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화 약국의 간판은 내려졌고 다른 가게가 들어올 예정이라
약국은 공사를 하기 시작했고, 할아버지는 항상 집에서 누워 계셨다.
할아버지가 약국 문을 닫고, 집에 혼자 계실 때도 경화 할머니는 아침 마실을 멈추지 않았다.
할머니는 동네 가게마다 들리셔서 인사를 하고, 밤 사이 무슨 일은 없었는지 안부를 묻고,
‘ 어쩜 이리 곱냐? ’라는 찬사를 한 번쯤은 들어야 했다.
오후 늦게까지 무슨 일이 그렇게도 많은지 초저녁에 돌아오시는 때도 많았다.
경화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자주 자리를 비워도 자신의 옆에서 병간호를 하라는 타박조차 안 하셨다.
할머니가 아침마다 꽃단장을 하고, 양산을 쓰고, 대문 밖으로 나가시는 모습을 흐뭇하게 보셨고
혼자 마루에 누워 조각난 하늘을 자주 올려다봤다.
경화와 동생 연화는 선교원에, 아저씨는 택시를 몰고 계시고, 경화 아줌마는 막내 경주와
시장에 가신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혼자 마당에 나와 화분에 꽃을 보고 계셨다.
선교원에 다니지 않는 내가 옥상에서 봉숭아를 보다 경화 할아버지를 보았다.
전날 밤 내린 폭우로 내 봉숭아가 엉망이 되어 버려 속이 상한 나는 계속 봉숭아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 할아버지 뭐하세요? ”
“ 현아구나, 현아 꽃에 물 주니? ”
" 아뇨, 어젯밤에 비가 많이 와서 꽃대가 다 껶여버렸어요. 봉숭아가 다 죽어버릴 것 같아요. "
옥상 위에 내가 심어놓은 봉숭아 분꽃 강낭콩 접시꽃.
식물 심는 것을 좋아했던 나는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옥상으로 올라가
밤새 꽃들이 무사했는지 샅샅이 살펴봤다.
바람이 불거나 비가 세차게 오면
한 밤중에 잠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우산을 쓰고 플래시를 켜고 식물들을 살피러
옥상으로 올라가야 했다.
한 밤중 비가 와도 올라가지 못하는 날은 전설의 고향이 방영되는 날
전설의 고향은 매주 화요일 밤 10시에 방영되는 데
11시쯤 전설의 고향이 끝나면 그 시간부터 다음 날 해가 뜰 때까지 나는 옥상에 올라가지 못했다.
한여름 밤 옥상에 인기척이 늦게까지 들리면 올라갈 수 있지만 화요일 밤 11시 이후엔
절대 옥상으로 올라가지 않았다.
만약 올라갔다면 갑자기 비가 와 빨랫감이 젖지 않도록 걷어 와야 하는 경우이고
그땐 누구든 반드시 플래시를 켜주고 내 옆에 있어야만 했다.
꼬리가 아홉 게 달린 구미호나 내 다리 귀신이 나오는 납량특집이 방영되는 날은
옥상에는 한 사람도 없고, 온 동네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수요일 아침
전날 밤 전설의 고향이 방영되고, 밤새 비가 내린 후라
마당에 흙냄새와 물비린내가 진하게 풍겨 놀라 잠을 깼다.
내 식물들의 안전을 확인하러 옥상으로 뛰어 올라갔다.
‘ 이럴 수가? ’ 내 식물들 모두 허리가 꺾이었다.
밤 새 대나무처럼 대차게 내린 비와 휘파람 소리를 내며 불어대던 바람 때문에
식물들이 반으로 꺾여, 여기저기 나동그라져 있었다.
그중 내가 제일 좋아하던 봉숭아
한 여름이면 내 열 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발갛게 물 드리는 봉숭아, 내 매니큐어
봉숭아가 깊은 잠을 자느라 자신들을 구하러 오지 않은 나를 원망하며 모두 허리가 꺾인 채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여름 동안 적어도 세 번은 봉숭아 물을 들여야 첫눈이 올 때까지 빨간 손톱을 가질 수 있다.
