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아나 Feb 07. 2018

박아나의 일상뉴스

1.이사로 달라진 일상

 

 다들 이렇게 말했다. 한창 일할 때인데, 왜 회사를 그만두느냐고. 이제 일 안 할 거냐고. 너무 빨리 은퇴하는 거 아니냐고. 드디어 아기 가지려고? 뭐? 아니라고? 아기도 아니면 뭐하면서 지낼 건지, 나의 하루를 걱정하는 동료들과 건강부터 회복하라는 어른들의 말씀까지. 고맙기도 하면서 서럽기도 했다.


 MBC. 나에게 회사는 정말 사랑하는 일터였고, 자랑스러운 곳이었다. 물론 늘 좋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어느 조직이나 마찬가지인 것처럼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스트레스와 한계에 절망했던 시간들도 많았다. 그러다가도 내 일에서 느끼는 즐거움과 만족이 컸기 때문에 힘든 시간들을 상쇄해 나가면서 기쁘게 버텨온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회사 생활의 빛과 어둠의 균형이 깨지기 시작했다. 커져가는 어두운 기운들은 예전과 달리, 내 힘으로, 내 의지로 해결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어둠의 포스가 빛의 자리를 야금야금 잡아먹으면서 나는 급격히 어두워졌다. 회사는 더 이상 나의 꿈을 실현해주고,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줄 제다이가 아니었다. 다스베이더였다.


 도망치듯 그만두게 된 회사에게 나는 완전히 벗어나고 싶었다. 정확히는, 나는 회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고, 내 선택은 옳은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싶었다. 어둠에서 벗어나 이제는 빛의 세계로 드디어 발을 내디뎌 오히려 기뻐해야 할 일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현실 도피에 재능이 있었던 건지, 아니면 현실 직시를 제대로 안 한 건지 모르겠지만, 그때의 나는 그렇게 모든 것에서 멀어지고 싶었다. 회사를 그만둔 것만으로도 부족했다. 회사를 잊으려면, 회사의 그늘에서 완벽히 벗어나려면... 그래, MBC가 있는 상암동에서 멀어지자. 그리고 새롭게 다시 시작하는 거야. 근데 떠날 수 있을까? 에라 모르겠다. 그렇게 나는 10년 넘게 살던 여의도 생활을 정리하기로 했다.  


  이참에 서울을 확 떠나볼까? 하다가도 서울을 떠나는 게 망설여졌다. 서울 토박이라서 그런가? 나도 몰랐는데  내가 서울을 진짜 사랑했나 보다. 뒤늦게 깨달은 서울에 대한 사랑과 여러 가지 현실적인 조건을 고려하여 서울과 가까운 경기도 지역으로 결정했다. 서울에서의 마지막 밤은 그 어느 다른 밤보다도 아름다웠다. 여의도에는  때마침 폭죽이 터졌다. 잘 가라고 나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는 것 같았다. 근사한 이별 세리머니다. 이왕이면 나의 앞길을 축복하는 것이었으면 좋겠다.  언젠가  다시 돌아올 거야... 떠나겠다고 할 때는 언제고 벌써부터 그립다. 그날 밤은 참으로 뒤숭숭했다. 생각해보면 단순히 이사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제 나의 인생은 새로운 라운드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몇 번째 라운드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 전의 라운드가 몹시 길었다는 거. 꽤 난타를 당했다는 거. 그래서 많이 지쳐있다는 거. 그래서 다시 시작한 이번 라운드는 너무 서두르면 안 될 거라는 거. 내 안에는 변화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이 공존하고 있었다. 애틋하다. 그 모든 게 참으로 애틋했던 밤이다.


 이곳으로 이사 온 가장 큰 이유는 전원생활을 흉내는 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입지 조건 자체가 앞뒤로 산이 있기도 하거니와 작은 테라스가 덕분에 이것저것 심고 키울 수 있어 자연과 가까운 곳이다. 토마토 한 그루 외에 아무것도 심어져 있지 않는 아담한 테라스는 격한 삽질도 마다치 않는 남편 덕분에 빠르게 제자리를 잡아갔다. 힘도 달리고 농사일에 그다지 적합한 인물은 아니지만, 아침마다 정성으로 물을 주며 나도 힘을 좀 보탰다. 테라스에 나와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내가 흘리는 땀만큼, 내가 받는 햇볕의 양만큼, 새로운 환경에, 자연에 더욱 가까워지고 적응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전원생활을 '흉내'낼 수 있다는 사실에 더 감사하게 됐다. 100% 리얼 전원생활이었다면 감당하지 못했을 테니까.

 여기서 잠깐 우리 집 테라스 식구들을 소개하겠다. 깜찍한 아기 사과가 열리는 사과나무 동생부터, 대추나무 사랑 걸릴 줄 알았는데, 사랑은 몇 알 걸리지 못하는 대추나무 형님, 빨갛게 색이 변해서 볼터치 화사한 화살나무 아가씨, 우리 집 비상식량인 블루베리 장모님과 만질 때마다 향기로운 로즈메리님과 보라색 꽃까지 피는 라벤더님, 여름부터 늦가을까지 흐드러지게 피는 수국이들, 추우나 더우나 의연하게 서있는 대나무 아저씨까지... 그러고 보니 식구가 많네. 그 외에도 계절에 따라 있다가도 사라지는 아이들까지 제법 많다.


