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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상 소설가 Dec 02. 2020

거짓말은 하지만 죄책감은 없습니다.

"  아빠 출근했어?  "

"  응, 회사 갔지.  "

"  재택근무라며?  "

"  일주일에 두 번만 재택근무야.  왜?  아빠 보고 싶어?  "

"  응  "

"  아빠가 출근하기 전에 너 한참 보다가 궁둥이 두들겨 주고 갔는데  

   기억 안 나?  "

"  그랬어?  아빠 보고 싶다.  "

"  이따 점심시간에 아빠한테 전화해.  아빠도 너 보고 싶을 거야.  "

"  응  "


딸아이를 깨울 때마다

아이는 매번  " 아빠는? "이라는 말을 한다.

눈에 보이지 않으니 어디 있냐고 잠결에도 항상 물어본다.

출근하는 남편이다 보니 아침마다 아빠가 안 보이는 것은 당연하지만

어릴 때부터 아이는 눈을 뜰 때마다 아빠를 찾는다.


내가 안 보이면 딸아이는 아빠한테  "  엄마는?  " 이렇게 물어볼까 궁금하면서도

아빠가 보고 싶다고

자연스럽게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딸아이가 나는 부럽다.

많이 많이, 정말 정말 부럽다.


딸아이가 보고 싶다고,  아이가 없으니 집이 텅 빈 것 같다고

정말로 딸을 보고 싶어 하고 그리워하는 남편을 보고 있으면

'  부녀관계가 좋지 않은 집도 많은 데 우리 집은 정말 다행이다.  '라는 생각도 들지만

한편으로는 나도 딸아이처럼

나를 정말로 좋아하고, 보고 싶어 하는 아빠를 가지고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남편은 허둥지둥 출근을 하느라

딸을 보고 가지도  엉덩이를 두들겨 주고 가지도 못했다.

나는 딸이 말귀를 알아들을 무렵부터 거짓말을 시작했다.


거짓말의 전부는

딸과 남편 사이 기억의 조작이다.


남편에게는

딸이 아빠 보고 싶다고 수시로 말해.  아빠를 찾아.  아빠 언제 오냐고 자꾸 물어.

딸에게는

아빠가 너 보고 싶다고 말해.  너 잘 때 뽀뽀해 주고 출근했어.  엉덩이 두들기고 갔어.

네가 엄마를 더 좋아한다고 느껴서 서운하데.  등등


서로가 서로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거짓말이다.

내 거짓말을 들은 둘은 몹시 흐뭇해한다.

누군가가 나를 좋아하고,  보고 싶어 하고, 그리워한다는 말

모두들 듣기 좋아하고  듣고 싶어 하는 말

그 말들은 신비롭고 강력한 힘이 있어

진심으로 서로를 좋아하고 그리워하게 만들었고 현재도 그 힘을 발휘하고 있다.

 

현재 중 2인 딸은 아직도 아빠와 포옹을 하고 뽀뽀를 하며

쇼핑을 가고, 영화관이나 팬시점에 가거나 카페에 간다.

내가 둘 사이에 끼지 않아도 어색함이나 불편함은 없다.

아빠랑 가면 사고 싶은 걸 더 사준다고   어떨 때는 반기기도 하고

딸과 남편 둘 중 하나가 없으면 허전하다고 습관처럼 얘기를 한다.


얼마 전

남편과 거실에 앉아 얘기를 나누다

기말고사 준비로 학원과 스터디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는 딸의 얼굴을 보지 못하자

남편은 맨날 딸의 자는 모습만 보게 된다고

딸이 너무 보고 싶다고 말했다.


"  나중에 결혼하면 어떻게 살려고?  나한테나 잘해.  "   놀리는 나의 말에

"  그런 말 하지 마.  벌써 눈물 난다.  "


맙소사!  정말 남편은 두 눈이 시뻘게 져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딸이 보고 싶다고 눈물을 흘리다니 고작 며칠인데.........

나는 남편의 반응이 재미있어 놀리면서도 딸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남편은 딸 때문에 울었지만

나는 딸 때문에 우는 남편을 보고 화장실에 가서 남편 몰래 울었다.





한 번도 아빠가 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말한 적도 없다.

어렸을 적  항상 부재중이었던 아빠

언니, 오빠, 엄마가 종종 말하는 아빠였지만 나에게 아빠는 실체가 아닌 단어로만 존재했다.

