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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아나 Nov 16. 2018

박아나의 일상뉴스

뉴욕 소네트 2

 뉴욕 덕후인 나는 뉴욕을 걷고 또 걸었다. 어떤 날은 삼만 삼천보를 넘게 걸었는데, 오후 6시쯤 그 사실을 알았다. 나이도 있는데, 내 관절에 심히 무리가 갈 것 같아 그 이후의 일정은 접었다. 만약 몇 보를 걸었는지 확인하지 않았다면, 이날 사만보를 넘겼을지도 모르겠다. 무리가 됐든 아니었든, 나는 매일같이 삼만보에 가깝게 걸어 다녔다. 그게 뉴욕을 제대로 잘 느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예전에 자주 걸었던 길들은 추억으로 다시 걸었고, 그렇지 않았던 길들은 오랜만에 반가워서 다시 걸었다. 어딘가를 꼭 찾아가야 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많이 걸었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도 도전해볼까.

 여행을 가면 다음 목적지에서 또 다음 목적지로 발 빠르게 찾아가야 할 일이 많다. 제한된 시간 안에 봐야 될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뭔가 시험 문제를 푸는 것 같기도 하다. 지난 여름 포르투갈에 갔을 때 그랬다. 많은 것을 보고 싶은 욕심에, 많은 것을 놓친 여행이었다. 휴대폰의 지도에, 여행책에 많이 의지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보면 여행지에서 발길 닿는 대로, 느낌 가는 대로 돌아다닐 수 있다는 것은 참말로 행운이다. 풀어야 할 문제도 없다. 그저 발을 디디면 된다. 내게 뉴욕은 그런 행운의 장소이다. 뉴욕에 살았었기 때문에 지도를 확인하지 않아도 웬만한 곳은 그냥 찾아갈 수 있다. 휴대폰을 들여다보지 않으니 더 많은 것들을 볼 수 있다. 어디에도 의존하지 않는 나는 완전한 해방감을 느낀다. 그래서 내가 뉴욕을 사랑하나 보다. 나를 자유롭게 날게 해 주니까.

앞으로, 앞으로! 

 하이 라인은 이번 여행 기간에 다섯 번 즘 들렀다. 처음 사흘은 그 근처에 묵은 핑계로 매일 갔고, 나머지 기간 동안에는 다른 곳을 갈 때 일부러 하이 라인을 거쳐서 갔다. 하이 라인에 무슨 꿀단지라도 숨겨놓은 건 아닌지 묻는 사람도 있다. 그러고 보니 거기서 양봉을 해도 잘 될 것 같긴 하네. 물론 농담이지만. 사실 하이 라인이 있던 그 철길로 운반되던 고기와 낙농 제품들, 온갖 생산품들의 창고와 공장들이 서쪽 강변에 모여있었으니, 그중에는 진짜 꿀도 있었겠지, 뭐. 

곳곳에 남아있는 철로. 

 하이 라인이 시작되는 갠스보트 거리 일대에 위치한 미트패킹 지역은 이름 그대로 고기를 도축하고 가공하는 곳으로 한때는 250여 곳에 이르는 육류가공업체가 모여 있었다. 그러나 195,60년대를 거치며 제조업 경기도 나빠지고, 트럭을 이용한 고속도로 운송이 활기를 띠기 시작하면서 기차 이용은 급격히 줄어들고 이 지역의 경제도 쇠퇴한다. 급기야는 기차 운행도 중단되는데, 그렇게 쓸모가 없어진 이 지역은 우범지대로 전락하고 만다. 그렇다고 너무 슬퍼하지는 마라. 나쁘게 됐다고 계속 나쁜 것은 아니니까. 이 지역을 어떻게 재건할지 논의하는 과정에서 결국 지금의 하이 라인 공원이 생겼으니 전화위복이랄까. 

사진 아래편에 통유리창으로 비치는 뉴욕의 거리, 보이시죠?

 미트패킹의 분위기가 바뀐 데는 소호와 웨스트 빌리지의 높은 임대료를 견디지 못하고 건너온 예술가들의 역할도 크다. 제조업 경기 부진으로 정육업자들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갤러리들과 옷가게들이 들어서면서 2004년에는 뉴욕 타임스가 선정한 “뉴욕에서 가장 패셔너블한 지역”으로 선정됐다. 정육점들이 늘어서 있던 예전의 모습과 비교하면 정말 많이 바뀐 셈이다. 나도 처음에 여기 왔을 때, 주말에 브런치 먹으러 오는 모델 동생들 보며 눈 돌아갔던 기억이 난다. 내 머릿속에 미트패킹은 "물 좋은 곳"이라고 입력돼 있었는데, 지금은 또 세월이 지났으니, "뉴욕에서 가장 걷기 좋은 곳"으로 정의해야 될라나 모르겠다. 센트럴 파크라는 강적을 앞서기는 쉽지 않겠지만. 