 그중에서도 우리 집 테라스 대장은 포도대장, 포도나무다. 처음에 심을 때는 추운 겨울을 버텨낼 수 있을까, 다음 해에도 다시 포도가 열릴까 염려스러웠다. 걱정은 곧 현실이 되어 나타났는데, 겨울이 오자 말라비틀어진 채로 몸을 잔뜩 움츠린 포도나무는 내일이라도 당장 죽을 것 같아 보였다. 아... 생명을 함부로 책임지는 게 아니었어. 비닐하우스는 못 만들어도 뭐라도 덮었어야 했나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골든타임을 다 놓쳐버린 것 같았다. 불안한 마음에 툭툭 건드려보니 영락없이 죽은 나무다. 이를 어째... 그러나 끝이라고 생각한 순간, 끝이 아니었다. 메말랐던 포도나무는 습기를 머금기 시작하더니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마른 장작처럼 보였던 나무 끝에 새 가지들이 올라오기 시작하고, 그 가지 끝에는 야리야리한 잎들이 하나둘 생겨난다. 옅은 연두색의 잎들은 햇빛을 받으며 어느덧 초록색으로 짙어지더니 이내 풍성해진다. 가지들과 잎들은 놀라운 속도로 넝쿨을 만들며 쭉쭉 뻗어나간다. 휑했던 포도나무는 단숨에 생명의 신비로 가득 찼다. 정말 죽은 나무 같았는데, 어쩌면 저렇게 생생하게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건지... 볼 때마다 여전히 놀랍다.

 

 생명의 신비는 포도나무에만 일어나는 게 아니었다. 나도 조금씩 살아나고 있었다. 갑상선 기능 항진증 때문에 빠르게 뛰던 나의 맥박도 점차 안정을 되찾아갔고, 잠도 더 잘 잘 수 있게 되었다. 잠을 잘 자니 몸의 컨디션도 좋아져서 운동도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보는 사람마다 혈색도 좋아지고, 무엇보다 표정도 편안해졌다고 한다.  이사한 지 5개월 만에 처방받았던 갑상선 약도 끊게 되었다.  의사 선생님도 놀랐다. 정말 빠르게 회복했다고. 그렇게 생명의 신비는 나에게도 일어났다.


 회사를 그만두니까 좋긴 좋구나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 회사 스트레스가 없어져서 몸도 자연스레 회복되었다고 말이다. 그러나 반대로 회사를 그만둔 사실 또한 나에게 엄청난 스트레스였기 때문에 회사를 그만둔 게 나의 회복에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그렇지도 않다. 그렇다면 환경의 변화 외에 나의 회복을 설명할 방법은 없지 않을까? 그렇다면 자연은 나를 어떻게 바꾼 것일까?


  먼저 나의 일상이 바뀐 것은 맞다. 아침에 일어나서 빠지지 않고 하는 일이 무엇인가? 내 경우는 나무들에게 물 주기다. 특히 날이 더운 여름에는 아이들이 너무 목말라하기 때문에 하루도 거를 수 없다. 물을 주지 않아도 되는 겨울을 제외하고는 집을 오래 비우는 일이 부담스럽다. 이제 봄이 오고 있다. 나름 농한기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는데 , 좋은 시절 다 갔다. 아니야, 너희들이 파릇파릇해지는 봄이 오길 기다리고 있어. 진심이야.


  햇볕과 친해진 것도 빼놓을 수 없는 변화다. 테라스에 나가서 나무들에게 물도 줘야 되고, 정리도 해줘야 되고, 포도나 블루베리 열매들도 따야 되고, 낙엽들도 치워야 되고,  할 일이 많다. 그러다 보니 햇볕을 받는 시간이 길어졌다. 아무리 챙넓은 농사꾼 모자를 써도, 선글라스를 껴도, 태양은 뚫고 들어온다. 얼굴에 잡티가 많이 생겼다. 손해다. 그래도 비타민 D는 부족하지는 않겠지. 이득이다. 햇볕을 많이 받으면 우울감도 사라진다. 햇볕을 받으며 몸까지 움직이니 기분이 좋다. 걱정거리도 사라지고 일거리는 가득이다.


 자연과 대화하는 버릇도 생겼다. 사실 대화라기보다는 일방적으로 나만 하는 이야기지만, 나무들에게 말을 걸면 더 잘 자란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인지 자꾸 말을 걸게 된다. “잘 잤니?” “배고팠지?” 대답은 없다. 벌레가 자꾸 꼬여서 나를 귀찮게 하는 나무에게는 “너 자꾸 그러면 나 너 싫어한다.” 이랬다가도 “아니야, 내가 더 신경 써서 잘해줄게.” 결국 벌레 퇴치 약을 뿜어줄 수밖에 없지만 말이다. 뭐가 됐든, 초록잎을 근사하게 반짝이며 쑥쑥 더 잘 자라는 모습이 내 이야기에 대한 그들만의 응답 방식일 테니까.

 

 나의 일상은 예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나를 위해서 마시던 아침의 물을 자연과 공유하고 있다. 뉴스룸의 조명 대신, 태양이 주는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앉아서 머리만 굴리는 게 아니라 손과 발을 움직이게 되었다. 사람이 아닌 자연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 어떤 대화보다도 진정성이 있다. 일상의 이런 변화는 나에게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나는 예전보다 느긋해지고, 예전보다 밝아졌다. 무엇보다도 건강해졌다. 자연은 정말 나를 바꾸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자연을 돌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자연이 나를 돌보고 있는 게 아닐까? 도망쳐 온 이곳은 악수가 아니라 묘수,  아니, 신의 한 수였음을 깨닫게 된다.

 

 지금은 겨울이라 잠시 쉬고 있지만, 나는 안다. 저 깊은 땅 속 뿌리에서부터 다가오는 봄을 조심스럽게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이번 겨울은 지독하게 길고 춥지만 상관없다. 오지 않을 것만 같은 봄을 기다리며 내 마음에도 어느덧 희망 한 줄기가 올라오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다가오는 봄처럼 나의 새 라운드도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다.


"이사오길 참 잘했어. 고마워! 자연아!"






http://www.instagram.com/ny_lover_2009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