아빠의 존재가 내 기억에 시작됐던 시간은

사우디에서 귀국한 날 공항에서 집으로 오는 택시 안이 최초이다.

택시 안에 있던 내 손에는 장난감과 낙타 인형이 쥐어졌고

보조석에 앉은 낯선 아빠의 목소리

내 옆에 앉은 엄마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부터 내 손에는 이국적인 사우디의 낙타 인형과

한국에서 보지 못한 각종 장난감들과 희한한 모양의 돌들

최신 전자제품이 내 관심사였다.


홀어머니 밑 8남매의 장남

중장비 일을 어린 시절부터 해오셨기 때문에 아빠는 집안의 어린 가장이었고

어머니와 어린 동생을 먹이고 공부시키기 위해 어린 나이부터 중장비 일을 배우셨다고 했다.

월남, 사우디 해외의 건설 현장으로 나가 일을 하셨고  다행히 일머리가 좋아 큰돈을 벌으셨다.


할머니 집 한 채, 우리 집 한 채 장만을 했고

결혼을 해서도 수입의 절반은 생활력은 제로 인체 8남매를 낳으신 할머니에게 보내야 했다.

할머니와 고모들 삼촌들에게 어린 며느리는 달갑지 않은 만만한 대상이었다.

시어머니와 엄마보다 나이 많은 큰 고모와 작은 고모는 연합을 해

18살에 시집 온 어린 엄마를 엄청나게 괴롭혔다고

엄마는 자식 때문에 이혼하지 않고 버텼다고 한스럽게 말하신다.

만약 엄마에게 든든한 친정이 있었다면, 자식이 하나나 둘이었으면 이혼을 했을 거라도 하신다.


'  너희들 때문에 나는 이혼하지 않고 살았어.  '


사실이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지만

이 말은 어린 자식에게 알 수 없는 죄책감을 미안함을 느끼게 해 준다는 것을 엄마는 아직도 모르는 듯하다.


'  너 때문에 혹은 너희들 때문에 산다.  '라는 말은


나라는 존재를 부모의 불행을 먹고 자라는 존재로 인식하게 된다.



지금도 엄마는 불행했던 자신의 결혼 생활을 자주 말하신다.

일흔이 넘어 백발이 되고, 팔다리가 가는 한없이 늙어가는 자신을 볼 때마다 엄마는

인생이 허무하고 헛헛하다 느끼시는 것 같다.

 

부부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1남 3녀를 낳았고

장남인 큰 오빠는 놀기 좋아하는 철부지

큰언니는 일찍 철이 들어 집안일을 돕고, 나를 엄마처럼 잘 보살펴 주었다.

작은 언니는 멋 부리기를 좋아하고 친구들을 좋아해 나를 맨날 떼오 놓고 놀러 다녔지만

언니들이 있어 나는 잘 자라난 것 같다.

(  현재 미완 결인 현아 이야기는 내 어린 시절 이야기가 녹아들어가 있다.  )


아버지는 사우디에서 b형 간염에 감염이 돼서 본국으로 귀국을 해야 했다.

해외에서 일하다 보면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아야 하는 데

질병이 있으면 강제 귀국을 해야 한다.

아빠는 그렇게 한국으로 돌아오셨고,  몇 달을 쉬시다 엄마를 가게를 얻어 장사를 시작하셨다.

사우디에서 번 돈은 모두 엄마가 관리를 했는데


1980년대 초반 1억이 훨씬 넘는 그 큰돈을 엄마는 속초에 사는 친정 식구들 중

삼촌들을 고용해 연탄공장을 차리셨고,  몇 년 되지 않아 그 돈을 고스란히 날렸다.

돌아가신 외할머니는 친어머니가 아니었고

삼촌들은 모두 배다른 형제로 엄마에게 속초 친정은 진짜 친정은 아니었던 것 같다.

미안하단 말을 듣기는 했지만 책임을 지는 사람은 누구 하나 없었고

먼 친척들에게 들은 말로는 삼촌들이 그 돈으로 매일 술집을 드나들었고, 돈을 펑펑 쓰고 다녀서

여자들이 끊이지 않았다고 돈을 물 쓰듯이 하며 살았다고 했다.

가족을 사기죄로 고발할 수는 없었다.


그때부터 부모님의 불화가 시작된 것 같다.