언니들이랑 엄마, 안나, 안나 아줌마랑 여섯 명이 물을 들여야 해서 열 그루도 넘게 잘 키웠는데 전부 다 죽어버렸다.
‘ 내일 아침 일어나 나무젓가락이랑 실로 묶어주려고 했는데 게으름을 피우지 말고 어제 묶어줘야 했어. ‘
강낭콩만 한 눈물이 찔끔 나왔다. 눈물을 훔치고 할아버지를 내려다본다.
“ 현아, 속상해서 어떡하니? ”
“ 다시 심을 거예요. 이따 엄마 오면 꽃집에 씨앗 사러 갈 거예요. ”
“ 현아야, 할아버지랑 꽃집에 씨앗 사러 갈까? 할아버지가 요새 누워만 있었더니 답답하다. “
“ 네, 할아버지 걸어 다니셔도 돼요? 엄마가 할아버지 누워있으셔야 한다고 했는데. “
“ 아니야, 요새 많이 좋아졌어. 계속 누워만 있어서 밖에 좀 나가고 싶어. “
“ 네, 할아버지 같이 나가요. ”
나는 경화 할아버지랑 샬롬 꽃집으로 갔다.
샬롬 꽃집은 샬롬 교회에 다니는 권사님과 딸 모녀 둘이 하는 꽃집이다.
할아버지가 오른손으로는 지팡이를 잡고, 왼손으로 내 어깨를 감쌌다.
나는 할아버지가 넘어지지 않도록 할아버지 허리를 감쌌다.
할아버지가 기울어지지 않도록 나는 중심을 잘 잡아야 했다.
꽃집에 가서 봉숭아, 분꽃, 나팔꽃, 접시꽃 씨앗을 집었다.
“ 현아야, 씨앗은 보관만 잘하면 내 후년에도 싹을 틔우니까
네가 키워보고 싶은 꽃이랑 식물들 다 사.
할아버지 돈 많아. 내 년에도 내 후년에도 꽃 들 잘 키워서 우리 집 마당에 옮겨 주구. “
“ 네. ”
할아버지 입에서 내 년이란 말을 들으니 슬퍼졌다. 엄마는 할아버지가 올해를 못 넘길 거라고 하셨다.
‘ 내 년에도 할아버지가 계시려나? ’ 코끝이 따끔해지려는 것을 얼른 비볐다.
꽃집에 들렀다 집에 오는 길에 시장 코너 영실업 장난감 가게가 보였다.
숨이 턱 막히고, 두 눈이 오백 원짜리 동전만큼 커졌다.
미미인형, 바비인형, 유일한 남자 인형 토토. 내가 미미인형을 처음 본 것은 경화네 집에서였다.
미미 인형
경화가 갖고 있는 미미인형.
미미 인형은 최고급 마론 인형이라 피부가 백인처럼 핑크색에 무게감도 묵직하고 부드러웠다.
그 전 마론 인형들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져 관절 부분이 움직이지 않았는데
미미 인형은 무릎, 팔꿈치, 손목, 발목 관절이 사람처럼 부드럽게 꺾이고 자유자재로 움직였다.
금발에 머리카락 숱도 많고, 머릿결도 비단결 같았다. 내가 너무나 갖고 싶은 마론 인형이었다.
최신형은 옷, 가방, 신발 세트까지 들어있어 오만 원도 넘는다고 했다.
차마 엄마한테 사달라고 말은 못 하고 티브이에서 장난감 가게에서만 보던 인형이었다.
그런 내가 안쓰러워 큰 언니는 플라스틱 인형을 사다 주었다.
플라스틱 인형은 딱딱해서 관절이 구부러지지도 않고, 앉을 수도 무릎을 구부릴 수도 없다.
앉지 못하는 인형이어도 좋았다. 내 인형이니까
경화는 미미랑 바비 인형을 가지고 놀고, 나는 내 인형을 가지고 놀았다.
우리들은 주로 인형 옷 갈아입히기 놀이를 했는데 경화는 할머니가 사다준 인형 옷이 삼십 벌은 넘는 듯했다.
칠면조 할머니 마냥 인형 옷도 화려해서 온갖 종류의 드레스가 열 벌도 넘었다.
