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아나 Jun 07. 2018

박아나의 일상뉴스

인생도 편집이 되나요?

 팟캐스트 제작에 꼭 필요한 단계인 오디오 편집을 배우고 있다. 지금은 도움을 받고 있지만, 편집도 곧 내 손으로 해야 할 수도 있다. 기계치인 나는 편집에 대해 공포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있지만, 배우다 보니 조금씩 자신감이 붙어가고 있다. 그래도 처음 해보는 일이라 애써 녹음한 내용을 날리면 어쩔까, 편집의 맛을 잘 살릴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은 여전하다. 편집이라는 작업 자체가 반복적이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인 것도 마음에 걸린다. 생각만 해도 목 뒤가 뻐근하다.  


 만약 내가 라디오 피디라면 무조건 생방송만 하고 싶을 거다. 청취자들이 보내주는 실시간 문자를 바로 소개할 수 있으니 생생한 재미와 활력이 보장된다는 점이 가장 중요한 이유겠지만, 편집이라는 후작업을 피하고 싶어서다.  예전에 라디오를 진행할 때, 공휴일에도 생방을 고집하는 피디를 보며, 하루 정도는 녹음을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내 생각이 너무 얕았다. 이번에 편집의 세계를 경험하고 나니, 라디오는 생방이 정답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재미는 둘째 치고, 아무리 담당 피디라도 녹음하면서 들었던 방송을 몇 번씩 다시 들어가면 편집하는 일이 매번 즐거울 수는 없는 일이다. 정말 사람은 경험하지 않으면 남의 고충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라디오 피디라면 배철수 선배님과 일하고 싶다. 생방에 최적화된 최고의 디제이니까. 사진 :한국일보

 편집 기능 중에 가장 많이 쓰는 것은 불필요한 부분을 들어내는 ‘잘라내기’ 일 것이다. 필요 없는 부분을 블록으로 지정한 뒤, 가위 모양의 버튼만 누르면 감쪽같이 사라진다. 그리고 또 많이 쓰는 기능은 ‘붙여 넣기’인데, 내가 첨가하고 싶은 내용을 적당한 위치에 끼워 넣는 것이다. 이것 또한 몇 번의 손놀림으로, 쉽게 붙여 넣기가 가능하다. 물론 이런 기본적인 기능만 했을 때야, 편집 뭐 별거 아닌데 하겠지만, 편집은 누구 표현대로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다. 잘라내고 붙여 넣는 것 외에 여러 가지 효과도 필요하다. 듣고 또 듣고, 만족할 수 있는 상태까지 마우스를 끝도 없이 클릭해야 한다.  한마디로 시간 싸움, 체력 싸움이다. 뒷목 잡고 싶은 뻣뻣한 목, 침침한 눈과 함께, 시큰한 손목은 덤이다.

    

고뇌의 편집 시간... 잘 할 수 있을까?

 오디오나 영상은 필요하지 않은 부분과 필요한 부분을 얼마든지 편집해서 빼거나 넣을 수 있다. 실제로 방송에서는 원래 촬영했을 때보다 방송에 나가고 나서 시청자들에게 더 큰 재미와 감동을 주는 경우가 많다. 다 편집 덕분이다. 인생도 이렇게 편집 기능이 있어서 필요한 부분과 필요하지 않은 부분을 없애고 살려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대부분 우리가 한 말이나 행동들은 거두어 들일 수 없다. 그나마 정정할 수 있는 기회를 바로 잡았다고 해도 아무 일도 없었던 일로 되는 것은 아니다. 내 마음에도, 상대방의 마음에도 희미하게 자국은 남으니까.   


