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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아나 Feb 15. 2018

박아나의 일상뉴스

4. 평창 동계 올림픽을 보며

 빰 빠밤 빰빠바밤 빰~ 아버지가 즐겨보던 MBC 권투의 시그널을 들을 때마다 나의 토요일 오후는 암울해졌다. 아버지에게 채널권을 빼앗긴 채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으니까. KBS배 전국장사씨름 대회가 있는 날도, 내 기억으로는 명절에는 꼭 했던 것 같은데, 기나긴 연휴를 씨름팬 아버지가 독점했다. 뭔가 싸우고, 경쟁하고, 다투는 일을 보는 재주가 내 DNA에는 없었나 보다.  뛰거나 몸을 굴리는 걸 직접 하는 건 더 못했지만 말이다. 


 지금도 체육 시간에 하는지 모르겠는데, 우리 때는 체력장이라는 게 있었다. 100미터 달리기, 제자리 멀리 뛰기, 오래 달리기, 윗몸일으키기, 오래 매달리기, 공던지기. 그중에서도 제일 난코스는 오래 매달리기와 공던지기였다. 매달리는 건 문제없었다. 단지 오래 매달리지 못했을 뿐. 제일 많이 버틴 게 3초. 팔목 부러지는 줄 알았다. 공을 던지면 바로 앞에 떨어졌다. 난 분명 저 멀리 던졌는데 이상하다. 아버지는 그런 딸이 답답했는지 체력장 전날 공던지기 연습을 시켰다. 될 때까지 계속 던졌더니 어느새 제법 공이 날아가기 시작했다. 이젠 좀 되겠지 싶었는데, 정작 다음날 힘껏 던진 공이 또 바로 앞에 떨어지는 게 아닌가? 과도한 연습으로 팔이 잘 돌아가지 않았던 거다. 정말 억울했다. 진짜 열심히 연습했는데 이게 웬일인가? 이래서 뭐든지 무리하면 안 되나 보다.


 세월은 흘러 흘러 나에게 좌절감을 안겨 주던 체육 시간도 그리워질 나이가 되었다. 아나운서국에서 친한 선후배끼리 스노보드를 같이 배우러 간다기에 운동 신경 꽝인 내가 선뜻 따라나서게 된 것이다. 그 당시 붐이 일기 시작한 스노보드를 탈 줄은 알아야 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있었달까? 게다가 다들 스노보드는 처음이니 내가 잘 못 타도 괜찮을 것 같았다. 뒤로 넘어지고 앞으로 고꾸러지기를 수도 없이. 손목도 아프고 발목도 아프고 엉덩이도 아팠다. 그러나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고 했던가? 아니 재밌어진다고 했나 보다. 슬슬 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시즌권까지 챙겨 가며 틈이 날 때마다 보드를 타러 갔으니 말이다. 자신만만하게 내려오다 아주 제대로 넘어지기 전까지는. 머리가 바닥에 쿵하고 부딪히는 순간 노란 별이 몇 개 왔다 갔다 했다. 그때 사고로 목의 인대에 문제가 생겨 한동안 목을 가눌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 그렇게 나는 스노보드 세계에서 쓸쓸히 퇴장하였다. 

숀 화이트, 토리노때도 금메달을 땄었지(사진:일간스포츠)

 정말 ‘아프게’ 떠나보낸 스노보드를 나는 방송을 통해 다시 만나게 되었다. 2006 토리노 동계 올림픽 스튜디오 진행을 맡게 된 것이다. 동계 올림픽 종목들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는 않았다. 우리 선수들이 잘하는 쇼트트랙 경기야 가슴 졸이며 응원하며 지켜보긴 했지만 그 밖의 경기들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있지는 않았다. 그때는 김연아 선수가 세계 무대에 나오기 전이어서 피겨 스케이팅도 지금처럼 가깝지는 않았으니까.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방송 준비는 열심히 했다. 큰 시험을 앞둔 수험생처럼 공부를 했다. 달달 외우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경기 중계를 한 건 아니고 경기 일정이나 결과를 정리하고 종목 소개를 하는 역할이어서 할 만은 했다. 이탈리아와 우리나라 시차 때문에 아주 늦은 밤이나 새벽에 주로 방송이 있었는데, 잠이 부족해서 머리도 멍했다. 잠순이인 나에게는 힘든 시간들이었다. 밤을 새면서 나름 노력은 많이 했는데, 성과가 그다지 좋지는 않았나 보다. 그게 나의 마지막 올림픽 방송이 될 줄이야...

