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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아나 Nov 03. 2018

박아나의 일상뉴스

권태라는 친구

 김승옥의 무진기행에서 주인공 '나'는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부유한 가정환경의 아내를 만나 장인 밑에서 일하고 있는데, 멀지 않은 미래에 그 사업도 물려받게 될 것이다. 행복하지 않은 '나'는 무진으로 향한다. 이번에는 아내와 장인의 권유로 떠밀리듯 가게 되었지만, 그가 어디론가 가야 했다면 역시 무진이었을 것이다. 아내와 장인은 새 출발을 위해 마음을 다지고 오라며 보낸 무진은 그에게 다른 의미였다. 무진은 그곳의 명산물답게 모호한 안개를 드리우는 곳.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신의 나약함을 확인시켜주는 곳. 그래서 더 짙은 안개 속으로, 더 나른한 권태 속으로 밀어 넣는 곳일 뿐이다.  

작가가 만든 가상 공간인 안개 낀 무진은 이런 느낌일까. 미세먼지는 아니겠죠? 사진 : 골프타임스

 무진의 안개처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나날이 계속되던 3년 전, 나는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동안의 고통을 보상이라도 받고 싶었던 걸까. 일을 하고 싶지 않았기에 일을 구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런 나를 부러워하더니만, 그것도 잠시, 걱정으로 돌아섰다. 휴가가 달콤한 이유는 돌아올 현실이 있기 때문이라고 넌지시 돌려 말하는 사람들, 계속 이렇게 살 거냐고 대놓고 묻는 사람들까지... 나는 지금이 너무 좋다는 말로 답을 대신했다. 처음 3개월은 정말 이렇게 마음이 편안할 수가 있을까 싶었다. 다음 3개월은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아. 그리고 그 이후로는 이렇게 계속, 언제까지일까. 사람들이 걱정했던 것처럼 나도 나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지루할 틈이 전혀 없다고 에둘러 포장했지만, 어느새 권태라는 친구가 손을 내밀었다.

이상의 권태도 있네요, 그러고보니. 사진 :네이버

 기차를 타고 광주로 내려가는 길, 익산역에 잠시 정차한다. 친할머니가 사셨던 이리, 지금의 익산까지 무궁화호였는지, 새마을호였는지를 타고 갔던 기억이 떠오르네. 그때는 세 시간도 넘게 걸렸던 익산이 한 시간 좀 넘으니 도착. 기차가 빨라진 만큼 세월도 빨리 지나갔다. 기차 여행은 어린 나에게 특별한 경험이었다. 우리 때야 비행기 타는 일이 그리 흔한 일은 아니어서 조금 과장을 보태면 기차가 거의 비행기 급이었다. 기차, 그 특유의 덜컥거리는 흔들림도 좋았지만, 안절부절못하며 내가 기다리고 있던 건 간식을 파는 카트였다. 어머! 바나나 우유랑 아몬드 초콜릿은 여기서 꼭 먹어야 돼!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 조합은 기차 안에서만 통하는 최고의 맛이었다.

지명이 익산으로 바뀐지는 오래됐지만 낯설다... 아...옛날 사람!

 

추억의 카트, 아직도 있나봐요.  바나나 우유 반갑다^^ 사진 : 블로그 <일상의 틈>

 다 마신 우유의 빨대를 잘근잘근 씹으며 바깥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철길을 따라 쭉 늘어선 전신주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처음에는 전봇대들의 간격이 같을까에 집중하다 나중에는 전봇대마다 붙어있는 광고를 읽고 또 읽는다. 우루사였는지, 박카스였는지 아니면 또 다른 이름이었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두 가지가 반복적으로 번갈아 나타나는데 자꾸 빠져 든다.  머릿속으로도 읽고 중얼거리기도 하고. 유튜브 동영상에 푹 빠진 요즘 아이들처럼. 그러나 전봇대 동영상은 너무 지루한 반복일 뿐이었다. 우루사면 어떻고, 박카스면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어느 순간 나의 몸은 배배 꼬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차를 탄 나는 딱히 할 일이 없었고, 하나 남은 아몬드 초콜릿을 입에 넣으며 다시 지겨운 풍경을 붙잡는다. 이게 내가 기억하는 내 인생 최초의 권태였을까.

전신주 사진 찾기 힘드네요. 지금은 거의 다 없어져서... 사진: 블로그 <산은 지리산>

 권태는 늘 우리 곁에 있었다. 바빠도, 바쁘지 않아도. 일 때문에도, 사람 때문에도 온다. 처음에는 기대로 부풀었던 일도, 뭐든지 오래 지속되면 의욕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너무 똑같아서, 너무 나른해져서, 그래서 벗어나고 싶다. 그렇게 권태는 자연스럽게 우리 곁에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권태에 무척 예민하게 반응하고, 어떤 사람들은 이 권태가 찾아온지도 모른 채 무덤덤하게 산다. 어떤 경우에는 알면서도 무시하기도 하고. 어느 쪽이 정신 건강에 더 나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권태는 누구에게나, 언제든 올 수 있다는 것이다.  


 권태라는 친구가 그렇게 거슬리지 않는다면 괜찮지만, 권태 말고 다른 친구를 만나고 싶다면 일상에 변화를 주면 된다. 그 변화라는게 좀 이번엔 크네. 뉴욕에 왔다. 14시간의 긴 비행시간 동안 노트북과의 사투로 여전히 고되다. 이런 내가 권태와 잠시 이별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이, 저 멀리서... 하이 라인의 가을이 내게로 걸어 들어온다.

뉴욕의 하이라인... 도착과 동시에 바로 갔어요.

p.s. 정신없이 오느라 하루 늦게 글을 올렸어요. 이맘때쯤 올라와야 되는데 하고 생각하셨던 분들께 살짝 죄송하지만, 그것 또한 권태로운 제 일상의 루틴에서 벗어났으니 변화의 시작이네요. 뉴욕의 가을을 대신 느끼고, 쓰고 오겠습니다. 권태야! 잠시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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