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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아나 Nov 09. 2018

박아나의 일상뉴스

뉴욕 소네트 1

 사람들이 무언가에 푹 빠져서 소위 “덕질”을 할 때마다 그게 그렇게 부러웠다. 어떻게 누군가를, 혹은 무엇인가를 헌신적으로, 그것도 꾸준히 좋아할 수 있을까. 난 그런 마음을 지독한 열정이라고 생각한다. 그 열정은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다. 매사에 무덤덤한 편인 나는 그런 열정을 가진 사람들의 에너지가 궁금했다.


 중학교 때 홍콩 배우 장국영이 참 인기가 많았다. 한번은 열혈팬이었던 내 친구 동생 덕분에 우리 동네에서는 꽤 먼 고속 버스 터미널에 있는 영화관까지 다녀온 적이 있다. 우리 동네에서는 개봉하지 않은 장국영 영화, H2O를 꼭 봐야 한다는 친구 동생의 간곡한 부탁 때문이었다. 중학생끼리 가기에는 참 먼 곳이었는데, 그렇다고 우리보다 더 어린 여동생을 혼자 보낼 수도 없었던 내 친구가 나에게 동행을 요청했던 것이다. 뭐 그렇게 까지 가야 되나, 친구 동생의 장국영 사랑에 경의를 표하면서. 그 당시 기억으로도 무척 허름했던, 지금은 없어진 지 아주 오래인, 영화관에 무사히 도착했을 때 너무나 기뻐하던 그 동생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물론 나도 장국영이 나오는 영화. 많이 봤다. '영웅본색 2'의 명장면인 공중전화 부스에서 죽어가는 아걸의 모습에 눈물 좀 흘렸고, '천녀유혼'에서 귀신인 왕조현과 사랑에 빠진 장국영도 기억한다. 그러나 늘 거기까지. 나는 더 이상 빠져들지 않았다.

이 영화 아시는 분 거의 없죠? 장국영님 팬 외에는... 1990년에 개봉한 장국영 주연의 H2O. 사진 :블로그, 브이 제트.

  그렇다고 아무도, 아무것도 좋아하지 않는 냉혈한은 아니다. 역시 중학교 때였나, '블루문 특급'이라는 제목으로 방영한 미국  드라마에 빠졌었다. 드라마가 아주 기막힌 시간, 그러니까 꽤 늦은 시간에 했는데, 공부하는 줄 알고 있던 딸을 믿고 먼저 주무시던 부모님이 깰까 봐 어찌나 마음을 졸였던지. 부르스 윌리스의 리즈 시절, 건들건들한 허당끼 넘치는 캐릭터가 참 매력적이었다. 이 드라마 이후로 큰 인기를 끈 부르스는 우리 모두 한번 이상은 본 '다이 하드'로 그야말로 대박을 터뜨리지만, 부르스에 대한 나의 관심은 '다이 하드'부터 '다이'였다. 그 이후로도 많은 스타들이 유효기간이 짧은 나의 사랑을 받았다. 이름을 다 나열하기도 힘들 만큼.

'블루문 특급'의 두 주인공.  티격태격하다 사랑에 빠지는 설정인데, 실제로는 사이가 나빴다는 믿고 싶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 사진 : queen

 세월이 흐르고 흘러 나는 여기, 뉴욕에 왔다. 오기 직전까지 정신없이 바빴던 나는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여기에 오겠다는 생각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늘 그렇듯, 여기에 왔다. 숙소에 짐을 던져두고 정신없이 하이 라인부터 찾아갔다. 옛 철로가 지나던 길을 재활용해서 만든 공중 공원, 서울로 7017의 롤모델이라는 그곳.

하이 라인이 시작되는 곳,  Gansevoort st 입구.

 하이 라인은 내가 뉴욕에서 살았던 시절과 역사를 같이 한다. 내가 뉴욕에 오기 얼마 전에 문을 열었고, 내가 뉴욕을 떠날 때쯤 두 번째 구간인 20가에서 30가까지가 개통되었으니까. 내가 뉴욕에 있었던 시기에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방문할 때마다 하이 라인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확인하러 오곤 했다. 34가까지 모든 구간이 다 개통된 지도 몇 년 지났지만, 올 때마다 느낌이 다르다. 하이 라인을 둘러싼 건물들은 점점 높아져 가고, 벽화도 달라지고, 나무들과 꽃들도 날이 갈수록 더 조화롭게 자란다.

2014년 이후에 개통된 구간, 여기 주변으로 높은 건물들이 엄청 올라오고 있다.

 2009년의 하이 라인은 지금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겠지만 정말 호젓한 곳이었다. 처음에는 Gansevoort가에서 20가까지 길지 않은 구간만 있었고, 길의 폭도 좁아서, 오솔길을 잠시 걷는 기분이 들었다. 근데 자연을 걸으면서 동시에 도시를 걷는다. 양옆으로 늘어선 건물들 사이를 걷노라면 내가 이 도시, 뉴욕이라는 이 도시에 스며들어 있는 것 같달까. 뉴욕에서 느꼈던 외로움이 조금은 위로받는 느낌이다. 이따금 마주치는 사람들과는 "여기 진짜 좋지 않아요? 우리만 알고 널리 알리지 맙시다." 하는 눈빛으로 미소를 주고받았다. 지금은 그런 여유를 기대하기에는 사람이 너무 많지만.

2013년 여름의 잔디에서... 지금은 잔디님 쉬는중.

 정성스럽게 심은 나무와 꽃들 사이로 기분 좋게 걷다 보면 눕다시피 기댈 수 있는 긴 의자도 만난다. 잠시 쉬어가며 이런저런 생각이 많았었지. 그때는 10년 차 여자 아나운서로서 어떻게 자리매김해야 할지, 미래에 대한 고민으로 마음이 답답했었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가 좋아하는 일을 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처음 하이 라인을 걷던 나와 지금의 나. 10년이 가까운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 고민에 대한 답을 찾고 있다.

이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2013년 여름의 하이 라인에서.

 그리고 이번에도 그 답을 찾으러 하이 라인에, 뉴욕에 왔다. 문득, 정말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나도 꽤 오래 좋아하는 게 있긴 하구나. 바로 여기, 뉴욕. 그걸 이제야 깨닫다니. 그렇다. 나는 '뉴욕 덕후'다. 커밍 아웃도 했으니, 덕후 활동 좀 본격적으로 해볼까.

자, 기대하시라. 다음 주에도 뉴욕 소네트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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