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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아나 Oct 26. 2018

박아나의 일상뉴스

가을을 놓치면 억울해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이 많아서 자는 시간이 아깝다는 송은이는 두 시간 정도 잔다고 한다. 프로그램 기획에 제작에, 진행에, 회사 경영까지 하다 보면 잠잘 시간이 부족할 것 같긴 한데, 저렇게 자고 버틸 체력이 있다니 대단하다. 10시만 돼도 눈이 감기는 나는 크리에이터로서는 뭔가 나사가 빠진 사람 같다. 잠을 줄여야 성공하는 걸까. 나는 나고, 남은 남이라고 마음을 고쳐 먹는다. 나는 체질적으로 잠이 많은 사람이라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수 밖에. 체질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건강 검진할 때마다 나쁜 콜레스테롤이 높게 나온다. 술을 많이 마시는 것도 아니고, 딱히 기름진 음식을 즐기는 것도 아닌데... 게다가 운동도 하는데, 왜 그럴까. 유전이라고 하니 어쩔 수 없긴 한데, 왠지 억울한 기분이다. 

'인생술집'에서.그러니까 그게 가능하냐고요! 사진 : 세계일보

 오늘 아침에 눈을 뜨고 나니 팟캐스트 새 에피소드가 업로드되어 있지 않았다. 분명 어젯밤에 올리고 잤는데, 이게 무슨 일이냐 싶어 아침부터 난리도 아니었다. 다시 새로 업로드를 무사히 하긴 했는데, 여전히 그전에 올린 게 왜 제대로 업로드가 되지 않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상황은 이미 벌어졌지만 원인은 밝혀야 될 것 같아서 문의를 하다 보니 아침 시간이 다 날아갔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커피 한 잔 마시면서 브런치 글을 쓰기 시작해야 했지만, 글을 쓸 시간도, 쓰고 싶은 의욕도 다 사라져 버렸다.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왠지 억울한 기분이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닌 것 같은데... 왜 일이 이렇게 된 거지. 

커피 한 잔의 여유도 찾을 수 없었던 아침... 만약 방송사에서 이런 일이 있었으면 뭐가 됐든 책임져야 할 상황이다. 

 세상에 억울한 일로 따지면 나의 억울함 정도는 억울함 측에 끼지도 못한다. 불의의 사고로 자식을 잃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으며, 아무 이유 없이 직장에서 내몰린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으며, 열심히 살았는데 사기당하는 사람들, 남의 죄를 뒤집어쓰는 사람들까지 얼마나 많은가. 그런 억울함과는 비교할 바는 못 되지만,  나는 아니, 우리는 크고 작은 억울한 감정들이 하루에도 몇번씩 파도처럼 왔다 갔다 한다. '이까짓 거' 급의 억울함이라도 내 소중한 하루의 출발을 삐걱거리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또 억울한 마음이 밀려오는 것처럼. 

 

1993년 영화 '도망자'에서 해리슨 포드. 억울한 누명을 쓰고 계속 도망다녔다.  사진 :탑스타뉴스

 억울한 이야기에 시트콤을 빼면 정말 억울하다. 시트콤에서 유독 기억에 남는 캐릭터들은 대부분 억울하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순풍산부인과"에서 장인어른에게 매번 혼나는 미달이 아빠 박영규도, 미달이에게 당하는 의찬이도 억울했다. 최근에 청춘 다큐 "다시, 스물"로 재조명된 "뉴 논스톱"의 양동근도 억울해서 억울한 캐릭터다. 날라리 친구인 이민우가 양동근의 이름을 사칭하는 바람에 남의 여자 친구를 꼬셨다고 얻어맞고, 쓰지도 않은 외상값 독촉을 받고, 하겠다고 한 적도 없는 누드모델을 한다. "동근이의 이름으로"라는 이 편은 다시 봐도 웃기다. 양동근이 더 억울해질수록 말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위로도 준다. 이러고도 웃는다고. 내 억울함은 깜찍한 수준이구나 싶어 다시 웃는다. 억울한 마음이 들 때, 시트콤이 당기는 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뉴 논스톱 87회' 동근이의 이름으로. 사진 : youtube, mbc classic

 하루를 억울하게 시작한 나의 일과는 무척 피곤하게 끝났다. 점심이라도 먹으려고 아보카도 반을 가르니 썩어 있었고, 정신없이 달려간 강연은 횡설수설하다 온 느낌이다. 허기를 달래러 골목길로 들어섰다가 앞에서 오는 차를 피하기엔 길이 너무 좁고 사람도 많아 옴짝달싹 못하는 위기에 스트레스 지수가 상승했다. 간신히 헤치고 나와 저녁을 먹었는데, 나중에 차에 돌아와서 보니 시동을 끄지 않은 상태였다. 아... 하고 탄식이 나오긴 했지만 불평할 힘도 없이 집으로 돌아와, 맥주 한 캔으로 오늘의 나를 달래 본다. 억울하게 시작한 하루가 그래도 억울하게 끝나지는 않지 않았는가. 그냥 피곤하게 끝났을 뿐이라고 위로하면서.

스트레스 받은 날에는 맥주 한 캔이 진리! 사진 : 티비리포트

 자고 일어나니 어제의 일은 까마득하다. 강연장에 가는 길이 복잡했는데, 헤매지 않고 한 번에 잘 찾아갔고... 강연장에서 아이들의 반짝반짝 빛나는 눈빛에 감동받았다. 시동 계속 걸어둔 차로 막히는 구간 없이 무사히 집에 왔다.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 맥주가 한 병도 보이지 않아 좌절했지만, 양념통 사이에 한 개가 숨어있었다! 팟캐스트 업로드 오류는 나의 잘못이 아니었다는 문자도 확인했다. 나쁜 일만 있었던 것도, 좋은 일만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나의 하루는 딱히 억울할 것도 없는 그저 평범한 하루였던 거다. 이걸 진작 깨달았으면 어제 하루가 그렇게 힘들지 않았을까. 


 잠시 창밖을 바라본다. 가을의 단풍이 절정이다. 건너편에 멀리 보이는 산은 어느새 울긋불긋해졌다. 이제 겨울이 오면 다 사라질, 그래서 더 애틋한 장면이다. 이 아름다운 풍경을 놓치는 것이야말로 진짜 억울할 일이 될 터. 오늘은 은행잎이 떨어진 길을 걸어볼까나. 

와... 여긴 어딜까? 걸어보고 싶다. 사진 :중부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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