거기에 원피스, 미니스커트, 투피스. 바지, 반바지 종류별 신발에 가방에 머리핀 정말 다양한 소품들
옷만 갈아입히고 놀아도 두 시간도 넘게 놀 수 있었다.
내 플라스틱 인형은 옷이 딱 한 벌
그것도 몇 번 입혔다 벗기니 올이 다 풀려 간신히 드레스의 형태만 갖추고 있었다.
인형 놀이를 하다 경화 비위만 잘 맞춰주면 나는 인형 옷을 빌릴 수 있었다.
가끔 경화의 심사가 틀어지면 나는 토토 인형을 가지고 놀아야 했다.
경화는 바비 인형은 절대 내주지 않고, 토토 인형만 내주었다.
토토 인형은 바비와 미미인형의 남자 친구인데, 나는 바비와 미미 사이에서 방황하는 남자 친구 역을 해야 했다.
목소리도 남자처럼 내야 하고, 행동도 남자처럼 해야 해서 나는 토토가 정말 싫었다.
유리창에 진열된 것은 최신형 미미인형이었다.
거기다 인형 화장대, 의자, 큰 옷장, 드레스 세 벌, 구두, 운동화, 가방, 빗 정말 모든 것이 갖춰진
디럭스 급 최신형.
나는 꽃씨를 들고, 유리창에 진열된 최고급 미미 세트를 보느라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 현아야, 현아 저 인형 없지? ”
“ 네. ”
며칠 전 목욕을 하다 내 플라스틱 인형은 사망했다.
그나마 군데군데 남아있던 머리카락은 다 빠지고, 관절마다 물이 다 들어가서 간신히 물은 뺐지만
냄새도 나고 얼굴에 그려진 눈도 잉크가 빠져버려 공포영화에 나오는 귀신이 되어버렸다.
할아버지가 장난감 가게에 들어가더니 커다란 종이 상자를 들고 나오신다.
“ 현아야, 이거 가져라. 현아, 니 거다. 경화랑 놀 때 이거 가지고 같이 놀아.
경화나 할머니한테 내가 사줬다고 말하지 말고, 이건 너랑 나랑 비밀이다. 알았지? “
“ 정말요? 와 감사합니다. ”
나는 신이 나서 할아버지 허리를 더 꼭 감쌌다.
할아버지도 좋으신 지 한참 동안 나를 쳐다보셨다.
남들은 뭉툭하다고 주먹코라고 했던 할아버지의 코도 날렵하고 잘생겨 보였다.
그 날부터 나는 미미인형과 모든 것을 같이 했다.
잠도 내 옆에서 같이 자고, 목욕도 같이 하고, 어디든 같이 다녔다.
진주 한복집에 가서 남은 자투리 천을 얻어와 미미인형의 옷을 손수 만들었다.
언니와 인형 옷을 몇 번 만들어 본 터라 처음에는 실패했지만 나날이 옷 만드는 실력은 늘어갔고
문방구나 장난감 가게에서 팔지는 않지만 독특한 나만의 인형 옷들을 만들어 갔다.
엄마가 틀어주는 구연동화나 전래 동화를 들으며
하루 종일 미미인형 옷을 만들고 있으면 밥을 먹지 않아도 배고픈 줄도 몰랐다.
내가 일주일도 넘게 집 밖으로 나오지 않자, 경화가 궁금해서 우리 집으로 왔다.
인형 놀이를 할 상대가 없어 심심한 것이다.
경화 동생 연화는 토토 역할을 하지 못했다. 미미 친구 바비 역할도 잘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나는 구연동화 테이프 덕에 다양한 목소리를 잘 내었다.
혼자 놀다 보면 일인 다역을 해야 해서 나는 남자, 여자, 할머니, 할아버지, 아줌마, 아저씨, 아이들 다양하게
목소리를 변조하며 놀았다.
변화된 내 목소리를 마당에서 들은 어른들은 내가 아이들 여럿과 놀고 있다고 착각을 할 정도였다.
놀이 상대가 없으니 경화가 심심한 것이 분명했다.
