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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현수 Oct 06. 2016

황금벌판

1. 굴드

시기는 확실치 않다. 구전으로만 전해 내려오는 옛이야기다. 아마도 최초의 인간이 두 발로 걷기시작한 뒤, 흐르는 시간의 강물 위에서 천천히 번성을 일구어가던 즈음일 것이다. 나약한 인간들이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가진 짐승들과 변덕이 심한 자연의 위협에서 살아남기 위해 한데 모여살기 시작하고, 최초의 사회를 구성하기 시작한 시기이며 위대한 신들이 등장하던 그런 시기.........


불규칙한 지각변동으로 요동치기 시작한 고대의 대륙에 기다란 산맥이 원을 그리며 솟아올라 가운데 거대한 분지를 만들었고, 분지 안에는 커다란 호수와 숲이 남았다. 그리고 자신들을 굴드라 칭하는 부족이 고립된 분지에서 호수와 숲의 풍요로운 자원을 기반으로 번성하고 있었다.  


굴드족의 근원, 누구로부터 어떻게 시작됐으며 분지로 어떻게 흘러들어오게 되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앞서 말했듯 인간이 기록된 역사를 가지기 전의 일이기 때문이다. 단지 하나의 전설 혹은 신화일 뿐이다.


그들이 자신들을 굴드족이라 칭하는 것은 그들이 굴드라는 이름의 신을 숭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믿는 전설은 대지의 역사와는 반대였다. 굴드신이 호수와 숲 지상낙원을 만든 뒤, 이를 보호하기 위해 산맥으로 주위를 둘러쳤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그곳의 주인으로 삼을 자신을 닮은 인간들을 내려 보냈는데 그것이 굴드족의 시초였다고 했다.


굴드신은 아주 자애롭고 너그러운 신이었다. 고립된 분지에 모여 살게 된 굴드족에게 양보와 평화를 최고의 가치로 삼으라고 명했으며 서로 다투지 말고 더불어 도우며 살아가도록 했다.


덕분에 굴드족은 주민들 사이에 다툼이나 싸움이 거의 없었다. 설사 그런 일이 있다하더라도 굴드신의 가르침에 따라 부족장과 제사장의 합리적인 판단아래 공정하게 해결됐다. 예를 들어 서로 물고기를 더 먹겠다고 싸우는 경우, 정확히 반을 갈라 나누어 주었으며 만약 특정부위를 먹겠다고 싸우는 경우 한 마리를 더 잡도록 했다. 물론 풍요로운 곳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분지의 숲과 호수엔 언제나 먹을 것, 마실 것이 넘쳐났다. 거기다 1년 전에 굴드족은 동물의 것인지 인간의 것인지 모를 배설물더미에서 싹이 튼 것을 발견했고, 그를 통해 씨를 뿌려 작물을 키우는 법을 배웠다. 많은 시행착오 끝에 굴드족은 산맥의 한쪽에서 몇 가지 작물을 재배하기 시작했다. 그리 많은 양은 아니었으나 수확을 하는데 성공했다.


굴드족은 밭의 규모를 점차 넓혀나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굴드족은 굴드신과 산맥의 비호아래 풍요로운 분지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얼마 전, 산맥너머에서 호전적인 이방인들이 등장하여 굴드족에 위기가 찾아왔다. 이방인들의 정체는 굴드신이 아닌 도핀커신을 숭배하는 도핀커족이었다.     


2. 도핀커

도핀커의 역사는 오로지 분수처럼 솟아오르는 검붉은 피와 벗겨진 인간의 살가죽으로 얼룩져있었다. 도핀커족은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으나 강력한 전사들로만 구성되어 있는 부족이었다. 이들은 도핀커라는 이름의 전쟁의 신을 숭배하고 있었다.


그들의 전설에 따르면 도핀커족은 창조주이자 전쟁의 신인 도핀커신에 의해 선택받은 종족이며 도핀커족을 세상의 주인으로 낙점했다. 도핀커족 외의 종족은 도핀커족이라는 선택받은 민족을 창조하기 위해 신이 겪은 시행착오에 불과했다.


한마디로 도핀커족 외의 인간들은 모두 신의 실패작들이었다. 열등하고 쓸모없는 존재였다. 도핀커족이 투쟁해야 하는 적이며 사라져야하는 존재였다. 도핀커신은 그들에게 끊임없이 싸워 이기라고 했다. 다른 모든 부족들을 노예로 부리고, 지배하라고 명령했다. 도핀커족은 그들의 신이 바라는 바대로 실행해왔다.


한곳에 정착하는 일없이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전쟁을 벌여왔다. 그들이 지배하는 땅의 자원이 고갈되면 비옥한 곳을 찾아 떠나는 식이었다.


도핀커족은 직접 그들과 전투를 경험하지 않았더라도, 어쩌다 한 번 그들을 마주쳤던 부족이라면 그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치를 떨 정도로 잔인하고 악독했다.


도핀커족은 고유한 그들만의 전투기술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들이 가진 기술이란 것이 상대를 최대한 고통 속에서 죽음에 다다르게 하는 것이었다. 일격필살의 급소를 의도적으로 피해가며 연이어 베고 찌르는 식이었다.


도핀커족은 고통에 겨운 신음, 비명소리가 도핀커 신의 귀에 닿아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도핀커족의 침공을 당한 부족은 모조리 몰살당하거나 노예가 되거나 둘 중 하나였다. 거기다 이들은 가끔씩 먹을 것이 풍족해도 싸움을 벌일 때가 있었다. 새로운 전사들에게 전투경험을 얻게 하고 투쟁심을 불러일으킨다는 명목이었다.


그런 도핀커족의 탐색꾼이 얼마 전 아주 비옥한 땅을 발견해냈다. 탐색꾼은 족장에게 비록 높은 산맥에 둘러싸여 있어 정복이 쉽지는 않겠지만, 새로운 땅에선 적어도 백년은 풍요를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도핀커의 제사장은 도핀커신에게 산 제물을 바쳤다. 도핀커신은 기다란 핏빛 꼬리로 밤하늘을 가르며 나는 유성으로 화답해왔다.


도핀커의 족장은 그날로 새로운 낙원을 향해 출발하기로 결정했다. 도핀커족은 전쟁을 떠나는 당일 아침 여자와 아이들, 노예들을 모조리 살해했다. 언제나 그래왔다. 전쟁에 떠나기 전날, 전사를 제외한 부족의 구성원을 모조리 죽이는 것이 도핀커의 법이었다. 여자와 아이, 노예는 새로운 터전에서 얼마든지 구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피의 축제를 벌인 다음 날 아침, 도핀커의 전사들은 굴드의 분지를 향해 진격을 개시했다.     


3. 위기

굴드족의 탐색꾼이 산맥의 떠돌이들에게서 도핀커에 대한 소식을 들은 뒤, 굴드족의 족장 세토의 집에서 원로와 제사장들이 모여 회의가 열렸다.


"세토! 이대로 있으면 우린 끝이오!"

