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88, 다시 피아노에 도전하다

감정 번외편

by 박아나

비가 오는 날이 점점 더 좋아진다. 흐린 날은 말할 것도 없고. 뭔가 착 가라앉은 서글픈 느낌이 편안하다. 예전에 나는 눈이 부셔서 눈을 뜨기도 힘든 그런 밝고 화창한 날을 좋아했다. 그런 날이면 아무 이유 없이 기분이 좋아져서 어깨를 들썩이고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지금도 여전히 그런 날들이 좋지만, 그 지나친 밝음이 부담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아마 그 밝은, 심하게 긍정인 에너지를 따라가지 못하고 밀린다고 생각되서일까. 그래서 그런가, 흐리거나 비 오는 날을 은근히 기다리게 된다. 이런 날의 차분한 기운은 내 마음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누릴 수 있을 것 같아서 좋다.

이렇게 맑은 하늘에는 내 피부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 그래서 흐린 날이 좋아지나.

요 며칠 흐리고 비가 왔다. 구름이 오가고, 비도 내리다 말다, 바람도 불다가 멈춘다. 오락가락 바뀌는 날씨의 표정만큼이나 나의 감정도 다양하게 변한다. 가만히 있어 보이는 그 어떤 것도 그대로인 것은 없듯이 나의 감정도 꽤나 굴곡이 있나 보다. 예전에는 무덤덤한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즘 들어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들쑥날쑥하다. 아름다워서 슬프고, 슬프니까 더 아름답다고 하질 않나, 생전 써본 적도 없는 시도 쓸 수 있을 것 같은 감성으로 충만하다. 뭔가에 푹 빠지지 않던 나였는데, 나란 사람도 홀릭할 수 있구나. 그럴 수 있구나. 꽤 살아있는 느낌. 흐린 날이 좋아져서 내가 흐려진 줄 알았는데, 나의 감정은 분명하게 살아 있다. 마치 영화 '아바타'를 처음 봤을 때 느꼈던, 아주 낯선 감정의 색들이 나타나고 있다.

처음에는 꽤 낯설었던 아바타만의 느낌 충만. 사진 : 미디어스

누군가에게 딱히 밝힌 적은 없지만, 나는 균형을 꽤나 신경 쓰는 사람이다. 며칠 전이었나. 내가 올린 사진에 피아노와 꽃꽂이, 독서의 균형이 좋다는 지인의 댓글을 보면서 괜히 뜨끔해져 균형이라는 말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된다. 일단 지인의 댓글처럼 지금까지 내가 올린 기록들만 봐도, 피아노, 꽃, 책, 글쓰기, 전시회, 여행 같은 것들을 뭔가 순번을 정한 것처럼 돌려가며 올리는 느낌이다. 관심사가 많아서 그런 거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내 마음속에는 이번에 꽃 사진을 올렸으니 내일은 겹치지 않게 다른 사진을 올려야겠다고 이미 생각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뭔가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은 모습이 왠지 쿨해 보이니까.

영화, 꽃, 책, 일상, 자연, 여행... 겹치지 말자. 사진 : 나의 인스타그램(ny_lover_2009)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균형 있는 삶이 바른 것이고, 뭔가 치우치려고 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어쩌면 나는 뭔가에 빠지는 것 자체가 두려워서 물러서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 모든 열정을 바쳤는데, 잘 되지 않으면 상처 받을 것 같아, 아니 심히 절망할까 봐 그게 무섭다. 그래서 애초에 올인하지 않는다. 왜 그랬을까. 결과에 집착해서였을까. 결과가 어떻든 내 모든 것을 쏟아붓는 과정 중에 얻는 것도 많은데, 그런 것들을 놓치고 살아왔다고 생각하니 씁쓸하다. 뒤늦게 깨닫네.

균형은 감정에 있어서도 적용된다. 가족과 친구와의 관계도 보이지 않는 균형의 논리가 작용한다. 때때로 사람들이 내게 표현했던, '엄청 가까운 것 같은데 더 이상 다가가지 못하게 만드는 벽 같은 게 있어'라고 말했던 것도 늘 중심을 잡으려고 버티는 나의 균형감각 때문이었을까. 그러나 우리에겐 시간이라는 마법이 존재한다. 그렇게 사람은 변하지 않으면서도 변하게 된다. 마법의 힘으로 나의 균형감각은 조금씩 무너져, 아니 긍정적으로 표현하자면, 더뎌지고 있음을 요즘 실감한다.

결국 마법사도 변하잖아...? ^^ 사진 : 브레이크뉴스

엊그제 피아노 선생님과의 수업이었다. 지난번에 잘 표현되지 않았던 모차르트 환상곡 D단조, K.397은 선생님 표현대로라면, 어느 음 하나 버릴 것 없이 어떤 감정인지 확실하게 와 닿았다는 역대급 칭찬을 받았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냐는 선생님의 말에 나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냥 좀 슬펐어요.”

"예전보다 감정의 진동폭이 커지고 있어요. 그래서 좀 부담스러웠는데, 그게 피아노 연주할 때는 도움이 되네요. 감정을 잡는 것도, 감정의 끝까지 가는 것도, 점점 더 편해져요. 제가 생전 안 하던 덕질도 시작하고, 거기서 느끼는 감정이 변화무쌍해요. 뭔가 제 안에 변화가 생긴 것 같아요." 갑자기 피아노 수업이 심리 상담 수업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근데 피아노를 다시 시작하면서 클래식 곡만 들었었는데, 요즘은 대놓고 BTS 음악만 듣고 있어요. 이래도 되는 건가요?” 이렇게 이야기를 늘어놓는데, 머리를 스치는 단어. 균형. 나는 피아노에 올인하는 게 엄청 두려웠나. 그래서 다른 데 눈을 돌린 걸까. 설마... 그렇다면 소름이라 생각하고 있는데, 선생님은 피아노 연습과 연주회에 대한 부담이 있어서 그에 대한 반작용, 혹은 탈출구로 그럴 수도 있다고 한다. "감정이 커지니까 좀 괴롭기도 한데, 그러면서도 그걸 즐기게 돼요. 저 변태는 아닌 거죠?" "다른 사람들도 그래요.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선생님의 대답에 안심이 되면서도, 그 탈출구에서 빠져나오기 힘들 것 같은데, 어쩌지.

저... 입덕은 뷔로... 사진 : 글로벌 경제신문
그러나 들으면 들을수록 가사가 예술이었습니다... BTS magic shop 중에서...

균형이 깨져서 솔직히 당황스럽기는 하지만 그 덕에 생생히 살아있는 나를 만날 수 있으니 그건 신나는 일이다. 피아노 연주를 할 때 일단 예전보다 감정을 수월하게 표현하는 내가 좋고, BTS의 음악을 열정적으로 따라 부를 수 있는 흥이 있는 내가 좋다. 미세한 변화에 예민해지고, 작은 아름다움에 감동하는 내가 참 좋다. 갱년기 전조 증상이라고 해도 상관없고, 조증이라고 말해도 괜찮다. 그냥 뭔가를 있는 그대로 느끼고 표현하는 내가 점점 더 좋아진다. 그래도 여전히 균형은 살짝 신경 쓰이긴 하지만, 그런 걸 의식하는 나도 나니까. 그래서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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