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여행
사람들이 요즘 내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또 전시회 가?” 일 것이다. 갤러리에서 눈을 껌벅이며 다니는 키 큰 여자를 본다면 나일 가능성이 꽤나 높다. 밖으로 너무 돌다 보니 안에서 진득하게 하는 일들이 멀어지는 부작용이 있긴 하다. 독서나 글쓰기 같은 것들이 떠오르는데, 서점에 가본 지도 오래된 것 같다. 한때는 서점을 갤러리 드나들 듯 갔던 시절도 있었는데, 특히 ebs에서 책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부터 몇 년 사이 책에 꽂혔을 때, 이제는 누군가 보내주는 책들을 간신히 챙겨볼 지경이다. 그나마 미술 관련 책들은 붙잡고 있어, 아니 읽어야 해서 , 그나마 다행이다.
그다음으로 가장 많이 듣는 말은 “어디 전시회가 제일 좋았어?”이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쉬우면서도 동시에 까다롭다. 일단 많은 전시를 다녔기 때문에 어디가 좋았는지 이야기해주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러나 물어본 사람의 취향과 상황을 고려해서 최대한 맞춤형 대답을 찾으려고 노력하기에, 내 대답에 책임져야 할 것 같은 강박증이 있는 편이라, 그런 의미에서 쉽지 않은 질문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오랜만에 영화업계를 주름잡는 친구를 만났다. 그녀는 최근 전시회에 갈 여유가 없었다며 전시회를 추천해 달라고 했다. 영화와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문화적 소양이 엄청난 그녀가 좋아할 전시란 무엇인가… 일단 그녀의 상황이 내게 힌트가 되었다. “런던을 가려고 표까지 사놨는데, 당분간은 떠날 수 없어요…” 그런 그녀에게 시립 미술관 북 서울관에서 열리고 있는, 5월 8일이면 끝날 <빛 : 영국 테이트 미술관 특별전>라는 카드를 꺼내본다.
예술의 전당의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 전에서 영국 현대 미술의 거장의 작품들 사이를 거니는 것도 런던의 소호 거리까지는 아니어도 훌륭한 선택이다. 예술은 우리를 어디로든 보낼 수 있다. 런던이든, 파리든, 뉴욕이든. 그리고 과거이든, 현재이든, 미래이든.
내가 미술관이나 갤러리를 좋아하는 이유는 어쩌면 여행일지도 모른다. 내가 서 있는 그곳에서 다른 곳을 꿈꾸는 마음, 언제라도 떠날 준비가 돼있는 것처럼 붕 뜬 정신상태, 멋지게 포장하면 새로운 곳에 대한 갈망과 호기심 같은 것들, 아마 그런 게 여행이겠지. 지난 2년 동안 갇혀있던 세상 속에서 우리는 조심스러우면서도 꽤나 강렬하게 여행을 꿈꿨다. 실제로 우리는 답답한 세상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여행을 많이 다녔다. 미술관이나 갤러리는 그동안 우리의 진짜 여행지를 대신할, 때로는 능가할 정도의 멋진 여행지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새로운 자극과 아름다움을 찾아서 미술관이나 갤러리로 여행을 간다. 그리고 거기에 도착하자마자 또 다른 여행이 시작된다. 작가가 처한 환경, 예를 들어, 작가의 출신지일 수도 있고, 현재 작가가 살고 있는 곳일 수도 있다, 이 작품에 녹아져 있다. 밝고 유쾌한 작품들을 보면 LA의 힙한 어느 지역이 떠오르기도 하고, 꽤나 진지한 실험적인 라인과 터치들을 보면 혹시 베를린일까 상상해 본다. 그리고 우리도 함께 그곳으로 날아간다. 다행히 전시장에는 갤러리에서 준비한 전시에 대한 설명들을 담은 친절한 종이 한 장이 있어, 풍부한 상상력이나 미술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어디로 갈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요즘 전시장에는 가끔 QR코드로 작품 해설을 만날 수도 있는데, 적어도 미래로의 여행은 떠날 수 있는 셈이다.
작품을 통해서 우리는 시간 여행도 가능하다. 서울 시립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조각가 권진규의 전시회가 그랬다. 치열하게, 그리고 처절하게 힘들었던 그의 삶의 시간들이 그의 조각 작품들이 말 그대로 조각조각 품고 있었다. 인상 깊었던 작품 중의 하나는 <손>이었다. 손을 많이 쓴 노동자의 손과 닮은 작가의 손은 오직 예술에만 전념한 그의 삶이 뭉툭하게 닳은 채로 녹아있다. 내 손과 비교하며 한참을 서있노라면, 왠지 모를 미안함도 몰려온다.
어떤 사람들은 전시를 보면서 피로함을 느낄지도 모른다. 젊은 시절부터 죽음까지를 한 번에 경험한 그런 여행이었기에 시간의 변화폭이 넓다. 이런 부담스러운 여행을 왜 가야만 하는가. 전시회의 마지막 작품은 <가사를 입은 자소상>에서 평화와 해탈로 우리를 안내한다. 여행의 끝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자, 그렇다면 어디로 여행할까? 오늘도 다음 여행지로 발걸음을 재촉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