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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아나 May 24. 2018

박아나의 일상뉴스

성질 급한 사람

 나도 몰랐다. 내가 그렇게 성질이 급한 사람인지. 사람들도 늘 나보고 느긋해 보인다고 했었고, 나 자신도 그렇게 느꼈었는데… 알고 보니 다 연기였나 보다. 연기라면 여우 주연상 감이군. 본인도 속였으니. 


 요즘 나는 팟캐스트를 준비하면서 '새로운 나'를 만나고 있다. 이 새로운 나는 아이디어가 많다. 이런저런 의견을 막 쏟아낸다. 일단 시도해 본다. 여기까지만 보면 뭐 이상할 것이 없다. 이다음부터가 문제다. 뭔가 이 과정 자체가 빨리빨리 이루어지지 않으면 속이 답답하다. 나를 들볶는 건 괜찮은데, 혹시 남도 들볶는 건 아니겠지? 과속은 원래 위험한 건데, 과속해야 안심이 되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영화 "과속스캔들" 과속해서 참 잘 된 경우랄까. 사진:스타뉴스

 새로운 도전. 그것도 기획부터 제작까지 내 손을 다 거쳐하다 보니 해야 할 일들이 매일 써서 내야 하는 보고서처럼 쌓인다. 라디오 디제이를 많이 해봤으니까 뭐 그렇게 어렵겠어?라고 생각했지만, 직접 뛰어들어보니 달랐다. 라디오 디제이 시절에는 진행만 하면 됐는데, 이제는 피디도 됐다가, 작가도 됐다가, AD도 됐다가, 컴퓨터 전문가도 됐다가, 변신의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 아... 진행도 해야 되는구나! 어느 장단에 맞춰야 될지 모르겠지만, 신이 나긴 한다. 너무 흥이 오른 나머지 덩실덩실 어깨춤만 추면 되는데, 어려운 아이돌 안무에 거침없이 도전하는 격이랄까.  

방탄소년단 'fake love'  나는 감히 따라하지 않을란다. 사진:한국일보

 라디오 스튜디오 안이다. 방송 시작 1분 전. 그러나 내 손에 원고는 없다. 피디와 작가에게 원고를 달라하니 없단다. 그럼 오프닝은 어떻게 하냐 했더니, 그냥 책을 읽으란다. 책이요? 건네받은 책의 책장을 막 넘기는데, 방송 시작을 알리는 불이 들어온다. 아... 아직 책장도 다 못 넘겼는데... 당황하며 꿈에서 깬다. 회사 그만두고는 일과 관련된 꿈을 꾼 적이 없었는데, 오래간만이다. 아나운서들이 자기 일과 관련해서 꾸는 악몽 중 대부분은 라디오 뉴스를 펑크내는 것이다. 사실 '빵꾸'라고 표현해야 실감이 난다. 그러니까 제시간에 맞춰 라디오 스튜디오에 가지 못해 다른 사람이 급작스럽게 대신하거나, 최악의 경우는 아무 소리도 안 나가는 경우를 말한다. 실제로 아나운서들의 방송 사고 대부분은 여기서 발생한다. 나도 라디오 스튜디오를 시간에 맞춰 갔는데, 스튜디오가 다른 곳으로 옮겨져 방송 사고가 난 적이 있다. 놀라지 마세요. 꿈이었습니다. 방송국 다닐 때처럼 ‘빵꾸’ 비슷한 꿈을 꾸는 걸 보니, 팟캐스트 때문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나 보다. 신경을 쓴 만큼 결과도 좋길 바랄 뿐이다.  


 처음에 '새로운 나'에 놀라서 성질 급한 사람으로 나를 몰아붙였는데, 글을 쓰다 보니, 내가 왜 그러는지 이해가 된다. 그래, 나 정말 일하고 싶었나 보다. 그동안 한참 쉬어서, 이제는 정말 열심히 달리고 싶었나 보다. 트레드밀 위에서만 달렸던 내가 진짜 일 세계로 뛰어들어 달리게 됐다. 