아버지 입장에서는 해외에서 수년간 힘들게 번 돈을 고스란히 날리게 되고

엄마는 본인의 잘못이 아닌 친정 식구로 인해 돈을 날렸으니 억울했었을 것이다.

돈은 버는 힘도 중요하지만 지키는 힘이 더 세야 하는 데

30대 후반이었던 엄마는 돈을 지키는 힘이 없었고 누구 하나 조언을 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다행히 장사는 그럭저럭 되고

건강이 회복된 아빠는 다시 중장비 일을 하시고

지방의 건설현장으로 다니면서 돈을 버셨다.


엄마가 날려버린 그 돈은 엄마에게 평생의 멍에가 되어 힘들게 일하시고 절약하며 살게 했다.

사기당한 그 돈을 갚아야 한다는 의무감이 엄마에게는 있었나 보다.

부부지만 헤어져 사는 시간이 더 길었던 부모님은 사이가 좋지 않으셨고

처가의 사기와 성격차이

그렇게 수 십 년 동안 사셨지만

부모님이 서로를 아끼고 사랑했던 기억보다 싸우고 서로를 비난하던 시간이 더 많았다.


부부 사이가 좋지 않으면 자식들은 대부분 아빠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자녀들에게 엄마는 아군이자 전우

자신과 한 몸으로 느끼는 엄마를 비난하고 공격하는 아빠를

자식들은 적으로 인식하게 되어 아빠를 고립시키게 된다.


아빠는 장남인 큰 오빠와 둘째 언니를 예뻐했었다.

큰 언니와 나에게는 별로 정을 주지 않았다.

나도 알 수 있었다.  아빠가 나를 예뻐하지 않는다는 것을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왜 둘째 언니를 예뻐하는지 알 수는 있었다.

눈치가 빠른 둘째 언니는 아빠의 비위를 잘 맞추었고

장녀인 언니와 나는 무뚝뚝하고 대면 대면하게 아빠를 대했다.

자신에게 살가운 둘째와 든든한 장남

나도 아빠에게 사랑을 받으려 몇 번의 시도는 있었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나는 아빠가 어색하고 항상 낯설었다.


내가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어학연수를 떠났을 때 작은 언니가

갑작스러운 부모님의 이혼 소식을 알려주었고

형제들은 모두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고 나가고 있어

엄마가 돌아올 때까지 모든 지원을 끊겠다는 아빠의 선언에 나는 한국으로 돌아와

아빠와 둘이서 살아야만 했다.

이때부터 나는 아빠와 전쟁 아닌 전쟁을 치렀다.


아빠는 엄마와 합치길 원하셨고, 엄마는 완강히 거부하셨다.

자식들이 본인 곁으로 오게끔 자식들이 엄마를 설득하길 원하셨지만

아빠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 비난을 아직 아빠 곁을 떠나지 못한 내가 모조리 받게 되었다.

결국 나는 집을 나는 쫓겨나듯 집을 나와 엄마와 둘이서 살아야 했고

2년여쯤 엄마와 살다 둘째 언니 내외가 합쳐 결혼할 때까지 함께 살았다.


지금 아빠는 다른 분과 결혼해서 지방에서 살고 계신다.

나의 결혼식을 아빠에게 알리지는 않았다.  

그렇게 나는 아버지와의 연을 끊었다.

그립거나 미워하는 마음도 없다.

이제는 남과 같은 사이가 되었고

그것이 더 이상 서럽지도 않다.

시간이 너무 흘러버려 모든 감정이 다 사라지게 된 것이다.


결혼을 하고 딸을 낳아 기르면서

나의 목표는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었다.

부부 사이보다 남편과 딸 사이

사이좋은 부녀관계를 만드는 것

그것이 나의 가장 큰 목표였다.


나와 아빠 같은 관계를 갖는 것이 너무나 싫었다.

딸이 나처럼  살게 할 수는 없다.


나와 아버지의 사이가 안 좋았던 경험이

남편과 딸 사이를 가깝고 서로를 사랑하게 만들었다.


매일 아침  그리고 수시로

나의 거짓말은 계속될 것이다.

큰 이변이 없는 한 앞으로 그 둘의 관계도 그럴 것 같다.

나는 거짓말을 계속할 테니


나와 아버지의 시간은  이미 지나갔지만

아직 딸과 남편의 시간은 현재도 미래도 남아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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