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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아나 Sep 14. 2018

박아나의 일상뉴스

Who am I?

 나는 만든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팟캐스트를 제작하고, 브런치에 글을 올리면서 뭔가를 만들어낸다는 것이 내 삶에 그렇게 큰 활력을 줄지는 몰랐다. 게다가 그것들은 '내 것'이라 더 뿌듯하다. 예전에 내가 했던 방송 프로그램들은 나 말고도 제작진들의 힘으로 만들어내는 부분이 훨씬 더 크기 때문에 온전히 '내 것'인 적은 없었다. 게다가 진행자는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프로그램을 내 것이라고 착각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되기도 하고. 지금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 것'이기 때문에, 돈을 벌지 않아도 돈을 번 것처럼 주머니가 두둑하다. 방송인 중에 크리에이터의 길을 걷는 다른 사람들도 여러 가지 이유로 내 것을 만드는 일에 뛰어들었겠지만, 이 '내 것'이 주는 보험 같은 든든한 느낌은 같지 않을까.

요즘 따라 내꺼인 듯  내꺼아닌 내꺼 같은 너... 소유x정기고 썸 사진 :osen

 요즘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소현이가 달라졌어요” 다. 그래, 나도 인정한다. 새로운 도전과는 거리가 먼 것 같았던 나는 매일매일 나를 넓혀나가는 작업을 계속 진행 중이다. 그 과정에서 가장 큰 수확은 사실 무언가를 계속 만들어내는 게 아니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나를 찾아가는 시간들이다. 내가 이렇게 의욕이 넘치는 사람이었나. 추진력이 좋구나. 아이디어도 많구나. 가끔 낯설다. 이런 내가.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나는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하고, 상사나 주변 동료들에게 싫은 소리 별로 안 하는,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은, 뭐라 한 단어로 표현해야 될까?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나를 융통성 없고 소심한 사람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꽤 많았을 거다. 나 조차도 너무 위축된 태도로 회사를 다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으니까.


 누구나 인생에 슬럼프는 찾아온다. 이런 시기를 잘 극복하고, 그다음 단계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으로 삼는 사람이라면 인생 고수일 텐데, 불행히도 나는 고수는 아니었다. 2년 차 정도 됐을 때 일이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를 좋아하지 않던 상사에게 제대로 찍히고 나서 하고 있던 방송에서 다 하차하게 되었다. 한창 여러 프로그램을 경험하고 커리어를 쌓아야 하는 중요한 시기에 할 일을 빼앗긴 나는 자주 휴가를 내고 마음을 달래러 여행을 떠났다. 어차피 주어진 방송도 없으니 회사에 나와도 눈치만 보였으니까. 현실 도피성 여행의 약발은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다. 여행에서 돌아오는 날에는 신데렐라의 황금마차가 자정이 지나 원래 모습인 호박으로 돌아오듯이, 서글픈 현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생각에 더 우울해졌다. 

도피성 여행으로 떠난 뉴욕의 할로윈 시즌 호박들. 호박은 죄가 없다. 

 아나운서를 그만둘까, 다른 길을 찾아볼까, 고민을 해봐도 답이 없었다. 여기서 이렇게 무너지면 다른 일이라고 더 나을 것 같지 않아 좀처럼 용기를 낼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위기의 순간도 나름의 기회였다. 그때는 어렸고, 물론 쉽지 않겠지만, 다른 길로도 충분히 갈 수 있었다. 그도 아니면 잘 버티면 되는 거다. 내실을 다지면서 다음을 준비하면 언젠가는 기회가 찾아올 수 있으니까. 그러나 나는 한없이 무너졌다. 우주 공간에 떠다니는 부유물처럼 무기력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유행어 같은 말도 나를 위로하지는 못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상사도 바뀌고 다시 프로그램을 맡게 되었지만, 이미 나의 자존감은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무엇을 해도 그렇게 자신감이 붙지 않았고, 어떤 프로그램을 만나도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나를 잃어버렸고, 나의 슬럼프도 쉽게 끝나지 않았다. 

아나운서 입사때만 해도 우주의 빛나는 별이고 싶었지...  사진: 헤럴드 경제

 슬럼프의 기나긴 끝은 회사를 그만두는 것이었다. 아픈 시간들이 그렇게 길 줄 몰랐지만, 새로운 시작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줄도 역시 몰랐다. 언제부터일까 내 속에서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뭔가를 채우고 싶었다. 매일매일 책을 읽었다. 영감이 떠오를 때마다 메모를 했다. 영감들이 모이니 글을 쓰고 싶어 졌다. 나를 표현하고 싶었다. 나는 괜찮을 거라고 외치고 싶었다. 지금 돌아보면 충전 같았던 그 시간이 지나고, 나의 일상은 이렇게 바뀌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노트북을 열어 메일을 확인하고, 동영상 편집을 하고, 다음회 구상을 해서 섭외를 위한 전화를 돌리고, 다시 내 글을 쓰기 위해 돌아온다. 나의 일은 주말에도 계속된다. 그렇다. 프리랜서의 삶은 누가 뭘 하라고 지시해서 일하는 게 아닐 뿐, 나를 향한 나의 요구는 끊임없이 계속된다. 자려고 누워서도 다음회는 어떻게 가야 하지, 섭외는 누구로 하지, 내일 아침에 당장 해야 할 일이 뭐지 이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한다. 

이런 책도 읽었구나. 논어, 결국 끝내지는 못했다. 
매일 가지고 다니는 영감 노트.

 처음에는 이런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럽기도 했지만, 어느덧 즐기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프리랜서로서의 삶도 재미있고, 크리에이터로서의 작업도 보람 있다. 그 가운데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나를 만나고 나를 알아가는 시간까지 더해지니 지금의 시간들이 참 고맙게 느껴진다. 어느 책 제목처럼 '무엇이 되지 않더라도' 조급하게 굴지 않겠다. '무엇'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나'에 초점을 맞춰, 나를 알아가는 시간으로 채워가려고 더 애쓸 것이다. 이런 말들을 할 여유가 생긴 것을 보니, 이제는 이렇게 말해도 되지 않을까. 나의 긴 슬럼프는 끝이 났다고. 

추억의 만화, 닥터 슬럼프.  뜬금없죠잉? 사진: 연합뉴스

p.s 요즘 주변분들이 제가 어떻게 지내는지 많이들 물어보세요. 그때마다 이렇게 저렇게, 장황하게 제 상태를 설명해 드리는데, 그러다 보니 한 번은 정리하고 넘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의 지금은 이렇습니다. 다음 달이 되면, 다음 해가 되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지금처럼만 하면 될 것 같아요. 더 열심히 하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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