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by 소이

인스타그램 피드를 보다가 얼마전 팔로우한 훈녀 인플루언서의 착장이 눈에 들어왔다. 브라운 같기도 하고 카키 같기도 한 티에 카키 같기도 하고 베이지 같기도 한 와이드슬랙스를 받쳐 입었는데 톤온톤 코디가 내 마음을 흔들었다. 이번 코디는 광고가 아니라 본인이 직접 구입한 제품이라며, 그녀가 친절히 댓글로 남겨놓은 쇼핑몰 사이트에 들어가보니 위에 티는 9만원 , 슬랙스는 15만원. 내 형편에 상당한 고민이 필요한 가격이기도 했지만 내 돈으로 내가 사는 건데도 주저했던 건 네 얼굴이 떠올라서였다. 왠지 모르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낮은 빌라들이 밀집한 골목. 네가 사는 동네는 생각보다 낡았다. 좁은 골목에 차선 구분이 없고 거기다 불법주차까지 일상이라 반대편에서 차가 오는 것 같으면 한참을 기다리거나, 선수쳐서 먼저 치고 나가야 하는 곳. 넌 아무 말 없는 내게 우리 동네 귀엽지? 라고 말했다.


너는 레고를 좋아했다. 우리는 레고를 넣어둘 장식장을 구경하러 이케아에 갔었는데, 내가 옆에서 잔뜩 바람을 넣은 보람이 있게, 결국 넌 적당한 가격의 제품을 하나 구입했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결정한 거면서도, 넌 매장 캐리어에 제품을 올리는 순간까지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빌라에 사는 탓에 이렇게 큰 박스를 어떻게 계단으로 옮길까도 걱정이었지만, 둘 공간도 없는데 왜 샀냐고 가족들에게 핀잔을 들을까봐 이기도 했다.

너는 운동화도 참 좋아했는데, 크림(kream)을 알려준 것도 너였다. 몇배씩 프리미엄을 붙여 사야하는 운동화를 발매가에 구매할 수 있는 귀한 기회에 어쩌다 당첨되면 너는 뛸듯이 기뻐했다. 가끔 나에게도 응모해보라며 링크를 보내주기도 했다.


너는 부모님 때문에 생긴 빚 때문에 월급을 하나도 저축 못한다고 했다. 그리고 본인이 가장과 다름이 없다는 말도. 내가 은글슬쩍 '부모님이 얼른 장가가란 말씀 안하셔?' 물으니 그런적 없다고 대답했다. 나는 속으로 '진짜 가장 맞네.' 라고 생각했다.

우린 만나면 딱히 근사한 데이트를 한 건 아니었다. 우리집에서 같이 배달 음식을 시켜 먹은 적도 많았는데 그냥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너는 나한테 고맙다는 말을 많이 했다.


십수년간 계속 안고 있던 집안일 문제로 이번엔 송사에까지 휘말렸다고. 마음에 더이상 여유가 없다고 네가 이별을 말했을 때, 사실 널 원망하는 것처럼 굴었지만 누구보다도 이해했다.

하지만 '그래. 그런 상황에서 무슨 사랑이고 연애야.' 하며 순순히 이별을 받아들이는 것 보다, 헤어지고 싶지 않은데 불쌍하게 차인 여자가 되어 서럽게 널 원망하는 것이 너에 대한 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앞가림만 하면서 그냥저냥 살면 되는 내가. 너의 힘듦, 너의 상황을 함부로 이해한다고 지껄이면 네가 비참할 것 같았다.

"그런 거 아무 것도 아니잖아."

"겨우 그런거 때문에 헤어지자고 해?" 라며 '겨우 그깟 것 때문에 나를 차버린 놈'으로 만들어버리는 게 여러모로 나아보였다. 불쌍한 너. 그런 너한테 차이고 싶지 않은 더 불쌍한 여자 역할을 기꺼이, 제대로, 소화하고 싶었다.


혹시 내가 부담 줬냐고 물으니 오히려 부담을 너무 안 줘서 탈이었다고 말하는 네 앞에서 엉엉 울다가 진이 빠져서, 잘 지내라. 시시한 인사도 없이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내 뒷모습을 없어질때까지 쳐다보는 네가 느껴졌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뒷모습으로 집에 돌아왔다. 잠시 멍하게 방바닥에 앉아 있다가 눈물이 묻은 눈으로 쇼핑몰 장바구니에 들어갔다. 네 얼굴이 오버랩 되어 끝내 사지 못했던 티와 슬랙스 도합 24만원을 단숨에 결제하고 너무 피곤해 잠이 들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마라탕 응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