“ 현아야, 놀자. ”
“ 어, 경화 왔네. 그래 들어와. ”
“ 현아야, 이거 뭐야? 와 이거 티브이에서 선전하는 건데. 이거 진짜 비싼 건데. 드레스 진짜 이쁘다. “
“ 응, 이쁘지? ”
“ 이거 어디서 났어? ”
“ 어~ 이거 선물 받았어. ”
“ 뭐 하는 거야? 뭐 만들어? ”
“ 응, 인형 옷. 너도 만들래? ”
“ 아니, 싫어, 귀찮아. 우리 집 가서 인형 놀이하자.
너 인형 생겼으니까 이제 니 인형 가지고 놀자. 우리 집으로 가자. “
“ 그래, 가자. ”
나는 미미인형을 들고 각종 드레스와 소품들을 넣은 천가방
화장대, 옷장, 의자 등을 넣은 운동화 상자를 들고, 자랑스럽게 경화네 집으로 갔다.
경화 할아버지는 마루에 누워 햇빛을 쐬고 계셨다.
할아버지는 경화와 내가 인형을 가지고 노는 것을 몇 시간이나 지켜보셨다.
순간순간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할아버지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따듯한 저녁노을처럼 할아버지 얼굴에 연주황색 웃음이 퍼져 나가고 있었다.
인형 놀이가 지겨워질 무렵
할아버지는 롯데 슈퍼로 가서 쭈쭈바를 사 먹으라고 백 원씩 주셨다.
롯데 슈퍼에 가서 쭈쭈바를 사 먹고, 남은 돈으로 뽀빠이를 사고 경화네 집에 돌아왔다.
할아버지는 마루에서 등을 돌리고 주무시고 계셨다.
숨을 쉴 때마다 할아버지의 등이 천천히 오르락내리락 움직였다
“ 안녕히 계세요. ”
할아버지가 깰까 봐 인사도 하지 못하고 나는 미미인형과 집으로 돌아왔다.
그것이 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란 걸 알았다면 할아버지 등을 조심스럽게 안아 드렸을 텐데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을 텐데
나는 할아버지의 발채로 조심스레 살금살금 걸어가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도 미미인형은 내 옆에서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이른 새벽 나는 경화에서 들리는 울음소리에 잠이 깼다.
"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어떻게? 안돼요. 아버지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안 돼요. 아버지 안돼요. "
" 영감~안돼. 안돼, 날 두고 이렇게 갑자기 가면 안돼. "
" 할아버지, 할아버지 "
경화네 집에서 들려오는 커다란 울음소리에
하나 둘 씩, 경화네 집 근처 집들의 불이 켜지더니 이윽고 온 동네 불이 모두 켜졌다.
경화네 식구들 우는 소리에 온 동네 새벽잠이 깨어버렸다.
' 할아버지, 할아버지, 안 돼.
잘 가시라고 인사도 못했는데. 한 번 안아드리지도 못했는데. 윽윽윽 ~ '
이부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나는 울기 시작했다.
경화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온 식구들이 큰 소리로 울어대면 집안의 누군가가 죽었다는 것이다.
우리 앞집 경화네서 우는 소리가 들렸다면 그 누군가는 할아버지다.
" 야, 너 자다가 왜 울어? "
" 할아버지가 경화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
“ 우리 할아버지도 아니고, 경화네 할아버진데 왜 네가 울어? "
" 악~ 할아버지 할아버지 "
서럽게 우는 소리에 엄마가 방으로 들어오셨다.
" 현아야, 괜찮아. 할아버지 아무래도 자다가 돌아가신 것 같아. 편하게 고통스럽지 않게 돌아가셨을 거야. "
" 이제 할아버지 다시는 못 보잖아.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잖아.
나, 할아버지한테 갈래. 할아버지 보고 싶어. "
" 안 돼, 현아야, 지금은 안 돼. 지금 경화네 정신없어.
정리가 되면 할아버지 보러 가자. 일단 좀 자. 엄마가 다시 깨워줄게. "
엄마의 약속을 믿고 누웠지만 나는 다시 잠이 들지 못했다.
얼른 대문을 넘어 경화 네로 달려가고 싶었다. 할아버지의 짧고 뭉툭한 손을 다시 만져보고 싶었다.
저린 다리를 주물러 할아버지가 저 멀리로 걸어가실 때 다리를 절지 않도록 해드리고 싶었다.