"일단 협상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도핀커와 협상을 했다는 일은 듣도 보도 못했소!"

"그들은 야만인이야!"

"과거 재물과 여자들을 넘기고 살아남은 부족이 있다는 말도 있소!"

"뭐요? 그런 비겁한 소릴! 그런 소릴 할 시간에 당장 전투준비를 해야 하오!"

"도핀커와 싸워서 이기겠다고?"

"이기지 못할 건 없소!"

"비겁하게 사느니 죽음이 낫소!"

"그럼 자네나 죽게! 우선 살아남아야 다음을 도모할 수 있소!"


굴드의 족장인 세토는 양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굴드족의 장로들은 저마다 이런저런 말들을 쏟아냈다. 딱히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는 없었다. 모두들 겁에 질려 있을 뿐이었다.


지금까지 굴드에 이렇게까지 큰 위기가 닥친 적은 없었다. 가끔 날씨 탓에 식량수급에 잠시 문제가 생겼던 적이 있었을 뿐, 그리 대단치 않은 일들뿐이었다. 몇몇 떠돌이 부족들이 가끔 산맥을 넘어올 때도 있었지만 그들은 도핀커만큼 공격적이지도 않았고 아주 적은 숫자였다. 굴드족의 평화정책에 따라 부족의 일원으로 흡수되곤 했다.


굴드족은 그야말로 천혜의 자연환경이 주는 혜택을 누리며 평화 속에 살아왔던 것이다. 그때 인기척이 나더니 누군가 성큼성큼 집안으로 들어왔다.


크게 발달된 턱, 당당하게 벌어진 어깨와 구릿빛 피부, 터질 듯 부풀어 오른 근육이 그가 강인한 전사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굴드족 최강의 전사, 기로였다.


그의 어깨엔 커다란 멧돼지 한마리가 얹혀있었다. 기로가 들어오자 떠들던 원로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그의 눈치를 살폈다. 기로는 좌중을 매서운 눈초리로 휙 둘러보았다. 


"여기서 뭣들 하고 계시오?"

"기로 잘 왔다."


세토는 기로를 반가운 표정으로 맞아주었다. 기로는 바닥에 쿵! 소리를 내며 멧돼지를 내려놓았다. 기로는 굴드족 사상 최강의 전사로 손꼽히는 자였다. 기로의 아버지는 호랑이이고, 그를 낳은 어미는 호수라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다.


실제로 기로는 제 부모가 누군지 몰랐다. 숲속에 버려진 기로를 족장인 세토가 길렀다. 기로는 어린 시절부터 사냥과 전투에 소질을 보였는데 원체 평화로운 굴드족에서 자란지라 그 실력을 제대로 드러낼 기회가 마땅치 않았다. 하지만 부족원 모두 기로가 최고의 전사라는 사실만은 인정하고 있었다.


기로는 요 며칠 간 사냥을 다녀왔다. 기로가 사냥에서 돌아왔을 때, 도핀커라는 야만족이 산 어귀에 몰려와 진을 치고 굴드족을 습격할 준비를 하고 있으며 원로들이 세토의 집에 모여 대응책을 고심하고 있다는 이야길 들었다.


기로는 사냥에 지친 고단한 몸을 쉬게 할 틈도 없이 곧장 달려온 것이다. 세토는 이제야 말이 통할만한 진짜 전사가 왔음에 기뻐했다. 물론 원로들 중 절반은 그런 기로가 불편했지만 말이다.


"여기서 이렇게 회의나 하고 있을 시간이 있습니까?"

"기로야. 누군들 그걸 모르겠니? 하지만 우리 굴드족에게 이런 위기가 닥친 것은 처음이다. 지혜롭게 헤쳐 나가야 한다."

"하지만 야만인들이 바로 산맥 너머에 있다는데 여러분의 지혜로운 결정을 기다리느라 우리 굴드의 전사들은 싸우기도 전에 지쳐버렸답니다."


평소 신과 계시를 너무나 가벼이 생각하는 기로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대제사장 로웅이 발끈해서 답했다.


"아직 굴드신의 계시가 오지 않았다!"

"굴드신이 잠시 출타중일 때 우리가 멸망하면 어쩐답니까?"

"저런 발칙한!"

"로웅 진정하게! 기로! 너도 그만하고 이리 와서 앉아라."


기로는 그제야 어깨를 으쓱하며 족장 세토의 곁에 가서 앉았다. 로웅은 기로를 잔뜩 노려보고 있었지만 기로는 로웅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세토가 좌중을 둘러보며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아시다시피 우리에게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소. 맞서 싸우느냐 혹은 그들과 화친을 맺어보느냐 아니면....... 이곳을 버리고 도망을 치는 것이오."


원로들 사이에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세토가 말을 이어갔다.


“우선 그들과 맞서 싸운다면 이기든 지든 우리는 심각한 피해를 입게 될 것이오. 화친을 맺을 수 있다면 피해야 줄어들겠지만 도핀커의 노예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마지막으로 도망을 친다면 굴욕적이겠지만 피해는 가장 적을 겁니다. 그러나 굴드신의 은총을 받은 이 비옥한 땅을 버리는 것도 아깝거니와 새로운 터전에 어떤 위험이 기다리고 있을 지 알 수 없으니 이 또한 마냥 피해가 적다고는 볼 수 없소.”


원로들이 저마다 말을 꺼냈다.


"그래서 어쩌자는 거요?"

"그냥 싸웁시다!"

"협상을 해서 화친을 맺는 것이 지혜롭소!"


그때 대제사장 로웅이 벌떡 일어서며 큰 소리로 말했다. 


"굴드신의 뜻에 따라 도망칩시다! 언제나 굴드신은 양보의 미덕을 강조해왔소. 이 땅을 양보합시다! 그럼 더 좋은 땅을 찾게 도와주실 거요!"


세토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장담할 수 있소? 확실히 굴드신의 뜻이 그렇다고 확신하는 거요?"

"확신합니다."


기로가 눈을 부라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비겁한 인간! 굴드신이 그런 계시를 주실 리 없다!"

"어허 아직 계시는 오지 않았다니까? 그러나 이것이 굴드신의 뜻이다! 대제사장인 내가 굴드신을 모신 게 벌써 이십 년째다!"


기로는 답답하다는 듯, 원로와 세토를 번갈아보며 말했다. 


"이 땅을 버리고 도망을 쳐서는 살 수 없습니다. 이렇게 나약한 방식으로는 계속 살아남을 수 없어요. 우리 조상들이 대대로 살아온 땅입니다. 다른 곳에 가서도 또 이렇게 도망만 치며 살아야할 겁니다. 우리는 야만인이 아닙니다! 우리 굴드족은 오랜 전통과 역사가 있는 민족입니다!" 

"흥! 고아주제에.........."


어디선가 조용히 뇌까리는 소리가 들렸다. 기로는 불끈 주먹을 움켜쥐었다. 세토가 그런 기로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렇다면 거수를 합시다. 가장 많은 사람의 찬성을 얻는 결정에 따르지요."

