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 시학의 단편들

가스통 바슐라르

by ORANGe TANGo





리뷰




불의 시학의 단편들




<불의 시학의 단편들>은 저자 가스통 바슐라르가 임종 직전까지 쓴 글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생존에 이 책을 완성하지 못했고, 그의 딸인 수잔 바슐라르가 새로이 편집하여 1988년, 가스통 바슐라르 사후 26년 만에 책을 내놓았다.

알 만한 사람은 이미 알고 있을 가스통 바슐라르는 철학자이면서 시인이자 문학비평가로 유명하다. <불의 시학의 단편들>은 불의 이미지를 이용, 시적 이미지와 연결시켜 설명하고 있는 일종의 문학평론서 같은 책이다. 총 3부로 나눠져 있고, 1부 피닉스, 2부 프로메테우스, 3부 엠페도클레스로 구성되어 있다.


"불이란 결코 부동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잠잘 때에도 살아 움직인다. 체험한 불은 늘 긴장된 존재의 표시를 지니고 있다." (18p)


바슐라르가 말하는 '불'이란 무엇일까? 이 '불'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바슐라르는 피닉스와 프로메테우스 그리고 엠페도클레스의 일화를 끌고 온다. 쉽게 말하자면, 바슐라르가 말하는 불은 정신적 몽상적 성격을 지닌 일종의 신화적 상상의 이미지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시에서 구현된 이미지와 동일하다.



"이제, 더 이상 그 누구도 믿지 않고, 진정 그 어떤 경험도 나타내지 않는 전설들, 일상생활의 심리에서 타당한 그 어떤 토대로 발견할 수 없는 전설들, 그런 전설들이 우리 시대의 시학 속에서 강력한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피닉스는 이제 그 말의 진정한 의미에서 언어의 존재이며, 시적 언어의 존재이다. 피닉스는 단지 그것뿐이지만 또 그 모든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책들의 존재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끊임없이 다시 태어난다. 그것은 항상 새로 치장하고 시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불의 시학 속에서 피닉스들은 수없이 많다. 불의 시인들은 아주 꼼꼼히 읽으면, 우리는 언제나 매혹적인 불새가 갑자기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59-60p)



피닉스라는 전설의 새 혹은 상상의 새는 이중적 의미를 지닌 복합적인 상징이다. 피닉스는 스스로 발산하는 불로 점점 죽어간다. 결국 재가 되어버려 그 형태가 소멸되어버리지만, 금방 불의 날개를 펼치며 존재론적 형태로 소생하는 기적을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먼저, 고대 이미지에서, 경이로움이 규칙이라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상상력은 단숨에 가공할 만한 존재를 찾아낸다. 피닉스는 바로 이중적 우화의 존재이다. 즉, 그는 사진의 고유한 불로 타버리지만 또한 자신의 고유한 재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자신이 상상하는 것을 더이상 믿지 않는 우리는 이런 이중의 기적을 체험하려고 시도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이 피닉스를 믿었던 만큼, 알려진 대로 그를 알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믿어야 한다. 현상학자로서 나는 지나치게 경신하는 태도에 빠지지 않으려고 조심하며 믿기 어려운 이미지를 믿어야 하는 것이다. 시인들은 이미지들의 미묘한 다양성을 통해 전설적인 새를 살아 있게 하려는 우리를 도와줄 것이다." (86p)