내가 만든 미미인형 옷도 보여드리지 못했고, 아직 할아버지랑 하고 싶은 일들이,
말하지 못한 것들이 많았는데 할아버지는 어젯밤 훌쩍 떠나셨다.
잘 가시라는 인사만이라도 그동안 감사했다고, 씩씩하게 잘 지낼 테니 걱정하지 마시라는 말이라도 했으면 좋을 텐데.
어제 오후 할아버지의 등이 내가 본 마지막 모습이었다.
기다란 관이 경화 네로 들어가고, 할아버지는 한복을 곱게 입고 관 속에 누우셨다.
수많은 사람들이 경화네 집을 찾아왔다.
동네 사람들 모두 경화네 집으로 들어갔고, 눈이 벌게져서 집을 나왔다.
경화네 식구들 모두 검은색 한복과 양복을 입고, 눈이 부은 채로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엄마는 경화 네로 가서 요리를 하고 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고 계셨다.
나는 엄마를 따라 경화네 집에 계속 있었지만
어른들은 병풍 뒤 할아버지가 누워계신 관으로 가지 못하게 했다.
나는 할아버지랑 마지막 인사를 해야 하는데 아저씨가 할아버지 주위를 지키고 있어
할아버지를 만날 수 없었다.
경화 아저씨가 화장실에 간 사이 나는 병풍 뒤 할아버지에게 얼른 갔다.
할아버지의 얼굴과 손은 차갑게 식어 있었고, 빨갛고 뭉툭했던 주먹코도 더 이상 빨갛지 않았다.
편안히 주무시고 있는 것 같이 다행이었다.
할아버지의 양쪽 손에 작은 돌멩이 두 개를 쥐어드렸다.
놀이터나 길에서 동그란 돌멩이를 주으면
돌멩이 위에 얼굴을 그리고, 물감으로 색칠해 돌멩이를 사람이라 생각하며 놀았다.
내 보물 상자에는 엄마, 아빠, 오빠, 큰 언니, 작은 언니, 나 이렇게 여섯 개의 돌멩이가 있다.
미미인형을 선물 받은 날
나도 할아버지에게 선물을 드리고 싶었다.
돈이 없던 나는 할아버지를 닮은 돌멩이를 그려 드리고 싶었다.
할아버지의 얼굴을 닮은 돌멩이를 구하느라 놀이터와 공사장 돌멩이가 있을 만한 장소를 찾아다녔다.
마침내 할아버지 얼굴을 닮은 돌멩이를 찾았고, 조심스럽게 할아버지의 얼굴을 그렸다.
물감으로 색칠하고, 특별히 할아버지 돌멩이에는 반질반질 니스까지 칠해 말렸다.
언젠가 할아버지와 나
단 둘이 있을 때 몰래 드리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지만 나는 그 순간을 놓치고 말았다.
할아버지에게 직접 드렸다면 정말 좋아하셨을 텐데, 껄껄 웃으시며 고맙다고 말하셨을 텐데.
할아버지의 말소리도 웃음소리도 들리는 것 같아 눈물이 나왔다.
“ 할아버지, 미미 인형 사주셔서 감사해요. 잘 가지고 놀게요.
봉숭아, 나팔꽃, 분꽃 씨앗을 심었다가 꽃이 피면 마당 화단에 옮겨 심어놓을게요.
할머니랑 경화, 연화, 경주를 보러 오실 때나 마루에 앉아 계실 때 한 번씩 쳐다보시고 가세요.
가끔 우리 집에도 우리 옥상에도 놀러 오세요. 꽃들 잘 가꿀게요.
밥 잘 먹고, 잘 자고, 아프지 않고, 저도 꽃들처럼 잘 자랄게요.
할아버지, 내가 보고 싶으실 땐 내 돌멩이를 보세요.
내 돌멩이랑 할아버지 돌멩이가 같이 있는 것처럼 할아버지 곁엔 항상 제가 있을 거예요.
할아버지 보고 싶어요. “
할아버지에게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다니 이제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이제 웃을 수 있었다.
울고 있는 경화 옆으로 가서 할아버지 대신 경화의 손을 잡아줬다.