"좋소!"


원로들이 찬성하고 나섰다. 로웅이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보탰다. 


"굴드신의 뜻을 기억하시오!"


그리고 세토는 거수로 투표를 진행했다. 원로나 제사장이 아닌 기로에겐 투표권이 없었다. 세토를 포함해 총 열두 명의 원로와 다섯의 제사장이 거수를 했다. 맞서 싸우자는 데 다섯 명의 원로가 손을 들었으며 화친을 맺자는 데 두 명의 원로가 거수를 했다. 그리고 마지막 도망을 치자는 의견에 나머지 원로와 제사장, 열 명의 손이 모두 들렸다. 분명 대제사장 로웅의 입김이 작용했을 터였다.


투표는 그렇게 끝이 났다. 기로는 분을 참지 못하고, 뛰쳐나갔으며 로웅은 그 뒷모습을 비웃듯 바라보았다. 세토 역시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었다. 족장이라 해서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었다. 그것이 지금까지 굴드족이 평화를 유지하며 합리적 판단을 할 수 있는 비결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토는 이번만큼 마음이 불안했던 적이 없었다. 이것이 옳은 결정이길 바라면서 세토는 회의를 마무리했다.     


4. 붉은 새벽

회의가 끝난 날, 저녁부터 굴드족은 이동에 대비해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긴 시간 이동할 것을 대비해 식량과 물을 확보했다. 이동준비가 끝나는 대로 새벽에 길을 떠날 작정이었다. 기로는 따로 짐을 챙기지 않았다. 도핀커를 피해 도망치는 것은 그에겐 죽음보다 치욕적이었다.


세토는 그런 기로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홀로 칼과 방패를 손질하는 기로의 모습을 멀리서 조용히 지켜보다 갔을 뿐이었다. 그렇다. 기로는 혼자라도 도핀커족과 맞서 싸우다 죽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기로는 잠이 오지 않았다. 그렇게 밤을 지새웠다.


조금씩 새벽 어스름이 대지를 밝히기 시작했다. 누군가 기로의 집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다름 아닌 전사 리오였다.


"리오? 너는 피난 준비를 하지 않았냐?"

"기로. 나는 너와 뜻을 함께 한다."

"나와 함께 싸우겠다는 거냐?"

"나뿐만이 아니다.“


리오가 기로에게 밖을 가리켰다. 기로가 밖으로 나가자 굴드족 전사들이 늘어서있었다. 그래봐야 열 명 남짓 정도 되는 숫자였지만 기로는 마음이 든든해졌다. 리오가 따라나와 기로의 곁에 섰다.


“리오......”


리오가 희죽 웃으며 답했다.


“제사장들은 겁쟁이들이야.”


그때였다. 째지는 비명소리와 요란한 발소리가 멀리 마을입구 쪽에서 들려왔다.


“내가 다녀올게!”


전사들 중 가장 몸이 날쌘 페이가 얼른 뛰어갔다. 금세 돌아온 페이가 잔뜩 상기된 얼굴로 소리쳤다.


"큰일이다!"

"무슨 일이야?"

"도핀커의 기습이다!"

"뭐?"


기로와 리오는 전사들을 이끌고 마을 입구를 향해 달려갔다. 무시무시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흙바닥엔 검붉은 피가 잔뜩 스며들어 마른 땅을 적시고 있었고, 손목과 발목, 머리와 몸통이 각각 따로 떨어져 구르고 있어 수족의 주인이 누군지조차 가늠할 수가 없었다. 마을 입구를 지키던 전사들이었다. 너무도 끔찍한 광경에 고개를 돌리고 입을 막으며 구역질을 하는 이도 있었다. 기로가 다급히 외쳤다.


"놈들은 모두 어디로 간 거야? 이딴 짓을 저지르고 어디로 사라진 거지?"


페이가 답했다. 


"나도 몰라. 내가 왔을 땐 이미 이런 상태였어. 하지만 도핀커가 아니고야 누가 이런 짓을 하겠어?"


멀리서 다시 끔찍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젠장!" 기로는 다시 전사들과 비명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비슷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연이어 두 번을 더 그런 모습을 목격해야 했다. 계속해서 도핀커의 꽁무니만 쫓아 끔찍한 광경만 목도하게 된 기로와 전사들은 허탈함과 무력감에 빠졌다. 몇몇은 공포에 휩싸여 들고 있던 무기를 떨어트리기도 했다. 도핀커족의 살인자들은 빠르고 강했다.


도핀커족의 의식은 성공적으로 치러졌다.


도핀커족은 본격적으로 전투를 벌이기 전에 도핀커신에게 제물을 바쳐야 했다. 새벽에 기습공격을 감행해 마을의 문지기나 아이들을 죽여 그 피를 바닥에 뿌리곤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굴드족의 마을은 꽤 컸고 입구가 네 곳이나 되었다. 도핀커족은 그곳의 보초병과 불침번을 모조리 도핀커신의 제물로서 무참히 살해했다. 더하여 도핀커족은 굴드족이 피난을 준비 중이라는 사실도 알아차렸다.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도핀커신은 아직 전장의 함성과 고통에 찬 비명, 피와 살을 맛보지 못했다.


도핀커족은 각 입구에서 100보 쯤 떨어진 곳에 진을 쳤다. 굴드족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굴드족은 이제 도망칠 수도 없었다. 도핀커족에게 포위된 처지가 되어버렸다.       


5. 결의

세토의 집에서 다시 회의가 열렸다. 기로는 당장에 원수를 갚자고 강하게 주장했다. 원로들은 제각기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가로젓기도 했다.


세토는 엄지손가락으로 연신 한쪽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눈을 감고 있었다. 대제사장 로웅도 상당히 충격을 받은 듯 말없이 조용히 앉아 땅만 보고 있었다. 이윽고 세토가 천천히 눈을 뜨면서 말을 꺼냈다.


"로웅 말을 해보시오. 이번엔 계시가 왔소?"


로웅이 천천히 고개를 들며 난처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게 저.... 확실치가 않습니다........"

"이제 도망 칠 수도 없게 돼버렸소. 어째야겠소? 굴드신이 우릴 버린 것이오?"


로웅은 아무런 답도 하지 못하고, 침통한 표정으로 이를 꽉 악물었다. 기로가 대뜸 나서며 말했다.


"신이 우릴 버렸는지 아닌지는 그들과 싸워봐야 알 것 같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세토의 답에, 로웅이 기로를 흘겨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신의 계시를 기다려야 합니다."

"우린 이미 많은 희생을 치렀소. 언제까지 신의 계시만을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겠소?"

"도통 신께서 답을 주지 않습니다. 몇 번이나 스토크 잎을 태우고 제물을 바쳐보았지만 불꽃도 연기도 아무런 기별이 없이 피어오를 뿐이었습니다. 좀 더 기다려봐야 합니다."

"그게 언제까지요? 아마 오늘 밤 도핀커의 공격이 시작될 거요."


