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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아나 Feb 26. 2018

박아나의 일상뉴스

어느 비행기 안의 몽상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 안. 도착해서 바로 돌아다닐 수 있으려면 잠을 자야 한다. 자야 해. 자야 해... 자야 한다고! 한국 시간으로는 오후여서 그런지 잠을 청해도 오지는 않는다. 흔들리는 비행기가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 앞으로 갈 길이 먼데, 계속 이렇게 못 자지 않겠지? 


 신입 사원 시절에 일본으로 연수를 갔었다. 나리타 공항에 도착을 앞두고 마음이 들떠 있었다. 그런데 큰 흔들림 없이 순항 중이던 비행기가 갑자기 아래로 뚝 떨어졌다. 위에 있는 선반이 열리면서 물건들이 떨어지고, 몇몇 물건들은 바닥으로 굴러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승무원들은 안전벨트를 매고 움직이지 말고 자리에 앉아 있으라고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전에 몇 번 비행기를 타봤지만, 이렇게 아무런 조짐도 없이 급작스럽게, 심하게 고도가 떨어지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놀이공원에서 바이킹을 탄 것 같이 가슴이 덜컹했다. 아니, 바이킹과는 차원이 달랐다. 


 나만 놀란 게 아니었다. 내 옆자리에 앉은 신입 피디 오빠들도 난리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쿵하고 떨어진 이후 계속 심하게 흔들렸는데,  비행기 안 여기저기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공포를 더 유발했다." 이거 왜 이러냐? 너무 심한데?" "야야! 나 아직 장가도 못 갔는데 이거 어떡하지?" 장가는 정말 가고 싶었나 보다는 생각에 웃음이 나면서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웃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옆에서 나보다 더 무서워하니 없던 용기가 생겼다. "아니, 오빠들 진짜 겁 많다. 나보다 심한데? 괜찮아요, 괜찮아."아무 말이나 던져본다. 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비행기는 계속 요동쳤다.

  

 지옥에도 끝은 있었다. 마침내 비행기 바퀴가 땅에 닿는 순간, 환호의 탄성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앞쪽에서는 박수소리도 들렸다. 굳어 있었던 승무원들의 얼굴에 미소가 다시 돌아온 것을 보고서야 나도 긴장이 풀렸다. 휴... 이제 살았구나. "거 봐요! 내가 괜찮을 거라고 했잖아요!" 오빠들도 이제야 웃는다. 근데 그때 괜히 센 척했나 보다. 장가 못 간 걸 걱정했던 그 오빠를 한동안 놀렸었는데, 역시 남을 놀리면 안 되는 거였어. 언젠가부터 터뷸런스에 흔들리는 비행기 안에서 불안해졌다. 몹시.  

이렇게 구름 밖에 없이 평온한데...왜 불안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행기를 타고 어디론가 멀리 떠나는 건 포기할 수 없다. 특히 2년 정도 살았던 뉴욕을 방문하는 일은 늘 설레고 기다려지는 일이었다. 뉴욕에서 살았기 때문에 혼자서도 뉴욕에 잘 다녀왔다. 혼자가 편하기도 했다. 사람들에게도 혼자 꼭 여행을 다녀오라고 당부했다. 같이 다니면 놓치는 것들이 보인다고. 힐링이 된다고. 그렇게 계속 나는 혼자 여행을 즐길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이번 여행은 달랐다. 혼자서 뉴욕에 가는 게 자신이 없어졌다. 그래서 작년 10월에 갈 여행을 미루고 미루다 이제 가는 것이다. 여행 계획을 짜는 것만으로도 흥분했던 내가 여행을 앞두고 설레지 않고 걱정만 된다. 이상한 일이다. 자신이 없다. 뉴욕은 지도 없이도 어디에 뭐가 있는지 잘 알고 있는데, 거침없이 뉴욕 바닥을 헤매고 다녔는데, 밤에도 지하철을 막 타고 돌아다녔는데, 그런 내가 겁이 나다니... 참 이상하다. 