경화는 벌건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 내가 할아버지를 대신해서 너를 돌봐줄게. 그러기로 할아버지랑 약속했으니까
나는 할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킬 거야. ‘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경화와 나는 할아버지의 바람대로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밤이 되자 경화네 집에 근조 등이 걸렸다.
근조 등은 할아버지처럼 우리 동네의 어둠을 외롭게 밝혀주고 있었다.
은은하고 잔잔하게 동네의 어둠을 몰아내고 있었다.
장례식 마지막 날 해가 환히 떠있는 오후
경화네 집에서 할아버지의 관이 빨간 천으로 뒤덮여 나가는 것을 보았다.
엄마가 어린아이는 관을 보는 것이 아니라고 어서 집으로 가라고 했지만
나는 그렇게 할아버지를 보낼 수가 없었다.
경화 할머니, 아저씨, 아줌마, 경화, 선화, 경수 모두 목 놓아 우는 것을 옥상 위에서 내려다보았다.
할아버지의 관이 대문을 나가고, 약국을 지나, 동네를 떠나는 것을 지켜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할아버지에게 보내는 작별인사라고
“ 할아버지, 더 이상 아프지 말고, 하늘에 가셔서 이제 편히 쉬세요.
나는 한일 약국에는 다시 가지 않을 거예요.
경화가 아무리 내 속을 긁어도 조금 참아볼게요. 그러니까 걱정하시지 말고 하늘나라로 가세요. “
“ 현아야, 착하게 잘 살아라. 엄마 말씀 잘 듣고, 엄마 약 심부름도 잘하고. 지금처럼 착하게 잘 자라라. “
우리는 서로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한 참 뒤 할아버지의 가게는 인테리어 공사를 마치고 김 약국이 문을 열었다.
한일 약국, 김 약국 둘 다 가지 않았다.
한참이나 멀어도 학교 옆 약국으로 걸어갔다.
겨울이든 여름이든 두 곳은 가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도 한참 동안 김 약국을 가지 않았다.
선교원에서 돌아온 경화가 우리 집으로 들어왔다.
" 경화야, 덥지? 이거 먹어. "
냉장고에서 쭈쭈바를 꺼내 경화에게 건네주고 경화네 집으로 가 마루에 걸터앉았다.
마루 위에 토토가 미미 인형 바비 인형 사이에 앉아있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는 경화와 조금 친해져 집을 오가며 놀기 시작했다.
할아버지의 마지막 부탁이었으니까 경화가 변덕을 피우고 고집을 부려도 어지간하면 참아주었다.
" 고마워. 현아야, 우리 인형 놀이하자. "
" 그래 "
" 경화야, 할아버지 보고 싶다. 그렇지? "
" 응, 너도 우리 할아버지 보고 싶어? "
" 미미인형 보니까 할아버지 생각나. "
“ 응? 왜? 왜 네가 미미인형을 보면 우리 할아버지가 생각나? 왜? ”
“ 어? 어? 그게. ”
모르고 있는 듯했다. 경화는 분명 모르고 있는 게 확실했다.
천사 같았던 경화의 얼굴이 질투로 인해 순식간에 악마처럼 변해갔다.
경화의 할아버지가 미미 인형을 사주셨는데.
할아버지가 경화나 할머니에게 비밀로 하라고 한 데는 그 이유가 있었는데
경화랑 이제 친구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엉겁결에 모든 걸 말해버렸다.
아직 경화는 내 친구가 아니었다.
“ 왜? 왜? 니 미미인형 하고 우리 할아버지랑 무슨 상관인데?
너, 그 인형 우리 할아버지가 사줬지? 그렇지? 내 말이 맞지? “
“ 어, 그게 너네 할아버지가 사주셨는 데. 말하지 말라고 하셨어. 그래서 말 안 한 거야. “
“ 왜 우리 할아버지가 너한테 인형을 사줘? 왜? 왜? 왜? 그 인형 가져와. 내 거야.
우리 할아버지가 사줬으니까 그거 내 거야. “
“ 아니야, 그거 내 거야. 할아버지가 나 가지라고 하셨어. ”
“ 아니야. 우리 할아버지가 사줬으니까 내 거야. 내 거 내놔. 내 거야. 내 거. “
“ 아니야, 내 거야. 분명히 할아버지가 내 거라고 하셨어. 그러니까 내 거야. ”
지지 않으려고 뺏기지 않으려고 나도 악을 썼다.