기로가 눈을 부릅뜨고 나서려 하자 세토가 눈빛으로 기로를 막았다. 원로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그루가 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루는 족장 출신의 원로로서 역대 굴드의 족장 중 가장 지혜로운 족장으로 꼽혔었고, 현재는 가장 존경받는 원로였다.


나이가 너무 많아 거동조차 불편하다지만 그에 대한 굴드족의 존경심만은 여전했다. 그루는 지금까지 계속 침묵을 지켜오다 처음으로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루는 좌중을 한차례 돌아본 뒤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며 우리 굴드족에 이렇게 큰 위기가 닥친 것은 처음이네. 우린 지금까지 굴드신의 은총 아래 평화를 미덕으로 살아왔다네. 때문에 전사들에게 실전경험이 별로 없어. 반면 도핀커족의 전사들은 매우 강하고 무서운 존재들이네. 과거부터 소문이 자자했어. 나 역시 잘 알고 있지. 전면전을 펼치면 우리가 패배할 것이 분명해. 허나 한 가지, 우리 전사들은 확실히 도핀커 전사보다 숫자가 많지. 도핀커는 전투를 하며 이곳저곳을 방랑하기 때문에 그 숫자가 그리 많지 않아. 더하여 우리에겐 이성과 합리가 있다네. 도핀커족은 무턱대고 싸움만을 즐기는 야만인이네. 그들의 전투엔 작전도 전략도 없다네. 한마디로 우리의 많은 숫자를 이용하여 전략적으로 싸운다면 그들이 아무리 강력한 전투민족이라 할지라도 아주 불리한 싸움은 아닐 거라 생각하네. 또 부족 최고의 전사가 기로가 대장을 맡아주는 것이 좋을 것 같네만 다른 분들의 생각은 어떤지."


기로가 그루의 눈을 똑바로 보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세토가 그루의 말을 받았다.


"기로가 전투부대의 대장을 맡고, 제가 작전을 지휘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찬성입니다!" 


기로가 벌떡 일어서며 큰소리로 말했다. 세토가 다시 말을 했다.


"반대하시는 분이 없다면 당장 그들과 맞서 싸울 전략을 구상하고 전사들을 배치해야 합니다."


그루가 나서서 말을 한 이상 반대를 하는 자가 있을 리 없었다. 대제사장 로웅은 여전히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툴툴대고 있었지만, 그 역시 더 이상 나서서 반대를 할 만한 명분이 없었다. 여전히 신은 답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로가 그런 로웅을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대제사장님은 신의 계시나 더 기다려보시오."

"흥!"


로웅은 벌떡 일어서서 다른 제사장들을 이끌고 나가버렸다. 세토는 그를 굳이 붙잡지 않았다. 서둘러야했다. 세토는 전사들을 집으로 불러들여 곧장 작전회의를 시작했다.     


6. 작전개시

도핀커족은 어둠이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이 역시 도핀커족이 전쟁을 할 때마다 지키는 하나의 관습이었다. 제물을 바친 날, 종일 전의를 불태우며 기다리다가 어둠이 오고, 달이 높게 떠오르면 공격을 개시하는 것이다.


이미 피 맛을 본 도핀커의 전사들은 칼과 방패, 창에 서슬 퍼런 살기로 무장을 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온몸에 검붉은 안료를 치덕치덕 바르고 있어 마치 피를 뒤집어 쓴 것처럼 보였고, 나무줄기로 엮은 끈을 머리에 쓰고 있었으며 얼굴과 이마에는 동그란 도핀커의 표식이 검은 안료로 그려져 있었다.


전사들은 삼삼오오 바닥에 둘러앉아 서로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도핀커신에게 기도를 하거나 부릅뜬 눈으로 서로를 잡아먹을 듯 쏘아보고 있었다. 이들은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길, 족장의 공격개시 신호가 떨어지길 말이다. 그렇게 도핀커의 전사들은 흥분과 광기를 극한으로 끌어올리고 있었다.


그루가 했던 말대로, 압도적인 힘과 전투기술을 지닌 도핀커족에겐 작전이나 전략 따위는 없었다. 공격개시 신호가 떨어지면 그냥 목표물을 향해 달려 나가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족족 도핀커의 표식이 없는 자들을 모조리 베고 찌르면 되는 것이다.


어둠이 오고, 정확히 반으로 쪼개진 달이 산맥 언저리에 걸렸다. 시간이 임박해 오고 있었다. 도핀커의 전사들은 이제 거친 숨소리를 뱉으며 더욱 강렬하고 노골적인 살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투아아아!!!!!!!!”


커다란 함성소리가 검은 융단 같은 밤하늘을 찢어발기듯 울려 퍼졌다. 족장의 공격개시 신호였다.


“투아아!!!”

“투아!!!!!!”

“투아아아아!!”


도핀커의 전사들은 족장의 함성을 저마다의 함성으로 받았다. 일사분란하게 굴드의 마을을 향해 달음질치기 시작했다.


굴드족 마을 곳곳에 횃불이 밝혀져 있었다. 마을 안은 아주 고요했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았던 곳처럼 말이다.


물론 전의로 불타는 도핀커의 전사들은 굴드의 마을이 조용하건 말건 개의치 않았다. 도핀커에서 가장 발이 빠른 전사 오리가 처음으로 굴드족 마을에 발을 들였다.


“투아아아아!”


그 뒤로 물밀듯 도핀커의 전사들이 굴드의 마을 안으로 들이닥쳤다. 입구는 훤히 열려있었다. 도핀커의 전사들은 저마다 함성을 지르며 집안에 뛰어들었다.


집안은 텅 비어있었다.


마을 곳곳에 무성한 수풀과 호수 근처의 늪지에 하얀 눈동자들이 떠 있었다. 시커먼 검댕과 진흙으로 위장을 하고 있는 굴드 전사들이었다. 잠복해있는 굴드 전사들의 눈동자는 긴장으로 떨리고 있었다.


기로의 신호와 함께 수풀 속에 잠복해있던 굴드의 전사들이 조용히 미리 밝혀놓은 횃불을 뽑아들어 도핀커의 전사들이 들이닥친 집을 향해 던졌다.


나뭇가지로 엮어 만든 집들은 방수를 위한 역청이 발라져 있었다. 횃불이 닿자마자 금세 불이 크게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집이 무너져 내리며 들이닥친 도핀커 전사들의 몸에 들러붙어 불은 더욱 기세를 올리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산채로 불에 타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도핀커 전사들의 끔찍한 신음과 비명이 마을 안에 울려 퍼졌다.

기로가 재차 신호했다.


그와 동시에 어디선가 일제히 창이 날아와 도핀커 전사들을 또 한 차례 휩쓸었다. 뒤이어 마을 서쪽출구에서부터 굴드의 전사들이 들이닥쳤다. 혼란에 빠져 우왕좌왕하는 도핀커의 전사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기로가 앞장서서 전투를 지휘하고 이끌었다. 기로는 몸집이 훨씬 큰 도핀커의 전사들을 상대하면서도 전혀 기죽지 않고 싸워 속속 쓰러트렸다. 그러나 다른 굴드의 전사들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공황상태에서도 도핀커의 전사들이 우악스럽게 휘두르는 칼과 창에 맥없이 모가지가 잘리고, 심장이 꿰뚫렸다. 팔 다리가 떨어져나갔다.