택시만 안 보였어도 파리인줄. 내 기억에 저 건물에  한때 엄청 유명했던 브런치 집 'pastis'가 있었는데 없어졌네...

 미트패킹을 찾는 관광객들은 하이 라인만 보고 여기에 오는 것은 아니다. 첼시 마켓도 이 구역 대표 랜드마크다. 코코아 맛이 나는 까만 쿠키 사이에 하얀 크림이 들어 있는 오레오 쿠키를 우유에 찍어 먹어 보았는지. 굉장히 미제스러운 맛이 나는 이 쿠키 과자를 생산하는 나비스코의 공장이 바로 첼시 마켓 자리에 있었다. 첼시 마켓을 돌아다니다 보면 곳곳에 그 흔적이 남아 있는데, 그러고 보니 오레오 쿠키를 먹어볼 생각은 못했네. 오레오 공장에서 오레오 쿠키를 잘 떠올리지 못하는 이유는 다른 맛있는 음식들이 엄청 많기 때문이다. 어디서 뭘 먹어야 잘 먹었다고 소문이 날지, 정말 고민되게 만드는 음식점들은 사람들을 방황하게 만든다. 뉴욕 덕후는 어디로 갔을까. 이번에 나는 랍스터 플레이스를 택했다. 랍스터를 비롯해 신선한 생선과 해산물 종류를 전문적으로 파는, 뭐랄까, 노량진 수산 시장의 아주 아주 작은 버전인 이곳에서 바로 쪄서 먹는 랍스터 한 마리는 진리다. 사람들과 부대끼며 서서 먹고 있노라니, 컵라면 먹는 것처럼 랍스터 다리를 뜯고 있긴 하지만. 진리는 놓치면 후회하니까 먹자.

오레오의 흔적...in 첼시 마켓
랍스터의 눈을  마주치니 미안해 하는 척하며 열심히 먹었다. 

 첼시 마켓 안을 기웃기웃 구경하며 돌아다니다 10번 애비뉴 쪽으로 빠져나온다. 업타운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 올라가면 크고 작은 갤러리들이 우리의 눈을 사로잡는다. 관람객들이 많지 않아 조용한 전시장에는 눈치 주는 사람도 없는데 들어가기가 왠지 조심스럽다. 일단 용기를 내서 쓱 들어가면 오... 유명 작가의 작품들도, 이름도 낯선 작가의 작품들도, 내 취향은 아니지만 뭔가 독특한 작품들도, 모두 반갑다. 관람객들로 북적대는 모마 MOMA에서는 절대 경험할 수 없는 작품과 나의 독대. 이 그림을, 이 공간을 내가 다 전세 낸 것 같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내 앞의 그림이 내 것인 것 같아 마음이 한없이 풍족하다. 이런 근거 없는 허세 때문인가. 나오는 발걸음은 오히려 당당하다. 작품의 기운을 받아서 그랬다면 더 좋은 일이고. 

pace 갤러리에서 만난, 뉴욕이 사랑하는 키스 해링의 작품을 독점한 시간.

 첼시의 갤러리 투어가 선택 과목이라면, 하이 라인 입구에 있는 휘트니 뮤지엄은 필수 과목이다.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무려 여덟 개나. 미트패킹 옆을 흐르는 허드슨 리버의 반대편인 이스트 리버의 아파트 풍경도, 저녁 일곱 시에 가까운 시간이지만 아침 7시의 고즈넉함도 느낄 수 있다. 이번에 갔을 때는 마침 앤디 워홀 특별전을 운 좋게도 관람했다. 워홀의 작품들은 어느 미술관에서나 한두 개씩은 소장하고 있으니까 자주 접하긴 했지만, 이번처럼 대규모로 한자리에서 본 기억은 무척 드물다. 마릴린 먼로도, 엘비스 프레슬리도, 코카콜라도, 캠벨 수프도 모두 소환됐다. 워홀의 죽기 전 마지막 전시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시리즈가 전시를 보고 나가는 마지막 순간에 나의 마음을 훔진다. 카모플라쥬 버전으로 만날 수 있는 워홀의 최후의 만찬 앞에서 경건함을 느꼈다면 지나친 것일까. 

 

에드워드 호퍼,  Apartment Houses, East River.
에드워드 호퍼,  Seven  A.M.
사진에 다 담을 수 없었던 크기의 카모플라쥬 최후의 만찬. 

 휘트니 뮤지엄의 백미는 에드워드 후퍼나 앤디 워홀의 작품이 아닐지도 모른다. 전시관의 층층마다 연결돼 있는 탁 트인 야외 테라스에서 뉴욕의 풍경을 바라보라.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도, 원 월드 트레이더 센터도, 허드슨 강 저 멀리 자유의 여신상도, 이 모두를 품은 뉴욕이 최고의 작품이다. 그 작품을 만나러 오늘도 나는 걷는다. 

수전증이 있는지 파노라마로 담아내지 못한, 실물보다 많이 떨어지는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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