시적 이미지는 피닉스라는 상상의 동물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뜨겁고 강렬하며 거대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미지의 뜨거움은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그것은 곧 차가운 재로 소멸하게 된다. 시인들의 역할은 죽어버린 이미지를 다시 재가공하여 새로운 피닉스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다시 재탄생한 피닉스는 이전의 피닉스와 같으면서도 전혀 다른 불을 뿜어내게 된다. 예컨대, 4월이 따뜻한 봄의 이미지로 표현되었다면 다시 태어난 4월은 잔인한 이미지로 표현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시의 이미지는 혹은 피닉스는 계속해서 소생하는 기적을 우리에게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가스통 바슐라는 '불'을 설명하기 위해 프로메테우스라는 신화를 끌어온다. 프로메테우스는 불을 훔쳐 인간들에게 준, 어쩌면 인간들이 가장 고마워해야할 신일 것이다. 프로메테우스가 가져다 준 '불'은 인간이 신과 비슷할 정도의 지성을 갖추게 되는 하나의 도구가 된다. 그러나 바슐라르는 이 '불'을 지성의 도구보다는 정신적 도구로 보고 있다. 인간들은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주기 전까지 자신들의 몸 안에 불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말한다. 불 곁에 있던 인간들은 자신들의 몸이 뜨거워지는 느낌을 받게 되고, 그 느낌은 정신의 세계와 직결되는 감각을 일깨워주게 된다. 점차 인간들은 불을 지피는 행위(창조된 불)가 빈번해지면서 불의 느낌(체험의 불)을 느끼는 횟수가 늘어나게 된다. 창조와 체험의 반복은 인간이 야릇한 몽상을 하도록 도와주게 되면서 새로운 이미지 창조에 기여하게 된다. 결국 프로메티우스가 인간에게 가져다 준 불은 인간들의 정신적인 활동을 활발하게 하는데 큰 기여를 한 셈이 된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마지막으로 엠페도클레스라는 인물의 일화를 빌어 불의 시학을 격상시킨다. 엠페도클레스는 에트나 화산 속으로 들어가 죽은 인물이다.


"에트나 화산 위에서의 엠페도클레스의 죽음에 대한 명상은 불의 시학을 격상시킨다. 이미지는 행위를 능가한다. 그리고 이 초월은 항국적인 시적 행위를 구성한다. 엠페도클레스의 죽음은 단순히 철학사의 한 잡보가사와 같은 것이 아니다. 진실로 삶과 죽음에 대해 숙고하고 불을 꿈꾸는 자의 영적인 삶에서 무엇이 엠페도클레스의 이미지를 지탱하고 있는가? 그것은 물론 사회생활 중에 일어나는 여러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며, 사람들이 원래의 철학으로 잘못 지칭하고 있는 철학적 사고의 단편들 속에 흩어진 철학도 아니다. 아니다! 엠페도클레스는 소멸의 시학을 보여주는 가장 중대한 이미지들 중 하나다. 엠페도클레스의 행위에서 인간은 불과 마찬가지로 위대하다. 인간은 진정한 우주극의 위대한 행위자이다." (187-188p)



불은, 우리를 그 속으로 내던지게 만드는, 죽음을 유혹하는 강력한 마력을 지니고 있다. 불의 정상으로 올라간 엠페도클레스처럼, 우리는 불을 쫓는 한 마리의 나방이 된다.



"불 속에서의 자유로운 죽음의 영웅, 엠페도클레스가 우리에게 이런 몽상들을 열어주고 우리 안에 유지시켜준다. 바로 그 점에 이미지의 운명인 인류의 운명이 있는 것이다. 불이 우리에게 죽음을 상상하도록 강요하는 때가 있다. 엠페도클레스는 이미지의 운명에 사로잡혔다." (189p)


불은 탄생과 동시에 죽음도 체험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우리의 상상은 탄생과 죽음이라는 정신적 무게가 저울 양쪽에 매달리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기보다 그것들의 무게가 양쪽으로 고르게 분포되어 저울의 평형을 유지시켜준다. 이것은 참으로 대단한 우주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시인들은 이런 불의 이미지 속으로 어떠한 두려움 없이 몸을 내던진다. 엠페도클레스의 행위처럼 시인들은 명상을 초월하는 시적 의미를 이미지에 부여하게 되는 것이다. 존재를 불길 속에 투사하는 것에 대하여, 명상에서 참여로 이어지는 그들의 행위는 이미지 속에서, 이미지 때문에, 죽음을 경험하게 된다.



"문학에서, 피닉스는 다시 태어난다. 무에서 펜의 재에서" (79-7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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