그렇게 한참 전투가 벌어지는 와중에 도핀커족의 족장 로왕고는 멀찍이 서서 불타오르는 마을을, 그리고 도핀커 전사들과 대등하게 싸우고 있는 기로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로왕고는 곁에 있는 전사에게 손을 내밀어 기다란 창을 받아들었다. 잠시 기로가 싸우는 것을 더 지켜보다가 자세를 잡더니 그대로 기로를 향해 창을 날렸다.


기로는 로왕고의 시선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는 채였다. 창은 그야말로 맹렬한 기세로 기로의 등짝을 향해 날아갔다. 그대로 두면 창은 여지없이 뒤에서 기로의 몸을 꿰뚫을 터였다. 그때 멀찌감치 기로의 건너편에서 막 도핀커 전사 하나를 쓰러트린 리오가 날아드는 창을 발견했다.


“기로!!! 등 뒤에!!!!!!”


기로가 말을 듣자마자 재빨리 홱 뒤로 돌아섰다.


피하기엔 너무 늦었다. 창날이 살을 찢고, 뼈를 부시는 소리가 났다. 그러나 기로는 멀쩡히 서있었다. 어느새 나타났는지, 기로의 눈앞에 몸 가운데 창이 꿰인 사내가 하나 서 있었다. 사내는 이내 가냘픈 신음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기로가 얼른 쓰러지는 사내를 받아 안았다.


기로를 대신해, 몸을 던져 창을 막아낸 사내는 대제사장 로웅이었다.

기로가 로웅을 안고 울부짖었다.


“로웅!”


로웅은 연신 거품 섞인 피를 토해내면서 말을 했다.


“기로.......”

“로웅! 넌 날 전부터 미워하지 않았느냐? 이렇게 나에게 짐을 안겨주고 가는 것이냐!?”


로웅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오해하지 마라... 네가 좋아서 한 게 아니야.... 계시가 왔다........”

“계시?”

“쿨럭!”


커다란 기침을 한 로웅은 다시 한 번 엄청난 양의 피를 토해냈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마지막 말을 남겼다.


“계시.... 굴드...신의 계시다.... 우리 굴드의 명운은 기로...... 너에게 달려...있다....”

“로웅!”


로웅은 그대로 먼 하늘을 바라보며 숨을 거두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도핀커의 족장 로왕고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하늘을 향해 몇 번 커다란 함성을 내질렀다. 


“투아아아아! 투투아아아!!!!!!”


그와 동시에 도핀커의 전사들이 뿔뿔이 흩어져 마을 밖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로왕고 역시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굴드의 전사들은 기로에게 다음 명령을 내려달라 청했다. 기로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도핀커의 전사들은 열세를 깨닫고 도주한 것이 틀림없었다. 전사들을 지휘하는 기로를 제거하는 것도 실패했고 말이다. 허나 굴드족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마을 안 대부분의 집이 불탔으며 대제사장 로웅을 포함, 수많은 전사들이 다치고 죽었다. 퇴각하는 도핀커를 쫓아 완전히 끝을 보면 좋겠지만, 그럴만한 여력은 남아있지 않은 것 같았다. 기로는 전사들에게 추격하지 말고 대기하라 명령했다. 현명한 선택이었다.


굴드는 그렇게 도핀커를 상대로 승리를 일구어냈다.     


7. 결투 

굴드가 도핀커를 상대로 의미 있는 승리를 이끌어냈다지만, 굴드 전사들의 사기는 바닥이었다. 기로를 제외한 대부분의 전사가 공포에 질려있었다. 풍문으로 들은 것과 실제로 마주한 것은 완전히 달랐다. 도핀커 전사들은 굴드에서 가장 키와 몸집이 큰 기로를 어린아이처럼 보이게 했고, 무지막지한 힘과 전투기술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몸에 불이 붙어 다 죽어가면서도 굴드 전사 셋을 해치운 도핀커 전사도 있었다. 기로는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핀커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기로는 후퇴하는 로왕고의 모습을 봤다.


그는 타오르는 불길과 굴드 전사들의 맹렬한 공세, 자신들의 패배에도 겁을 먹거나 좌절하는 것 같지 않았다. 아니 로왕고의 두 눈은 오히려 투기, 더하여 광기에 불타고 있었다. 그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다시 공격해올 것이다.


세토와 원로, 제사장들 그리고 기로와 몇몇 전사들이 모닥불을 가운데 두고 둘러앉았다. 원로와 제사장들은 여자와 아이들을 데리고 먼저 호숫가에 있는 토굴로 피신해 있었기 때문에 죽거나 다친 사람은 없었다. 굴드신의 계시를 받은 대제사장 로웅을 제외하고 말이다. 세토가 침통한 표정으로 먼저 말을 꺼냈다.


"이것을 과연 승리라고 할 수 있는가? 기로 이제 우린 어떻게 해야 하나?"


기로가 잠시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원로들은 이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아무런 말도 못하고 조용히 세토와 기로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비록 우리의 피해가 크고, 아직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나 승리는 승리입니다."

"그래 그렇다고 치자고, 기뻐할 순 없지만 말이야. 그럼 이제 다음 작전은 뭔가? 이제 더 태울 집도 없어."

"으음........."

"대제사장 로웅도 죽고 없는데, 굴드신의 계시는 아직도 감감무소식이요?"


세토가 제사장들을 둘러보며 따지듯 물었다. 제사장들은 조용히 땅바닥만 보고 있었다. 세토가 답답하다는 듯 낮은 신음을 흘렸다.


기로는 로웅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상기했다. 부족의 명운이 기로에게 달려있다고 말했다. 굴드신은 그런 계시를 주었다고 했다. 더욱이 로웅은 거기에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다. 기로를 살렸다. 그리고 로웅이 그렇게 죽어버린 지금, 그가 받은 굴드신의 계시에 관해 아는 것은 기로뿐이었다.


'로웅 대체 무슨 의미냐?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뭘 어쩔 수 있단 말이냐?'


"싸웁시다."


전사 리오가 나서서 말했다. 리오는 전투 중에 한쪽 팔을 잃었으나 여전히 용감했다.


"우리의 피해가 크다지만 놈들은 더 큽니다. 이제 놈들의 전사는 채 스무 명도 남지 않았을 겁니다."

"우리는 몇 명이 남았지?"

"아직 우리에겐 오십 명이 넘는 전사가 남아 있습니다."


세토는 혀를 끌끌 찼다. '싸울 용기가 남아 있는 자는 몇이나 남아 있으려나?' 그때였다. 정찰을 하러 나갔던 페이가 돌아왔다. 세토는 무언가 좋은 소식이 전해지길 기대하며 페이를 반겼다.