 아나운서로 일하면서 크고 작은 실수들을 많이 했다.  녹화 방송이야 편집을 하면 문제 될 게 없지만, 생방송일 경우에는 주어 담기 힘들다. 한 번은 생방송 뉴스를 진행하다가 마지막 인사를 하는 부분에서 "지금까지 시청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라고 끝을 맺어야 하는데, "지금까지 시청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까?"라고 의문문으로 끝낸 적이 있다. 뉴스 끝날 때마다 수도 없이 반복해 온 말이다. 도대체 왜 그랬는지 알 수 없다. 이런 실수야말로 정말 삭제하고 싶다. 하나를 생각하니 또 다른 실수들도 떠오른다. 이번 참에 다 삭제하자. 회사 생활하면서 제일 괴로웠던 순간도 삭제해 볼까? 심한 스트레스로 건강에 문제가 생겼을 때를 삭제한다. 그 밖에 나를 힘들게 했던 기억들까지 줄줄이 다 삭제한다. 이건 이래서 마음에 안 들고, 저건 저래서 싫었으니, 또 삭제, 또 삭제... 다 지우고 나니, 내 삶의 시간들이 너무 줄어들었다.

 

 이제 내 손에는 행복하고 즐거웠던 시간들만 남았다. 이 때도 행복했고, 저 때도 행복했다. 뭔가 이상하다. 한결같이 행복한 시간들만 남아 있으니 그 시간들이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는 건 기분 탓이겠지... 나쁘다는 건 아닌데 단조롭다. 인생도 음식처럼 단짠단짠일까? 달달한 음식들만 계속 먹으면 달달함의 소중함을 모른다. 짠맛을 봐야 다시 단 맛이 그리워지는 법. 인생도 달달하고 행복한 순간들만 이어진다면, 거기서 더 이상의 감정을 느끼지 못할지도 모른다. 불편하고 힘든 순간을 겪어야 그다음에 오는 즐거운 시간들이 더 달달하고 소중하게 느껴지는 거니까.

배우 고준희씨도 단짠단짠의 매력에 쏙~ 사진 : 스포츠조선

 좋은 순간만 남기고 인생을 편집해 보니, 생각보다 그리 좋은 지 모르겠다. 힘들고 아팠던 시간들이 있었기에 다른 시간들이 빛난 던 건데, 그 당연한 사실을 잠시 놓쳤다. 행복한 순간들만 이어진다면, 그게 행복인지 모른다는 사실을. 방송 편집과 인생 편집은 다르다. 방송이야 시청률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은 부분은 과감히 버리고 가면 된다. 인생은 다르다. 아무것도 의미 없는 시간들은 없다. 스트레스로 고뇌하던 때도, 몸이 아팠을 때도, 방송에서 실수를 했을 때도 나는 거기서 또 하나를 배우고 얻어 간다. 그 모든 시간들이 모여야만, 오늘의 행복도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는 거니까.


  인생은 편집이 안되지만, 삭제까지는 아니어도 뭔가 붙여 넣을 수 있는 기회가 딱 한 번 주어진다면 어떨까? 붙여 넣고 싶은 많은 순간들이 떠오르지만, 그중에 하나를 고르자면 독서하는 시간을 만들어 넣고 싶다. 회사에서 힘들고 지쳐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을 때, 정말 멍하니 앉아 있었던 시간들. 그 순간으로 다시 돌아가서 닥치는 대로 책을 읽는 시간들을 붙여 넣고 싶다. 그랬다면, 그랬다면... 지금 많은 것이 달라져 있을까? 상상은 이제 그만. 현실로 돌아오자. 지금 내 모습은 편집 없이 무삭제판으로, 이제까지의 좋고 나쁜 경험들이 쌓여서 만들어졌다. 멍하니 보낸 헛된 시간들은 먹기 싫은 쓴 약이다. 먹어 두면, 어떤 방식으로든 나를 깨닫게 하고 치유해 준다.

약들이 예뻐서 왠지 쓰지 않을 것 같아... 사진:이코노믹리뷰

 중요한 건 지금부터다. 앞으로 쌓아 올릴 나의 경험들을 겁내지 말고 받아들이고 싶다. 지금 고되고 힘들지라도 그 뒤에는 예상치 못한 행복과 마주할 수 있으니. 문득, 정말 문득, 여름휴가가 기다려진다. 어디로든 가볼까?

 

작가의 이전글 박아나의 일상뉴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