갑자기 “ 휙~ ” 경화가 내 머리를 잡아채고 발로 내 배를 차기 시작했다.
질 수 없다. 절대 내 인형을 뺏길 수 없다. 나도 경화의 머리채를 잡고 흔들어댔다.
“ 악~~~ ”
“ 네가 먼저 놔. ”
“ 싫어, 네가 먼저 놔. ”
서로 놓지 않고 머리채를 흔든다. 비명이 난무하며 발이 공중에서 허둥댄다.
내가 경화보다 머리통이 하나 더 있고, 덩치도 좋은 데 질 싸움이 아니다.
그러니 경화가 내 머리채를 잡고 시작한 것이다. 한 번도 말싸움이나 몸싸움에서 진 적이 없다.
더군다나 미미인형은 절대 뺏길 수 없다. 할아버지가 주신 인형이니까. 마지막 선물이니까
경화가 내 머리채를 잡던 손을 놓았다.
어차피 질 싸움이니 자기편이 필요했고, 누군가를 부르기 위해서는 울어야 했다.
경화의 커다란 울음소리가 터지기 시작했다.
나도 손을 놓았다, 눈물이 나왔지만 절대 울지 않았다. 울면 진 거다. 그러다 인형을 뺏길 수도 있다.
서럽게 우는 경화의 울음소리에 마침 마실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던 경화 할머니가
양산을 집어던지고 뛰어오셨다.
“ 할머니, 할머니 현아 인형 가져와. 쟤네 집에 있는 미미 인형 가져와. 그거 우리 할아버지가 사 준거야. “
경화 할머니가 나를 노려보신다.
“ 아니에요, 할아버지가 저 사주신 거예요. 저 가지라고 했어요. ”
“ 할머니, 가져와. 현아 인형 가져와. 내 거야. 내 거. 내 인형이야.
우리 할아버지가 사 주셨으니 그것도 내 거야. ”
“ 아니야, 내 거야. 내 인형이야. ”
경화 할머니가 순간 내 팔을 잡으셨다.
“ 현아, 너 우리 경화 머리채 잡았지? 배도 찼지? ”
“ 경화가 먼저 내 머리채 잡고 흔들었어요. 배도 차고 ”
“ 네가 우리 경화 머리채를 잡아 흔들어? ” 할머니가 갑자기 내 머리채를 잡았다.
경화가 쏜 살같이 우리 집으로 튀어 들어간다.
‘ 안 돼, 인형이다. 인형. 내 미미 인형을 가지러 우리 집으로 간다. 대문을 닫고 나왔어야 했는데. ’
“ 할머니, 놔주세요. 이 손 놔주세요. 다시는 경화 안 때릴게요. 제발 놔주세요. “
“ 네가 뭔데 우리 경화를 때려? ”
“ 할머니, 제가 잘 못했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
“ 경화 할아버지가 사주셨으면 그것도 경화꺼지. 그냥 가져다주면 될 일이지. 왜 이렇게 경화를 괴롭혀. “
“ 아니에요, 할머니, 할아버지가 제 거라고 하셨어요. 제 인형이에요. ”
어느새 경화의 손에는 내 미미 인형과 옷들이 들어있는 작은 손가방이 들려 있었다.
“ 경화야, 그거 내 거야. 그거 내 거야. 제발 돌려줘. ”
“ 아니야, 이거 니 꺼 아니야. 우리 할아버지가 사주셨으니 이것도 내 거야. “
경화가 방 안으로 들어가 큰 검정 가위를 들고 나온다.
‘ 싹둑싹둑 ‘ 미미의 머리카락이 탐스러운 금발 머리카락이 잘려 나간다. 긴 생머리가 까까머리가 되었다.
미미 옷이 잘려 나간다. 모든 옷이 다 찢겼다.
드레스도 치마도 바지도 내가 직접 만든 인형 옷들이 걸레 조각이 되었다.
검정 유성 사인펜으로 미미의 얼굴이 새까맣게 칠해졌다.