 뭐 그럼 안 가면 그만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런 상황에 빠진 내가 싫었다. 혼자 여행하는 일에 자신이 없어진 나 자신을 설득해 다시 나설 용기를 만들어야 했다. 설마 나이 한 살 더 먹었다고 겁이 많아진 건 아닌지 두려웠고, 이렇게 하나둘씩 안 하기 시작하면 나중에 어떤 일도 해 낼 용기가 없어질까 봐 그게 겁이 났다. 그래서 겁이 난 나는 겁을 다스리려 지금 이렇게 비행기에 몸을 실은 것이다.


 왜 자신이 없어졌을까? 혼자 여행하면서 겪는 불편함이 싫어진 건가? 여행 중에 일어나는 예기치 못한 상황들이 부담스러운 건가? 아니면 혹시 혼자 있으면 외로울까 봐? 이렇게 질문들을 던지고 보니 어라? 진짜 다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헷갈린다. 나 이제 청춘이 아닌가 봐. 나이 들어가는 게 이런 것일지도...라고 수긍하면 슬프겠지? 진심으로 슬플 거다. 혼자 하는 여행이 문제가 아니다. 그렇게 좋아하던 뉴욕 가는 일도 이렇게 자신이 없어지는데, 다른 일은 어떨까 싶다. 하기 싶은 일이라면 더 피하려고 하겠지? 지금도 충분히 겁이 많은데 더 겁쟁이가 된다면 정말 그것이야말로 진짜 겁나는 상황이다.  


 용기가 필요한 나를 위해서 이번 여행에는 특별한 동반자가 있다. “잠시 혼자 있겠습니다”라는 책인데, 나 자신에게 하는 선언 같은 제목이다. 제목처럼 그래, 잠시 혼자 있어 보자. 그런데 혼자 있으면 뭐가 좋을까? 저자인 마이클 해리스는 우리에겐 잠시 혼자 있으면서 몽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잠시 멍 때리면서 뇌가 아무런 일도 하지 않게 그냥 두는 거다.  책에서는 이런 몽상을 통해서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샘솟는다며 우리의 뇌는 자유롭게 놓아둘 때 고도로 집중적인 작업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아인슈타인도, 아이작 뉴턴도 몽상하는 도중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발명했고, 예술가들의 위대한 작품도 처음 시작은 몽상이었다. 그렇다. 혼자 있으면 외로움과 두려움만 늘어나는 게 아니다. 혼자 있으면 몽상을 할 수 있고, 우리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을 만들어 낼 수 있다. 혼자 있는 시간은 외로움과 두려움의 시간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세상으로부터 잊히는 시간이 아니다. 그 시간은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는 창조의 시간이다. 

나의 동반자, 마이클 해리스의 이 책.

 그런데 혼자만 있으면 몽상이 쉬운가? 예전에 비해 몽상을 방해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 우린 혼자 있는 시간에도 끊임없이 스마트폰과 소통 아닌 소통을 하고 있다.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들에 때론 의미 없는 하트를 누르는 데 많은 시간을 쓰고 있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이상 몽상할 시간은 없다. 이런 것들과 연결 고리를 끊어야 나만의 세계에 제대로 집중할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지금이야말로 몽상하기에 딱 좋은 상황이었네. 비행기 안이라 스마트폰은 꺼져 있고 세상과도 끊어져 있으니, 잠시 혼자 있는 완벽한 상황이다.  "몽상 좀 하겠습니다" 하고 몽상을 시작한 건 아니지만, 어쩌면 나는 이미 몽상 중인 듯하다.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는 게 몽상하고 있다는 뜻이니까. 무언가를 새로 만들어내고 있다는 게 몽상이니까. 이번 여행은 몽상으로 외로울 틈이 없을 것 같아. 그렇게 생각하니 자신감이 생긴다. 용기가 난다. 혼자 여행 오길 역시 잘했다. 


50번가를 걸으면서 몽상해 볼까. 

지금까지 비행기 안 몽상이었습니다. 뉴욕 도착하면 더 많이 몽상할께요. 잠시 혼자 있으면서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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