 생각해보니, 나라는 사람, 원래 속도감이 있는 사람이었다. 밥. 빨리 먹는다. 걸음. 빠르다. 잠. 잠도 빨리 든다. 말만 느긋하게 할 뿐이지 알고 보면 성격이 급했네, 급했어. 피아노도 빠른 곡을 좋아했다. 어렸을 때 빠른 곡을 칠 때는 열심히 연습했었는데, 느린 곡을 치면 지루해했다. 빠른 곡을 치면 왠지 좀 잘 치는 사람처럼 보인다고 생각했나 보다. 뭔가 속이 후련해지는 맛도 있고. 나이가 들어 다시 피아노 앞에 앉고 보니 빠른 곡보다는 느린 곡에 더 끌린다. 한음 한음 정성스럽게, 그 섬세한 감정을 절절히 표현해내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아서일까? 인생을 '조금' 알고 나니 취향도 바뀌고, 생각도 바뀐다. '아주 조금'의 변화겠지만. 

이렇게 빨리 달리는 열차에서는 바깥 풍경을 제대로 볼 수 없겠지. 동영상도 타임랩스로 찍는 걸 보니 정말 급한 성격?

 이렇게 원래 성격 급한 사람이었던 나는 회사 다닐 때는 그런 성격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오히려 정반대의 모습만 보였다. 정말이지 여유 넘치는 말들만 쏟아냈다. 어떤 외부 자극에도 서두르지 않았다. 때로는  그런 자극들을 모르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렇게 해야 마음의 상처를 덜 받을 것 같았다. 프로그램을 계속하지 못하게 되거나, 원하는 자리에 있지 못하더라도, 느긋해 보이면 쿨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자존심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가치고, 그것을 지키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난 느긋하고 둔감한 대응으로 나의 자존심을 지켰다. 아니, 지켰다고 믿고 싶다. 어떤 후배가 그런다. 선배는 정말 여유로워 보였다고. 다른 사람들은 다 아등바등 애쓰는데, 그런 거 신경 안 쓰는 사람 같다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매우 달라 보였다고. 남들 눈에도 내가 꽤 여유 넘치는 사람으로 보였긴 했나 보다. 그 후배는 지금의 나를 만나면 어떤 이야기를 할까? 진작 그러시지 그랬어요... 이럴라나!


 새로운 나, 다시 말해, 빠른 속도를 되찾은 나는 오랜만에 속도를 내다보니 속도 조절이 잘 안 될 때가 있다. 나도 적응이 잘 안되는데, 주변 사람들도 나의 변화에 조금 놀랄 것 같다. 당분간은 성격 급한 모습을 유지할 테니 적응하라고 말해줄 수밖에. '부르고뉴, 와인에서 찾은 인생'이란 영화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사랑은 와인과 같아. 시간이 필요해. 숙성이 필요하거든." 사랑만 시간이 필요하겠나? 내가, 한 인간이 성숙하는 데도 시간이 필요하다. 지난 시절 회사에서 조용히 웅크리고 지냈던 시간들을 숙성의 시간이라고 생각하면 좋겠다. 누구든 숙성의 시간이 필요한데, 내겐 그때 그 시간이 숙성의 시간이었다. 좀 길었다. 그럼, 숙성이 잘 됐겠지, 뭐.

  영화 '부르고뉴, 와인에서 찾은 인생' 의 세남매. 사진 :sbs뉴스

 이제 오크통에서 나와 세상과 호흡할 시간이다. 병을 열기 전까지 이 와인은 어떤 아로마를 갖고 있는지, 어떤 맛이 강할지 알 수 없다. 나의 새로운 도전도 마찬가지다. 아직 그 맛과 향을 규정할 수는 없지만, 바라건대, 신의 물방울급 반응이 나온다면 얼마나 황홀할까? 신의 물방울은 욕심이 과했다. 잔잔한 반향이라도 일으켰으면 좋겠다. 와인 메이커가 새로운 와인을 내놓고 사람들의 평가를 기다리는 마음이 이런 거겠지. 급한 마음은 잠시 내려놓자. 갈 길이 머니까. 지치지 않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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