"그래 무슨 좋은 소식이 없는가?" 

"도핀커족에서 이걸 보냈습니다."


페이가 커다란 나뭇잎에 싸서 들고 온 것을 펼쳐보였다. 나뭇잎이 펼쳐지는 순간 모인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인상을 찌푸렸다.


피로 얼룩진 그것은 인간의 가죽임이 틀림없었다. 기로만은 침착하게 좀 더 자세히 페이가 가져온 가죽을 들여다보았다. 그냥 살가죽이 아니었다. 살가죽위엔 검붉은 피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조악한 수준이었지만 알아볼 순 있었다.


창과 방패를 든 두 명의 전사가 서로 마주보고 있고, 둘 사이엔 떠오르는 태양의 형상.

세토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천박한 야만인들 같으니... 이게 대체 무슨 의미지?"


그루가 천천히 노쇠한 몸을 이끌고 다가왔다. 기로에게서 그림을 건네받아 살펴보며 말했다.


"어디보자............ 이건 그래........ 결투라네..........."

"결투?"

"아마 도핀커족도 크게 피해를 입었을 것이네. 더 이상 피해를 입기 싫다는 의미겠지. 다시 전투가 벌어지면 두 부족 모두 공멸할 수도 있다네....... 그러니 일대일로 결투를 벌여 승리하는 쪽이 마을을 차지하자는 의미야....... 가운데 태양은 결투를 벌일 시간이야. 내일 태양이 중천에 뜨면 결투를 벌이자는 걸세."


모여 있는 사람들이 웅성이기 시작했다. 기로는 그 사이에서 조용히 홀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로웅이 말한 계시의 의미가 이것이었나?‘


기로가 벌떡 일어서서 가슴을 치며 말했다.


"제가 나가겠습니다."


물론 기로가 이렇게 나서지 않더라도 굴드족의 전사 중 가장 강력한 기로를 나가는 것에 이의는 없을 터였다. 그러나 누군가 도핀커족이 일대일 결투에서 졌다고 순순히 물러갈 것인지에 관해 문제를 제기했다. 다시금 그 문제로 한참을 왈가왈부하는 와중에 결국 참다못한 기로가 다시 일어서서 말했다.


"여러분 굴드신의 계시가 있었습니다!"

"뭐라고?"  


제사장들이 계시는 없었다며 따지고 나섰다. 그러자 기로가 도리질을 치며 말했다. 


"솔직히 저도 그 저의를 알 수 없어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로웅이 죽기 전 그러니까 날 대신해 창에 맞아 죽어가면서........"


기로의 말에 사람들의 얼굴에 놀란 표정이 번져갔다. 기로가 말을 이었다.


"로웅은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굴드신의 계시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계시는 저에게 굴드족의 명운이 걸려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그 의미를 알겠습니다. 결투! 분명 제가 나가 도핀커의 전사와의 결투에서 이기면 그들은 물러가게 될 것입니다. 굴드신이 그것만은 보증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수긍한 듯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기로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결투에서 승리할 것이라 다짐했다. 그러나 세토의 얼굴엔 불안한 빛이 번져갔다.


‘그럼 기로가 패배하면 어찌되는가?’


세토는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진 못했다. 굴드신과 기로를 다시 믿어볼 수밖에 없었다.     


8. 검은 여명

새벽 어스름, 기로를 앞세운 굴드족의 전사들이 천천히 마을 입구 쪽으로 가고 있었다. 뒤쪽으로 세토와 원로들 그리고 제사장들이 그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제사장들은 모든 부족의 염원을 담아 굴드신에게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기로와 전사들은 마을을 빠져나가 한참을 걸었다. 탁 트인 벌판에 도착했다. 굴드족의 전사들이 일렬로 대형을 갖추고 섰고, 중앙에 기로가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한 발 앞에 나와 서 있었다. 산맥 너머로 조금씩 태양이 떠오르며 빛줄기를 쏘아대기 시작했다.


멀찍이 도핀커 전사들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다섯 이었다. 고작 다섯 명의 도핀커 전사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은 성큼성큼 빠른 걸음으로 굴드 전사에게서 스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섰다. 가운데 서 있는 자의 얼굴은 기로도 잘 알고 있었다. 함성을 지르며 도핀커의 전사들에게 명령을 내리던 모습, 단단한 몸과 강인해 보이는 얼굴, 분노와 광기에 젖은 눈빛, 다름 아닌 도핀커의 족장 로왕고였다. 


로왕고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그는 방패도 없이 큰 키에 비해 조금 짧아 보이는 창만 하나 들고 있었다. 도핀커의 표식을 얼굴은 물론, 가슴과 등에도 그려 넣었다. 검붉은 물감이 꼼꼼하게 발라진 몸에 햇빛이 닿자 마치 대리석처럼 번쩍였다. 


기로가 크게 소리를 지르며 가슴을 쳤다가 창끝으로 로왕고를 가리켰다. 로왕고도 크게 함성을 지르며 자신의 가슴을 쳤다. 기로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족장이 직접 나서서 싸우다니?'


그러나 그것은 기로가 도핀커족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에 든 생각이었다. 도핀커의 족장은 언제나 부족의 최강자가 맡는다. 족장이 되고 싶으면 족장과 싸워 이기면 된다. 족장은 언제나 가장 좋은 음식과 여자를 원하는 만큼 차지할 수 있는 특권이 있었다. 누구나 탐내는 자리였다.


로왕고는 이미 수년간 도핀커의 족장 자리를 지켰다. 그런 그가 얼마나 강한지는 따로 설명이 필요 없는 것이다. 당연히 결투 역시 족장의 몫이었다.


어쨌거나 기로는 상대가 정해졌으니 싸우면 되는 것이다. 기로는 창을 든 손에 잔뜩 힘을 주었다. 나무줄기로 엮은 단단한 방패를 앞으로 내밀었다.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상대를 노려보며 천천히 앞으로, 앞으로 전진을 하기 시작했다. 굴드의 전사들이 규칙적인 리듬으로 소리를 내며 기로를 응원하기 시작했다.


“아우! 아우! 아우! 아우!” 


반명 로왕고는 가슴을 활짝 펴고 성큼성큼 평소의 걸음걸이 그대로 기로를 향해 다가왔다. 기로는 그런 그에게서 어떤 살기도 긴장감도 느낄 수 없었다. 반면 기로는 자신에게 부족의 명운이 걸려있다는 부담감에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마침내 로왕고가 기로가 창을 길게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근접해왔다. 기로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끼얏!”


기로가 기합소리와 함께 로왕고의 심장을 겨누고 창을 빠르게 내질렀다. 로왕고는 아무렇지 않게 옆으로 살짝 돌아서며 창을 피했다. 기로가 얼른 창을 회수해 재차 로왕고의 허벅지를 찌르며 들어갔다. 로왕고는 다시 다리를 조금 움직여 창을 피해냈다. 그렇게 기로는 몇 번이나 로왕고를 찌르고 베었으나 로왕고는 여유 있게 기로의 공격을 모두 피해냈다.


