하는 일이 되었다. 소확행. 내게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은 사람이 붐비기 전 서점에서 책 구경을 하는 것이다. 마치 내 서재인 것처럼 이리저리 기웃거리다가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한다. 베스트셀러에 오른 것도 아니고, 유명 작가의 책도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끌려서 사게 된 책. 그렇게 고른 책이 재밌기까지 하면, 그날이야말로 진짜 운수 좋은 날이다. 운도 운이지만, 좋은 책을 알아본 내 안목을 칭찬하고 싶구나.


 이렇게 칭찬하고픈 안목은 수많은 경험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특히 실패의 경험들을 통해서 다져진다고나 할까?  "옷 잘 입으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라고 누군가 물어보면, 난 주저 없이 옷을 많이 사 입어봐야 된다고 말한다. 그렇게 해서 옷을 잘 고르게 됐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이야기다. 돈이 좀 든다는 게 치명적 단점이긴 하지만. 쇼핑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한 언니가 패션 잡지를 열심히 구독해서 감각을 키우고 있다고 언젠가 말한 적이 있다. 잘하고 있다고 칭찬했다. 잡지를 읽으면 유행이 무엇인지는 파악할 수 있으니까. 그래도 그것과 자기 스타일을 찾는 것은 다른 문제다. 열심히 잡지를 구독하는 것보다는 열심히 다니면서 옷을 사보는 게, 아니면 사지 않더라도 옷을 직접 대보는 게 훨씬 확실한 길이다. 좋은 책을 발견하는 일도 그렇다. 많이 읽어야 된다. 그게 안되면 서점에 가서 책 표지라도 자주 들춰봐야 된다. 오늘도 나는 좋은 책과 만나기 위해 서점을 찾는다. 좋은 책을 남들보다 먼저 찾아내서 느끼는 그 쏠쏠한 즐거움. 놓치고 싶지 않다.

제 서재는 아니지만 말입니다...

 안목을 쌓는 일은 갈수록 까다로워진다. 세상은 빠르게 돌아가고, 관심사는 계속 변한다. 새로운 정보들은 쏟아지고, 고려해야 할 가치도 다양하다. 반면에 체력과 열정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나의 현실이 특히 그렇다. 다방면에 안목을 갖추고 있다면 참 좋으련만, 그러기엔 경험의 폭이 좁다. 그렇다고 하나에 집착하는, 뭐랄까 오타쿠 같은 면이 있다면 그것도 참 좋으련만, 그러기엔 산만하기 그지없다. 다행히 SNS를 통해서 좋은 안목을 공유하는 사람들 덕분에, 나의 안목은 달랑달랑 유지되고 있다. 책도 그렇다. 내가 직접 책을 발굴해내는 기쁨도 크지만, 매일 쏟아져 나오는 책을 다 읽을 수는 없는 법. 주변에 책 좀 읽는 사람들이 있어 서점에 가지 못하는 날에는 그들의 SNS를 둘러본다. 요즘 무슨 책 읽나 두리번거리다 보면 슬슬 답이 나온다. SNS의 그들은 좋은 책을 숨기지 않고 공유하고, 친절하게 감상평까지 올려준다. 서평만으로도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한껏 부풀어 오른다. 심지어 책 한 권 다 읽은 것 같기도 하다. 이렇게 자꾸 들여다보면 없던 안목도 쌓이려나?


한 달에 몇권씩 읽는 건지... 나의 지인, shelters님 SNS    요즘 말로 ㅇㅈ!

 그나저나 나의 안목을 시험해 볼 일이 생겼다. 드디어 요 몇 달 사이 고심해 왔던 기획물이 공개된다. 글을 쓰면서 콘텐츠를 생산하는 일이 얼마나 매력적인지를 알게 됐는데, 또 다른 콘텐츠인 팟캐스트에 도전하게 된 것이다. 예전에 방송을 진행할 때는 영화배우 황정민 씨의 수상 소감처럼 잘 차려진 밥상에 앉아 맛있게 먹기만 하면 됐다. 이번에는 다르다. 밥상도 차리고, 숟가락도 얹는다. 팟캐스트 기획은 처음이라 사실 걱정이 많다. 말하기 코칭이라는 분야가 팟캐스트에 어떻게 녹아들지도 걱정이고, 사람들이 많이 들어줄까 그것도 걱정이다. 부디, 팟캐스트라는 콘텐츠와 내가 잘 어우러질 것이라는 판단을 한 내 안목이 틀리지 않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 팟캐스트가 안목 좋은 많은 분들의 귀를 붙잡아 사랑받는 콘텐츠로 성장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26회 청룡영화제, 황정민 배우의 화제의 수상 소감. 사진출처:마이데일리

 '도전'이라는 말을 실천 없이 말로만 던지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이젠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게 됐다. 도전이라는 단어는 나에게 공허한 말이 아니다. 이 단어에 더 이상 빚진 느낌이 없게 나의 도전은 당분간 계속될 것 같다. 그리고 그 도전은 잘 될 것이라는 내 안목을 믿고 싶다. 비는 홀딱 맞았지만 내 운이 어느 정도 나를 도와줄 것이라고 믿고 싶다. 세상의 도전하는 모든 이들에게 건배하고 싶은 밤이다. 도전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기도 하고. 이미 조촐하게 맥주 한 잔 하고 있기도 하고.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기도 하고.

같이 기획하느라 고생한 짝꿍,지니가 있어 안심이다.             말~하자면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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