프레젠테이션도 완벽한 김연아 선수 (사진:일간스포츠)

 토리노 동계 올림픽을 할 때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동계 올림픽을 유치할 수 있을까 싶었다. 이미 한 번의 유치 실패를 경험했던 터였다. 그러다가 끈질긴 도전 정신으로 무려 삼수 끝에 동계 올림픽 유치에 성공했다. 우리가 요즘 경기 보느라 잊고 있을 수도 있지만 이 올림픽은 우리에게 쉽게 온 것은 아니다. 2011년 7월, 남아공 더반 IOC 총회에서 평창이 2018년 동계 올림픽 개최지로 결정되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겠지만 피겨 여왕 김연아 선수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싶다. 이번 올림픽 최종 성화 점화자로 여신의 강림을 보여준 김연아 선수가 IOC 총회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했을 때, 그때 나는 2년간의 휴직을 마치고 회사에 막 복귀했었다. 동료들은 “회사 많이 변했지?”,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지?” 라며 인사를 건넸다. 그렇지 않아도 눈치 0단이었던 나는 “글쎄요. 저 아직 며칠밖에 안지나서 모르겠어요.”라는 말만 반복했었지.


  한달즘 지났을까? 사람들이 말하던 그 변화를 조금씩 감지하기 시작했다. 방송사라는 특성상 윗사람에게 자기 의견을 내는 일이 비교적 자유로운 수평적인 조직이었는데, 명령과 복종이 강요되는 분위기였다. 방송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아나운서들은 무슨 사업에, 무슨 프로젝트에 이리저리 끌려 다녔다. 무슨 사업을 따내야 한다며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기도 하고, 알 수 없는 행사에 동원되어 박수를 치며 앉아 있어야 했다. 그랬다. 아나운서국은 변했다. 아니 회사 전체가 다 변해 버렸다.


 시간이 흘러 흘러 회사에 더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이게 최악일 거야라고 생각하면 더 최악의 일이 일어났다. 많은 동료들이 회사를 떠났고, 나도 회사를 떠났다. 그리고 시간은 또 지나고 지나, 나는 지금 이렇게 이 글을 쓰면서 평창 동계 올림픽 중계를 보고 있다. 나의 후배가 중계하는 경기를 말이다. 그게 뭐가 이상하냐고요?

잠시 다녀온 평창 올림픽, 바람만 좀 멈추어다오.

  MBC라면 절대 보지 않았던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다. 시청자들만 MBC를 떠난 게 아니었다. 나도, 우리 동료들도 우리의 방송을 외면했던 시절이 있었다. 무한도전과 나 혼자 산다는 차마 버릴 수 없었지만, MBC는 꽤 오랜 시간 동안 뛰어넘어야만 했던 금지 구역이었다. 지금은 MBC 스포츠 중계도, MBC 뉴스도 보고 있다. 나야 친정이니까 친정 식구들 보려고 다시 보지만, 시청자들 입장에서는 이미 떠난 마음 다시 되돌리기 쉽지 않을 것이다. 시간도 필요하고, 엄청난 노력도 필요하다. 다시 돌아온 기회, 이제는 정말 다시 좋은 친구가 되길. 그리고 늘 자신을 되돌아보는 방송이 되길 바란다. 계속 응원하고 싶은 방송이 되길 나또한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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