심지어 그의 입가엔 가벼운 웃음기마저 어려 있었다. 기로는 벌써 지쳤는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기로의 뒤에서 응원을 하던 전사들의 얼굴에 걱정스런 빛이 역력했다.


한참 그렇게 기로의 창을 피하기만 하던 로왕고가 마침내 창을 고쳐 잡았다. 기로가 위에서 아래로 로왕고의 머리를 노리고 창을 내려쳤다. 로왕고가 옆으로 살짝 피하는가싶더니 순식간에 창을 놓았다가 길게 잡으며 크게 휘둘렀다. 촥! 소리와 함께 피가 튀었다. “아아!” 굴드의 전사들 사이에 탄식이 새어나왔다.


로왕고의 창이 기로의 쇄골 아래쪽을 가로로 길게 베어냈던 것이다. 다행히 기로가 재빨리 뒤로 물러서는 바람에 깊게 베이진 않았으나 상처에서 피가 스멀스멀 흘러나오고 있었다. 로왕고는 여유 있게 창끝에 묻은 핏물을 바닥에 탁 털어냈다.


기로는 숨을 헐떡이며 다시 자세를 고쳐 잡았다. 


‘제기랄.... 이 자는... 이 자는 이길 수 없어.........’


로왕고는 기로를 가운데 두고 원을 그리듯 주위를 돌았다. 기로는 제자리에 서서 창끝으로 로왕고를 쫓았다. 이번엔 로왕고가 먼저 창을 찌르며 들어왔다. 너무나 빠르고 강력한 일격에 기로는 뒤로 물러나며 겨우 창을 쳐냈다. 뒤이어 로왕고가 다시 창을 찔러 들어왔고 이번엔 창끝이 기로의 허벅지를 베고 지나갔다. 


그렇게 기로와 로왕고의 공방이 계속되었다. 로왕고의 맹렬한 공세가 펼쳐지는 가운데 기로는 방어에 급급했다.


굴드 전사들의 응원소리가 잠잠해졌다. 아니 로왕고가 기로를 단방에 죽이지 않는 이유가 궁금해질 정도였다. 로왕고는 기로를 조롱하고 있었다. 유린하고 있었다. 일부러 깊은 상처를 내지 않고 시간을 끌며 기로의 몸 곳곳에 생채기를 냈다. 부족의 명운이 걸린 대결이건 뭐건 그들이 해왔던 대로 적에게 더 많은 고통을 안겨주려는 싸움의 유희인지도 몰랐다.


기로는 완전히 지쳐버렸다. 제대로 창을 잡고 서 있지도 못했다. 로왕고는 여전히 기세등등하게 창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틈을 보고 있었다. 기로는 겨우 창을 다시 고쳐 쥐었다. 기로는 로웅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며 투지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한 번만.... 기회가... 한 번은... 올 것이다.... 저 자라고 완벽하진 않을 거야... 로웅... 굴드... 굴드신이시여.............'


마침내 로왕고가 끝장을 내려는 듯 표정이 바뀌었다. 서슬 퍼런 살기를 내뿜으며 로왕고가 기로에게 달려들었다. 로왕고의 창이 기로의 심장을 노리고 들어왔다. 


'지금이다!'


기로가 몸을 살짝 틀자 로왕고의 창이 살짝 빗겨갔다. 로왕고의 창은 기로의 어깨를 꿰뚫었고, 기로는 동시에 몸을 확 돌리며 창을 휘둘렀다. 로왕고는 빠르게 자신의 창을 놓아버리고 뒤로 물러섰지만 기로의 창에 가슴 쪽을 깊게 베었다.


“우와!!!!!!!!!!!”


로왕고의 가슴에서 피가 흩뿌려지며 굴드 전사들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도핀커의 전사들이 앞쪽으로 움직이려는 찰나 로왕고가 한쪽 팔을 들어 그들을 멈춰 세웠다. 로왕고는 가슴에서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지만 똑바로 일어선 채 여전히 매서운 눈빛으로 기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직 결투는 끝나지 않았다.


기로는 어깨에 꽂힌 창의 끄트머리를 잘라냈다. 기로도 크게 부상을 입었다.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기로에겐 창이 있고 로왕고는 맨손이었다. 서둘러야했다. 기로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뱉으며 하늘을 향해 커다란 함성을 내질렀다. 


“끼야아아아아호!!!!!”


기로는 창을 앞으로 꼿꼿이 세우고, 로왕고를 향해 쏘아지듯 뛰쳐나갔다. 기로는 마지막 힘을 모두 창끝에 실었다. 기로의 창이 로왕고의 심장에 닿는 찰나 로왕고가 날아드는 창을 한쪽 손으로 덥석 잡더니 기로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부러진 이와 피가 공중에 흩날렸다. 동시에 로왕고의 갈퀴 같은 손이 기로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기로의 목이 마치 두부처럼 갈라지며 로왕고의 날카로운 손톱이 기로의 목젖을 파고들었다. 믿을 수 없는 엄청난 힘으로 로왕고는 목구멍에 손을 쑤셔 박더니 기로의 혀를 움켜잡아 뿌리 채 뽑아버렸다.


로왕고는 뒤로 홱 돌아서며 기로의 기다란 혀 하늘 위로 들어 올렸다. 기로는 목구멍에서 분수처럼 피를 뿜으며 바닥에 고꾸라져버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우와아!!!!!!”


도핀커 전사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로왕고의 수신호를 필두로 도핀커의 전사들이 굴드의 전사들을 향해 돌격해왔다. 굴드의 전사들은 우왕좌왕하다 도핀커의 칼날에 피를 뿌리기 시작했다.


끝이다. 끝이었다. 마을에 이 사실을 알려야했다. 도망쳐야 했다. 다른 전사들이 도핀커의 전사들을 막아선 사이, 페이는 마을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페이는 죽을힘을 다해 뛰고 또 뛰었다. 페이는 얼마 걸리지 않아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페이가 도착했을 때 처음으로 본 것은 마을입구에 걸려 있는 족장 세토의 잘린 머리와 벗겨진 살가죽이었다. 페이의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페이는 얼른 마을로 뛰어 들어갔다. 


도핀커의 전사들이 곳곳에 보였다. 눈에 보이는 숫자만 족히 서른 명은 되어보였다. 첫 전투에 참여했던 도핀커 전사들이 전부가 아니었던 것이다. 어쩌면 도핀커는 아예 처음부터 이럴 계획이었는지도 몰랐다. 기로와 로왕고가 결투를 벌이는 동안 도핀커의 전사들이 마을을 습격한 것이다.


로왕고가 시간을 끌며 기로와 싸운 진짜 이유가 존재했던 것이다. 비명과 절규가 이어지며 잘려나간 팔, 다리, 머리가 곳곳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흘러나온 피가 바닥을 붉게 적시고 있었다.