의자며 가방, 운동화 구두, 작은 소품, 모든 것들이 경화의 발에 밟혔다.
“ 악~ 앙~ 엄마, 엄마, 엄마 ”
나는 소리 지르며 울기 시작했다. 소리소리 지르며 울어대기 시작했다.
시장에서 장을 보고 돌아오던 경화 엄마가 놀라서 나를 쳐다보고
할머니가 아줌마를 보더니 내 머리채를 슬그머니 놓았다.
“ 아줌마, 경화가, 경화가 내 인형을 다 망가뜨렸어요.
할아버지가 사 주신 인형인데. 경화랑 사이좋게 잘 가지고 놀라고 할아버지가 사 주신 인형인데
다 망가져 버렸어요. ”
“ 경화야, 아이고 너 진짜 왜 이러니? 어쩌려고 그래? 내가 진짜 속상해서 못 살겠어.
어머니, 어머니도 제발 좀 그만 하세요. 이게 대체 무슨 짓이에요? 동네 창피해서 이사라도 가야지.
현아야, 울지 마 아줌마가 미안하다. 아줌마가 미안해.
아줌마가 경화 혼 내줄게. 경화, 너 이 계집애 너 이리 와. “
“ 할머니, 할머니, 엄마가 나 때리려고 그래. ”
경화가 요리조리 숨다 할머니한테 달려간다.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옷에 묻은 흙을 털고 내 미미인형을 다시 집어 들었다.
인형을 집어 드는 나를 보고 경화는 웃으며 말했다.
“ 이제 그거 가지고 놀면 되겠네. ” 인형을 집어 들고 경화에게로 걸어갔다.
놀란 경화가 뒷걸음질 치다 할머니 뒤로 숨는다. 경화를 향해 내가 쏘아붙이며 말했다.
“ 너는 이제 내 친구 아니야. 앞으로 절대 너랑 놀지 않을 거야. 너랑 다시는 놀지 않을 거야.
너 나한테 아는 체하지 마. 너랑 한 마디도 하지 않을 거니까. “
“ 저저저, 어른이 있는 데도, 너 한 번만 더 우리 경화 괴롭혀봐. 가만히 안 둘 거야. ”
할머니가 말했다. 집으로 가다 할머니를 휙 돌아본다.
“ 아휴, 아휴, 아휴~~~~ 내가 못 살아. ” ‘찰싹찰싹 ’ 경화 아줌마가 경화 등짝을 후두려 치는 소리가 들린다.
“ 왜 우리 경화를 때려? 왜 때려? 우리 경화를 ” 할머니가 아줌마에게 소리를 지른다.
“ 엄마랑 할아버지는 나보다 현아를 더 좋아해.
맨날 현아만 착하다고 하고, 현아 닮으라고 하고 나만 미워해.
엄마도 할아버지도 다 미워. 다 싫어. 할아버지 보러 앞으로 안 갈 거야. "
경화의 커다란 울음소리도 들린다.
대문을 닫고, 수돗가로 가서 미미인형 얼굴을 닦는다.
비누로 빨래 비누로 퐁퐁으로 때수건으로 수세미로 아무리 닦아도 까만 얼굴은 다시는 하얘지지 않았다.
미미의 큰 눈을 다시는 볼 수 없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모든 것이 담긴 신발 상자에 미미인형을 넣고 뚜껑을 덮었다.
까만 미미인형 얼굴처럼 경화를 향한 나의 마음도 까매졌다.
‘ 경화랑 사이좋게 놀아라. ‘
할아버지가 하셨던 마지막 부탁도 이제 소용없다.
할아버지와 했던 마지막 약속은 이제 지키지 않을 거니까
경화 할머니를 봐도 인사하지 않았다.
할머니 양산만 보여도, 사각사각 한복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도 먼 길을 돌아가거나 모퉁이에 숨어버렸다.
매미가 울어대기 시작한 여름
봉숭아에 아기 손톱만 한 꽃망울이 맺히는 여름
경화가 김동주 손을 잡고 웃으며 집으로 온 날
경화의 행복해하는 모습을 본 그날
나는 햇살 선교원에 다녀야겠다고 결심했다.