페이는 허탈한 표정으로 난장판이 된 마을을 바라보았다. 문득 호숫가에 숨어 있는 여자와 아이들이 생각났다. 페이가 막 정신을 차리고 호수로 달려가려는 찰나 페이의 가슴이 꿰뚫리며 뾰족한 창끝이 튀어나왔다.


페이는 피거품을 물고 뒤를 돌아보았다. 도핀커 전사 하나가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전사는 무자비하게 창끝을 비틀며 아래로 창을 내렸다. 페이는 허탈한 표정으로 내장을 쏟으며 그대로 무너지듯 제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태양은 이제 산맥 위로 떠올라 그 모습을 완전히 드러냈다. 태양은 한때 고요하고 평화롭기만 하던 곳, 지금은 끔찍하고 참혹한 전쟁터로 변해버린 굴드의 마을을 밝게 비추어 그 참상을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굴드족은 그렇게 멸망했다.


도핀커족은 풍요로운 분지를 차지했다.       


9. 수레바퀴  

탐색꾼은 도핀커족이 굴드의 마을에서 100년은 살 수 있으리라 예상했으나, 고작 7년이 지난 뒤 도핀커족은 또다시 새로운 정복지를 찾아 나서야만 했다. 도핀커족은 굴드족보다 훨씬 많이 먹었다. 버려지는 건 더 많았다. 


마구잡이로 자원을 낭비했다. 더하여 전쟁의 와중에 굴드족의 밭도 전부 불태워버렸다. 호수의 물고기도 씨가 말랐는지, 기술이 부족한지 잡히지 않았다. 그러니 그토록 풍요롭던 분지도 떠나야만 할 시기가 온 것이다.


허나 문제될 것은 없었다. 도핀커족은 또 기름진 땅을 찾아내고, 또 정복하면 되었다.


새로운 땅을 찾아 떠났던 탐색꾼이 돌아왔다. 소득이 있었다. 아주 커다란 마을이 있으며, 거대한 황금빛 벌판에서 무한정 식량을 얻는 부족이 있다고 말했다. 그 황금의 벌판을 차지하면 이번에야 말로 100년을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


굴드족을 정복하며 전과 달리 피해가 컸기 때문에 전사들의 숫자가 많이 줄었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또 이길 것이다. 다만 이번엔 사내아이들은 죽이지 않고 살려두기로 했다. 물론 용감하고 튼튼한 전사가 될 수 있는, 당장 창을 들 수 있는 아이들만 말이다. 


도핀커는 탐색꾼이 말한 황금벌판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꽤 오랜 이동의 끝에 도핀커족은 멀리 황금벌판이 보이는 곳에 도달했다. 과연 탐색꾼의 말대로였다. 황금벌판은 끝이 안보일 정도로 넓었다. 또한 그곳에서 일을 하고 있는 자들은 성기를 조그만 천으로 가리고 있는 우스꽝스런 차림새였으며 멸망한 굴드족보다도 작고 허약해보였다.


벌판 가까이 염탐을 갔다 돌아온 자는 이렇게 말했다.


“놈들은 작고 약하다. 심지어 우리처럼 단단하고 날카로운 이도 없다.”


여전히 도핀커의 족장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로왕고는 이번에도 승리를 확신했다. 분지를 정복했을 때보다도 쉬울 것 같았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은 황금벌판에서 조금 떨어져 있었는데 벌판만큼이나 아주 커다란 마을이었다. 굴드족의 마을보다도 훨씬 컸다. 마을을 둘러친 울타리도 크고 튼튼해 보였다. 특이한 것은 마을 안쪽 군데군데 동그랗게 둘러친 울타리가 또 있었고, 그 안에 짐승들을 가두어 키우고 있었다. 도핀커족은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그 안의 짐승들만 잡아먹으며 살아도 몇 년은 버틸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도핀커가 당도한 이튿날 새벽, 의식이 거행되었다. 황금벌판의 마을 입구의 문지기가 끔찍하게 살해당했다. 황금벌판의 마을사람들도 도핀커족의 침공을 눈치 챘다. 도핀커는 자정까지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리 길게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황금벌판의 마을 쪽에서 먼저 싸움을 걸어온 것이다. 도핀커족은 당연히 그에 화답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언제나 그래왔듯 도핀커족의 전사들은 황금벌판의 마을 전사들보다 훨씬 크고 힘도 셌다. 전투기술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쉽게 이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도핀커 전사들은, 로왕고는 무언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황금벌판 마을의 전사들은 끝이 없었다. 둘을 베면 셋이 나오고 그 셋을 베면 다섯 명이 튀어나왔다. 그들은 마치 말벌에 들러붙는 꿀벌 떼와 같았다. 필사적이었다.


마침내 도핀커의 전사들이 하나, 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로왕고도 미친 듯이 싸우며 적들을 베어 넘기고 있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쉴 새 없이 칼과 창이 찔러 들어왔다. 마침내 로왕고도 지치기 시작했다.


세상에 무서울 것 없던 그가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동안 실감해본 적 없던, 진짜 죽음이 아주 가까이 다가왔을 때 느껴지는 필연적 공포.


로왕고는 다급히 후퇴를 명령했다.


도핀커족 사상 최악의 패배였다. 목숨을 건져 도망칠 수 있었던 것은 큰 부상을 입은 로왕고와 두 명의 전사뿐이었다. 나머지는 모조리 죽임을 당했다. 물론 훨씬 많은 숫자의 황금벌판 마을 전사들이 희생됐지만, 족장을 포함해 고작 셋만 남은 도핀커족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숫자의 전사가 건재하고 있었다.


로왕고는 이대로 도핀커족의 소멸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분지로 돌아가야 했다. 다시 힘을 키워야 했다. 로왕고는 남은 두 명의 전사들과 반드시 복수할 것을 다짐했다. 새로운 터전을 찾아 전쟁을 시작한 이래 난생 처음 원래 살던 마을로 돌아가는 수모를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로왕고와 두 전사는 끝내 분지로 돌아가지 못했다. 추격대에 당한 것은 아니었다. 분지를 향해 돌아가는 중, 로왕고와 남은 두 명의 전사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열병에 걸렸다.


고열에 시달리며 구토를 하고 설사를 했다. 음식도 먹지 못하고 앓았다. 마침내 그렇게 앓던 전사 하나가 아침에 눈을 뜨지 못했다. 그리고 같은 날 저녁 유일하게 남은 전사 하나도 죽음을 맞이했다.


도핀커족의 유일한 생존자이자 족장인 로왕고는 죽어 시체가 되어 누워 있는 그들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며 시름시름 앓다가 다음날 새벽 여명이 밝기 전, 그 역시 숨을 거두었다.


도핀커족은 그렇게 세상에서 사라졌다. 


도핀커족을 소멸로 이끈 황금벌판의 마을사람들은 세력을 점점 더 넓혀갔다. 황금벌판은 더 넓어졌다. 더 많은 식량이 생산됐고, 더 많은 아이가 태어났다.


수레바퀴는 그렇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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